중앙동은 월암 8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일로읍에서 청호리로 가는 일로로를 경계로 20여년 전에 월암2리 신흥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축협 앞의 길 오른쪽은 시장촌 그리고 왼쪽이 중앙동이다.
지명유래
미기재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원래 월암4리 월암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소유했던 농지에 조성된 마을이다. 1983년 무렵 축협 앞 큰 길 가에 소도읍 가꾸기를 하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때는 평당 500만원이 넘게 거래되었던 땅들이지만 현재는 인구의 감소와 상권의 축소가 맞물려 시세가 훨씬 낮게 형성된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일로 주민들은 일로읍에서 제일 좋은 터가 두 자리 있다고 한다. 하나는 토지개량조합이 있는 자리이고 또 하나는 이 마을 옆의 보해상사가 있는 자리다. 보해상사 터는 예전에 죽산리에 있었던 면사무소가 옮겨 온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보해상사 앞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옹기배가 다녔던 선착장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사주변을 파면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상사 앞에서 무전산까지 둑이 있었는데 지금도 주민들은 둑방길이라 부른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이 농지 옆에 있으면서도 주민들 중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대부분 상인과 직장인들로 이루어졌다
주요시설
중앙동에 소속된 대표적인 건물은 희망아파트와 연립주택 거전우리빌 아파트 그리고 남부 신협과 농어민상담소 중앙치과 등이 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월암리 11개 마을에서 가장 면적이 좁은 마을이지만 번잡한 거리이기도 하다. 일로읍 대부분의 거리는 저녁 8시만 되면 깜깜한 밤이 되지만 이 지역은 10시가 넘어도 상점의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 많이 있다. 그만큼 유동인구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큰길 옆으로 목화 타는 공장도 있었고 밀가루를 빻는 제분소도 있었다. 또한 똥비누라 일컬어지는 검정빨래비누 공장도 있었다. 이 똥비누는 쌀을 찧고 남은 누과에 양잿물을 섞어서 만든 비누로 예전에 세탁용품으로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천사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보해상사 앞 구 철로 길 둔덕은 경사지고 양지바른 곳이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이면 10여명의 천사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눕기도 하고 이를 잡기도 하는 등 그들만의 해방구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는 인가가 없고 주민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 앞에 있는 무전산은 원래 ‘황우등’ 또는 ‘평정골’이라 했는데 후일 이 산에 통신과 관련된 송신탑 등이 건립되고서부터 ‘무전산’이라 했다. 정부는 194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무전산에서 장항포 들까지 비행장 건설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지만 무전산의 기능이 크게 부각되면서 무산되었다. 즉 무전산의 송수신 기능은 태평양의 무선도 잡아낼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어서 무전산을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무선 안테나가 12개 있었는데 지금은 5개만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큰샘이 있었다. 참샘이라고도 불리는 이 샘은 현재 거전 우리빌 아파트 101동과 102동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무안 중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일로읍 사람 모두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잘 나왔다. 실지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하루 종일 두레박으로 퍼 올려도 수위가 그대로였다고 한다. 또한 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샘물은 식용만이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사용하였는데 지하수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물길이 마르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