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 2리는 연곡, 칠성동, 장터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목포대 앞의 광주-목포간(국도 1호선) 도로의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승달산에서 발원한 연곡천이 우측으로 흐르고, 아래로는 청수리 작은 개에서 발원한 용개천이 흐른다. 두 개의 천(川)이 만나 연동개를 이루어 복길간척지를 적시고 있다. 원래 연곡천은 S자형으로 흘렀으나 현재는 목포대에서 직선형 개천으로 흐르고 있다.
지명유래
연곡마을은 사전에 따르면, 입석마을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그만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어서 생긴 지명이다.(두산백과 참조)라고 한다. 그렇듯이 연곡(蓮谷)은 연이 심어진 골짜기란 의미와 함께 지형이 풍수적으로 연잎의 형상이어서 붙은 지명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연잎의 줄기와 꽃이 만나는 지점이 현재의 ‘영화밥상’자리로서, 풍수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자리라고 한다. 또한, 연이 불교와 관련이 깊듯이 연곡을 포함한 도림리 전체가 불교와 관련이 깊다. 실제로 도림리 이전에 사제리(寺祭里, 혹은 師弟洞, 士才洞) 곧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네’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칠성동은 현재의 청호주유소 주변을 말하는데 예전에 일곱 개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인데, 이곳을 개발하면서 주변의 사방공사에 사용하거나 목포대 등에서 연구용으로 가져가서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장터마을은 연동개 주변의 연곡마을 아래에 있는 곳으로 70여 년 전부터 장(場)이 섰던 장소여서 붙여진 지명이다. 원래 상마리 평림마을 앞에 있었던 장송장이 이곳으로 옮겨온 청계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이었다. 구로리와 복길리 등 청계만에서 잡힌 해산물과 승달산 자락을 비롯한 농경지에서 나온 농산물이 함께 거래되는 장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우시장 개설을 검토할 정도로 큰 규모였으나 1980년대 복길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장터 자리를 옮기자 오일장이 소멸하여 일상적인 장터거리가 되었다.
마을형성(입향조)
갯가 연변으로 비교적 근세 들어 도시 성격이 강하게 형성된 마을인 탓으로 마을의 입향조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마을유래지》에는 무안박씨가 먼저 들어오고 이후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는 도림 1리의 입향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민들은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렇듯이 원래 이 마을은 현재의 <청계면 노인회분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몇 가구만 사는 곳이었다. 그 아래로는 논밭이었으며 주변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그리하여 장터가 들어오고 면사무소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마을의 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들어 이룩한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형국 또는 풍수와 관련하여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라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12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의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또한,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고씨 산의 촛대봉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연곡에는 명당과도 관련이 있는 전설이 있다. 승달산에서 수행하던 노스님이 예불하면서 염주를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곳이 연곡이었다고 한다. 염주가 떨어진 곳은 천하의 명당으로 3정승 6판서가 대(代)를 이어 나올 수 있다는 곳이지만 염주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아직까지 그 혈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마을에는 또한 천석군의 터가 두 군데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현재 ‘한일빌라’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밥상’ 아래 밭을 지목한다. 한일빌라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청계면의 천석군 한양조씨 조자현 씨가 살았던 터이지만, 영화밥상 아래의 밭은 아직 천석군의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명칭은 원래 승달산의 법천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곧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네’인 사제리(寺祭里)로 불린 듯함과 동시에, 수도하기 좋은 도량으로서의 사제동(師弟洞) 또는 그리하여 선비나 도사가 많이 나온다는 사재동(士才洞)으로 불리다가 숲이 울창하여 길이라는 뜻에서 도림리(道林里)로 불렸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연곡마을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꽃이 피어있는 골짜기여서 원래부터 붙인 지명이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을 통해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일서면 연동(蓮洞)으로 나온다. 1910년 목포부로 편입되어 1914년에 청계면으로 편입되었지만,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연동이나 연곡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1987년 자료에 무안군 청계면 도림리 연곡으로 기록되었고, 갈수록 인구가 늘어서 현재는 도림 7리까지 커져서 분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청계면사무소, 청계면보건소를 비롯하여 각종 상업시설과 주거 건물 등이 세워진 중심지로 청계면에서 가장 활발한 마을이다. 대부분 직장생활과 상업활동이 주업을 이루며 농사를 짓는 가구는 별로 많지 않다.
주요시설
청계면사무소, 청계면보건소, 청계면노인회, 청계면복지회관, 농협 및 농협마트, 남부신협 각종 병원 및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다.
마을변화
원래 도림리는 물이 잘 들어와서 잘 빠지는 조리형으로 ‘만호(萬戶)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듯이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쉽게 들어와서 정착하고 또한 성공도 빨리할 수 있어서 실제로 현재도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함께 사는 곳이다.
여기에서 특히 승달산 등에서 발원한 연곡천과 용개천이 흘러서 바닷물과 만나는 갯벌이었던 남성2리 마을은 오일장인 청계장이 들어오면서 근세형 도농복합마을로 형성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복길 간척 이전에는 양쪽 개천을 타고 들어온 밀물이나 장마나 폭우시에 넘쳐서 침수되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너무 세서 3월에도 눈이 잘 녹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복길간척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어려움이 극복되고, 곧이어 1982년에 목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상권이 활성화 되어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주민들 대부분이 상업을 통해서 소득을 얻고 있으며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별로 없다. 복합성씨의 마을이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문화와 교육, 교통, 복지 그리고 경제의 요충지가 되는 청계면의 중심 마을로써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
예전 마을조사를 통해 연동개에 대한 주민들의 노래 두 곡을 채록했는데 다음과 같다.
‘산이 좋아 연동개냐/ 물이 좋아 연동개냐/ 산도 물도 좋다마는/ 다리 좋아 내가 사네// 산이 좋아 청계더냐/ 물이 좋아 청계더냐/ 산도 물도 좋다마는/ 연동다리 못 믿어서 못 가겠네’
아마 갯가 연변마을인 연동개의 범람하는 물과 이를 건너기 위한 다리에 얽힌 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민요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에 채록된 <옥룡자 유산록> 곧 풍수지리서로 널리 알려진 자료에 수록된 승달산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천(百川)이 회조(回朝)하고 만산(萬山)이 폭주(輻輳)하니/ 갑산정기(甲山精氣) 모은 곳에 설법가사(說法袈娑) 벌였으니/ 아름다운 저 형상(形象)이 십이상좌(十二上佐) 분명하다/ 발우(鉢盂)는 동쪽에 있고 운암(雲岩)은 남쪽에 있도다/ 저 노승(老僧)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百八念珠) 손에 쥐고/ 팔폭장삼(八幅長衫) 떨쳐입고 모든 제자 강(講) 받을제/ 그 중의 늙은 중이 스승께 문안(問安)할 제 염주(念珠)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沖天)하니 혈재방원개정처(穴在方圓蓋粘處)라/ 사륜석(四輪石)은 뒤에 있고 금어옥대(金魚玉帶)는 아래에 있고/ 팔백연화(八百煙花) 놓여있고 삼천분대(三千粉袋) 모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