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도림 1리 청계면 청림마을 작성
  • 청림마을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의 세대수는 251세대이며, 총인구수는 323명(남184, 여 139)이다.
자연마을 구성
도림1리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 도림동, 대흥동, 양촌, 청림 등 다섯 마을로 이루어졌었으나, 목포대학교가 생기면서 개울 건너 백운정, 도림동 그리고 대흥동 일부는 학교부지로 편입되고, 지금은 양촌과 청림마을로 구성되었다.
지명유래
청림(靑林)은 푸른 숲이 무성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촌(陽村 또는 陽之村)은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마을이란 의미다. 그리고 도림리(道林里)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풍수에 능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승달산을 바라보며 노스님 셋이 불경을 읽고 있는 노승예불형의 길지(吉地)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승달산 인근의 조금 멀리 떨어진 남성리 소살봉은 보살산이고, 목포대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었던 석산(속칭 딴산)은 칠성산의 형국이었다. 그리하여 보살산의 보살할멈이 격양동(도림7리)에서 밥을 지어 칠성산에다 차려놓으면 승달산의 스님이 공양한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왔다. 또한 승달산의 열두 봉우리가 12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형국이어서 때가 되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를 닦는 숲 곧 도림(道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난 1982년에 목포 송림에 있던 목포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면서 무안 도림으로 확대하여 이전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요람이 되었다. 선인들의 예견지명이 돋보이는 지명유래라고 하겠다. 또한, 도림은 말 그대로 ‘큰길 가에 숲이 무성하다.’라는 뜻으로 승달산 자락에 묻힌 마을의 모습을 자연스레 표현했다고도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양촌마을의 입향조는 약 500여 년 전에 터를 잡은 청주한씨 한번인(韓番仁, 자-기옥, 호-둔암遯菴)으로, 그는 원래 장흥군 장도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이곳 도림리 유점동(鍮店洞)에 터를 잡았으며, 평생 명예와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보냈다. 또한, 원래 이 마을에 국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선행연구가 있어서 조사해보니 현재는 한 가구도 없었고 ‘냉골’이라고 불리는 곳에 국씨묘가 있었다. 청림마을은 임란 이후 들어온 무안박씨가 입향조이다. 태봉마을 앞 작천에서 분가한 박제(朴悌, 1547-1620) 장군의 후손들이다. 박제 장군은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보평산전투와 그 부인인 여산 씨의 열녀행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여산송씨가 순절한 이후 두 번째 부인으로 평강채씨를 맞았는데 그 후손이 청림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도림동의 전주이씨 입향조는 완풍대군 7대손 이근용(1590-1633)이다. 공은 담양 월산면 홍농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이거했으며, 입촌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백운정(白雲亭)과 청림은 무안박씨들이 주로 살았고, 양촌과 대흥동은 청주한씨들, 그리고 도림촌은 전주이씨들이 주로 살았다. 도림촌은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붓공장) 등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승달산의 노승예불형(老僧禮佛) :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하고 있는 형상으로 호남 8대지 중 제1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마을성씨
박씨와 한씨가 많았으나 지금은 혼합 성씨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청림, 양지촌, 백운정, 도림동 등으로 표기되다가 도림동으로 통일되었다. 현재는 행정명 도림1리, 마을명 ‘청림’으로 부른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에 무안군 일서면 청림, 양지촌, 백운정으로 나온다. 1910년에 목포부로 편입되어 1912년에 청림, 양지촌, 도림동으로 구분하여 1914년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1917년 자료에는 청림, 양지촌, 도림동, 대흥리가 기록되어 있고, 1987년에는 도림리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백두대간의 끝자락을 이루는 승달산 자락을 배경으로 형성된 도림마을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고을이었다. 승달산 골짜기마다 암자가 있을 정도였고 사람들도 이 마을을 지나 승달산과 암자를 다녔었다. 골짜기에서 흐르던 맑은 물이 마을 가운데로 흐르면서 사람이 정주하기 좋은 마을이었다. 목포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청림 마을 뒤에 있는 물맞이 고랑은 많은 사람이 신경통과 관절염 치료를 위해 줄을 설 정도로 수량도 풍부하고 효험도 있었다. 주민들은 ‘앉은뱅이도 이 고랑에서 물을 맞으면 벌떡 일어설 정도로 효험이 있는 물이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목포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지하수 개발 등이 이루어져 마을 주민들이 쓰는 식수마저 고갈되기도 했다. 학교부지로 편입된 마을 주민들은 도림 3리와 5리로 이사하고 현재 남아 있는 마을은 외부인구 유입과 빌라 등의 신축으로 반농반도시의 성격을 띄고 있다. 대부분 대학생과 직장인 등 이동인구를 제외한 정주민인 주민들은 ‘청계면 소재지 마을 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조용하고 마을 발전은 더딘 편’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원주민들은 10여 가구 정도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주로 콩, 깨, 양파, 대파를 생산하며 자급자족하고 있다.
