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동은 남성1리에 속하는 마을로 보살봉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서당뫼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동이란 마을 이름은 주민들의 면학 열기와 관련이 있다. 주민들은 오래전에 연동에 있는 서당뫼에 서당을 지어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이들은 새벽이 되자마자 모두 일어나 책을 읽었다. 대체로 새벽녘이 올 때, 별이 가장 밝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 별의 이름이 북쪽엔 북두성이고 남쪽엔 남두성이다. 이 남두성이 가장 밝을 때인 새벽 2- 3시에 마을의 학동들이 일어나서 서당으로 와 책을 읽었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의 이러한 학문적 열기를 살리기 위하여 마을이름을 남두성에서 ‘두’를 뺀 ‘남성동(南星洞)’이라 하였다. 현재도 이 서당터에는 기와조각 등이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산 이름으로 남생이라는 곳이 있어서 남성리 라고 했다는 의견(배재영, 68세)도 있다. 원래 남성동은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청계면 소재지 쪽의 암탉골에서 시작하였다. 그 후 어떤 연유인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재 암탉골에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확히 가리기 어렵다. 마을 회관 앞 표지석에는 ‘일찍이 나주정씨, 나주나씨, 전주최씨, 여산송씨, 무안박씨, 장흥고씨, 달성배씨, 평택임씨 등이 主 戶를 이루었다’ 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이 중에서 나주정씨가 최초로 들어왔다고 이야기한다.
즉,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던 나주정씨 정황수가 보살봉 아래의 입안지지(立眼之地, 곧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땅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음, 나라에서 공신에게 주는 특전)로 현재의 남성동 일대를 하사받아 나주정씨의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고 알고 있다. 당시 사패지(賜牌地)로 32정의 땅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나주 정씨 소유의 땅이 많으며 마을의 오른쪽인 비살뫼 자락에는 정황수의 묘와 월봉재가 있다.
그러나 입향시조와 성씨 자료에 의하면 ‘여산송씨 송옥명이 나주 금안동에서 세거하다가 갑자사화(1504년)로 인하여 살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무안지망집》에는 장흥고씨 고영호(호-雙愧, 1555-1617)가 연동에서 태어나 가업(家業)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나주정씨, 여산송씨, 장흥고씨 등 세 성씨가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 들어와 가업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정씨, 배씨, 최씨 등 혼합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 자료인《호구총수》에는 남성동이란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의《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부터 남성동이란 지명이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밭작물인 양파를 주로 생산하고 있으며, 소, 돼지 등 가축 사육을 위해 사료가 되는 작물의 농사를 한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의 주산은 보살봉(菩薩峰)으로 평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예로부터 평지에 돌출된 산의 기슭에 터를 닦은 마을은 인물이 많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마을에서도 6대 문장이 나왔으며 한집안에서 내리 3대째 진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살봉은 동쪽으로 승달산을 맞아들이고 서해로 바다와 많은 섬을 거느리는 웅대한 기상을 품고 있다. 또한, 이는 승달산 앞에 있는 목탁으로 풀이되는 명산(名山)이며, 원래 ‘소산’에서 ‘소살봉’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다시 ‘보살봉’으로 부르고 있다. 보살봉은 가뭄이면 주민들이 뜻을 모아 기우제를 지냈고, 변란 시에는 도대봉의 봉화를 받아 봉화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앞산은 ‘서당뫼’라 부르는 곳으로 지형이 연잎(蓮葉)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에 이 산에는 무덤 등에 석물(石物)을 하지 못하게 하며, 이는 연잎의 형상이어서 석물을 하면 연잎이 가라앉는다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농사용 저수지인 남성지(南星池)가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과 주변에는 연골, 연등, 연등개, 백련동, 연곡 등 연(蓮)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서당뫼의 줄기에 ‘방망치’라는 지명도 있다. 마치 야구방망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 ‘百子千孫之地’(백자천손지지)의 터가 있었다고 하나 간척이 된 후로 그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방망치 위쪽에 ‘물이 들면 솥뚜껑이고 빠지면 자라목 같다.’라는 소드랑섬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비살뫼 아래에 1980년에 세워진 나주정씨 재각인 ‘월봉재’가 있다. 임진왜란 공신 월봉 정황수를 모시는 재각으로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이 있다. 6개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안에는 월봉공 사실기와 월봉재 창건기를 기록한 두 개의 현판과 1개의 액자가 걸려있다.