주요시설
국립목포대학교
마을변화
이 마을의 가장 큰 변화는 1982년에 목포대학교 이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교육, 물류, 행정 등이 합쳐진 도농복합마을로 변모한 것이었다. 당시 행정소속을 달리하는 목포에서 무안으로 목포대학교 유치를 어렵게 주도했던 이는 남성리의 배석오 선생과 이 마을의 박희양 선생이었다. 두 분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학교를 유치하면서 수많은 난관과 잡음이 있었지만 결국 청계면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조용한 농촌마을에 대학이 이전되면서, 신문물의 젊은 대학생과 주변의 상업지역들이 함께 과도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외부인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으며, 또한 원주민들도 함께 어우러져 거주하고 있다. 현재 청계면 대학가 등 상업지구 등의 활성화를 통하여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를 비롯하여 부녀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나, 현재 부녀회는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국립목포대학교 도서관을 비롯한 문화시설
전통식품/특산품
붓 생산공장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 국립목포대학교 고인돌 4기, 은진팬 평버들, 대암동 고인돌
동/식물
동동주점 앞의 당산나무(느티나무)가 있었으나 고사하였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국립목포대학교를 중심으로 냉골, 솔동재, 범바우, 평버들(체육관), 천치골(이씨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 따박골, 사장골, 사자바위, 이패빠골, 수리바위, 큰골, 작은큰골, 갱기재, 뒷고랑, 매봉, 양촌재, 안산재, 빈대절터, 숯골, 토골, 사직골(붓공장) 등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천치골은 목포대학교 뒤쪽에서 법천사로 오르는 길로 예전에는 천치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빈대절터는 사장골에 있으며 지금도 돌을 들치면 빈대가 나온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고인돌이 많았다. 은진팬 평버들이라 하는 곳에는 고인돌로 이루어진 산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 상당 부분이 공사 등으로 사라지고 현재 몇 기만 전시용으로 남아 있다. 목포대 옆 대암동에도 고인돌이 있고 일로읍 월암리 고인돌이 목포대 정문 오른쪽 동산에 4기가 옮겨와 전시되어 있다. 목포대학교 경내엔 ‘삼천재(三遷齋)’라는 서당 겸 재실이 있으며, 박순(朴洵, 1681-1765, 자-윤보. 호-죽포(竹圃))효자각도 있다. 두 개의 효행비가 앞에 있으며 1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효자각의 주인공 박순은 지극한 효자였다. 병석에 든 모친에게는 꿩고기를, 부친에게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죽순과 잉어를 마련해서 부모를 봉양한 효자였다. 효자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삼천재 혹은 삼휴정(三休亭)은 박순의 6대손인 박성지가 1942년에 부친 박기윤의 생전 행적을 기리고 후세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지은 강학공간이다. 삼천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전형적인 정제건물로써 기둥 하부를 석재로 하여 육중하면서 단아한 고풍을 견지하고 있다. 정면 3칸의 솟을대문 역시 석재 위에 지어, 본채와 잘 어울린다. 경내 좌우에 은행나무와 줄가시나무가 있으며, 경내 우측에는 ‘무안박공사적비’가 있다. 현재 목포대학교의 역사학, 한문학, 전통문화 등과 관련된 교과목을 강의하고 토론하는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천재는 목포대학교 소유지만 효자각은 무안박씨 가문의 소유다. 학교 건립 시에 효자각과 삼천재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는 부탁을 대학 측에서 수용하였고, 마을에선 대학교에 부지를 내어주었다는 미담이 전한다.
설화
대왕암 앞에 저수지를 만든 이유가 <그곳 명칭 이 원래 ‘배암동’이었으며 또한 위쪽 산이 뱀의 형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래쪽 논에 있었던 개구리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도로가 신설되면서 매립되어 버렸다. 도로 아래에 물과 함께 사는 개구리가 있었는데 매립되어 없어졌으니 저수지를 만들어서 뱀과 개구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라면서, 이장이 무안군청에 건의하여 예산을 받아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물론 5. 16 군사쿠데타 이후에 영세민을 도와준다는 측면에서 조성된 저수지의 축조와 관련된 설화로써 전하고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청림마을에는 무안박씨 재실(평강채씨 재실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박제 장군과 재혼한 부인이 평강채씨였고 그 부인의 자녀들이 와서 살았다 함)인 ‘경모재’가 있다. 뒤편 골짜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4칸 팔작지붕에 삼문이 있으며 제각 안에는 5개의 현판이 걸려있고, 2005년에 중건했다는 중건기념비가 왼쪽에 세워져 있다. 양촌마을에는 나주임씨의 제각인 ‘화산재’가 있다. 화산재는 4칸 팔작지붕에 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문이 잠겨 있어 접근이 어려웠고 관리가 허술한 것으로 보였다. 국립목포대학교 옆 대암동이라는 곳에 무안박씨 제각인 ‘영대암’이 있다. 전체가 시멘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재실은 5개의 현판과 11개의 주련이 달려있다. 보통의 경우에 사찰의 부속건물을 일컫는 암(庵)자를 제각에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재각 앞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청림마을은 6.25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서남부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박병관과 박공하의 영향을 받아서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었이다. 이 마을주민 약 21명을 비롯하여 구로리 관동마을의 20여명, 서호리 기동 마을의 13명, 복길 마을의 주민 등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좌익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일반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아야 할 정도로 혼란을 가져왔으며,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것이다. 특히, 마을 뒤 ‘천치골’에서는 이 마을주민들이 죽창의 피해를 많이 입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시 중심인물이었던 박병관은 광복 이후 서울시 남로당위원장을 역임한 후 월북해서 주요 국가의 북한 대사로 나가기도 했던 인물이며, 박공하는 일제강점기 때 청계면장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 무안읍 성암마을 앞 ‘모랭이’라는 곳에서 죽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승달산, 돌단문화유적, 목포대학교, 청계읍내 무안현감 석장승과 지석묘군 등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회관 건립이 시급하나 부지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승달산에는 골짜기마다 암자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승달산 자락에만 약 49개의 암자가 있어서 많은 수도승이 암자에서 공부하여 득도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사월 초파일이 되면 마을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사람바다였다고 한다. 목포, 해남 등 인근 지역에서 법천사를 가려는 사람들로 온종일 마을 앞이 붐볐고, 그때는 마을에 두 개의 주막밖에 없어 드물게도 사람들이 주막 앞에 긴 줄을 서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