또한, 이 마을의 학문적 전통을 보여주는 강학소가 있다. ‘남성정사(南星精舍)’로 성암(惺菴) 배병구(裵炳裘 1883~1967) 선생의 강학공간이다. 성암 선생은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충효의 정신을 후세에게 전수하고 나아가 만년에 쉬면서 후손들의 강학을 위해 세운 정사이다. 이 정사는 1946년에 지었는데 지을 때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성암공이 8세 때 심은 소나무를 베어 정사의 기둥을 세웠으며, 집안이 가난해 집에서는 죽을 먹었지만, 정사를 짓는 인부들에게만은 따뜻한 밥을 지어서 먹일 정도로 정성을 다해 지었다고 한다. 배병구 선생은 1925년에 무안군지인 《면성지(綿城誌)》를 간행할 때 참여하여 문묘(文廟)와 산천조(山川條)의 기록을 정리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에는 남성정사 이전부터 초당(草堂)이 있어 많은 문장과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제자 중에 초대 전남지사를 지냈던 이남규를 비롯하여 박시배 등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산실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이남규 전 지사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 주변 사람들이 한적한 어촌의 복길리 출신인 이남규 지사를 얕보고 그의 학문적 소양을 묻자, 성암 선생은 이 지사가 15세 때 서당에서 백일장 대회를 했을 때 썼던 시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시는 병풍을 을 소재로 하였는데 ‘꽃은 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사계절 내내 붉게 피어 있고, 새는 생사를 잊어버리고 천년을 고요하게 지내더라(花不飄泠 四節紅 하고 鳥離生死 千年黙 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마을에는 동학(東學)과 관련한 이야기도 많았다. 마을 옆의 ‘저 너머’라는 곳에 송씨들이 살았는데, 신촌 할아버지 또는 중등양반이라고 불리기도 한 송씨 중의 한 분이 동학농민혁명 때 접주를 했다고 한다. 응당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가 고막원전투 이후 관군에게 진압되면서, 동학접주가 살았던 이 마을도 관군들에 의해 화재를 당하여 집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 이후에 송씨들은 ‘요 너머’라는 마을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또한,《무안군사》에 의하면 같은 마을에 사는 박치상(남성리 159, 당시 나이 25세, 농업) 선생도 1894년 11월에 진행된 동학농민항쟁인 고막원전투에 동학군으로 참여하여 우퇴부 총상을 입은 후 조카 박황금의 집에서 치료받다가 별세하였다고 전한다.
이같이 동학농민항쟁에 참여한 이 마을 사람으로는 고시운(高時運, 1854–1937) 공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고고약(高膏藥)이란 유명한 고약을 제조하여 팔면서, 광산구 대촌에서 동학군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였다. 이후 이 마을로 옮겨 와 공부를 통해 한의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한의학뿐만 아니라 조각, 그림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가 만든 고약은 종기에 효과가 좋아 삼남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나종선 공도 침을 잘 놨다. 그의 후손이 살던 집에는 공이 사용했던 침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의 인물로는 경찰공무원 출신이자 한학자로서 무안향교 전교를 역임함과 아울러 목포대학교 이전에 중추적 역할을 한 배석오 선생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아래쪽에 ‘시여샘(세지)’이 있다. 이 샘은 무안지역 일원에 널리 알려진 샘물로, ‘무안의 못샘 -화설당샘-농공단지샘-상마정샘-시여샘’으로 연결되는 수맥(水脈)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샘은 수량이 풍부해서 양수기로 온종일 물을 품어 올려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여샘의 수맥을 찾으려고 주변을 파헤쳤으나 찾지 못했으며,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을 내는 샘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골재채취장이었던 ‘연동’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 나온 골재는 망운비행장의 터를 닦는 기초 공사에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연동에서 골재를 캐어 운반하는 모습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는데, ‘여러 대의 멍텅구리 배에 골재를 싣고 한 척의 기선이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골재는 서해안의 내해 곧 ‘무안강’이라 불리는 물길을 따라 청계만에서 망운만에 이르러 지금의 무안국제공항인 망운비행장의 공사장까지 운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