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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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림 3리 청계면 백련동마을 작성
  • 백련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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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의 세대수는 98세대이며, 총인구는 178명(남88, 여 90)이다.
자연마을 구성
백련동은 도림3리에 속한 마을로 목포대학교 건설로 이주하게 된 백운정과 도림동의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마을이다. 후에 청림과 양지촌 일부의 주민과 평버들, 대흥리 주민들도 이사와 살게 되었다.
지명유래
백련동(白蓮洞)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 주변의 지형이 연(蓮)의 모양이고, 마을 옆으로 흐르고 있는 개천의 지명 역시 ‘연동개’인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이주해온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 이름을 정할 때 여러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있었던 지명을 참고해서 마을이름을 정하자는데 모두가 동의해 백련동이라고 하였다.
마을형성(입향조)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널찍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현재의 목포대학교 가운데로는 사철 마르지 않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개울 사이로 백운정,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지촌,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다. 1981년 대학교 건설이 시작되면서 백운정과 도림동은 대학교 부지로 들어가고 양지촌과 청림마을은 일부만 편입되었다. 또한, 승달산 자락의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도 함께 대학교 부지로 들어갔으며, 뒤에 목포대가 다시 확장을 거듭하면서 평버들, 대흥리도 새로 편입되어 들어갔었다. 원래 이 마을은 바닷가마을이었으나 1980년대 청계면 복길리와 삼향면 왕산리 사이에 복길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간척을 통해 온전한 육지가 되었다. 이후 농경지가 조성되어 농사를 짓다가 1979년부터 매립을 시작하여 부지를 만들었고, 1981년에 처음 주택이 들어서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981년 청계면 도림3리로 법정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목포대학교가 이전 건립되면서 도림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로 형성된 마을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고추, 깨, 배추 등 각종 밭작물을 지으며 서로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주요시설
도림교회는 목포에서 이전해 온 교회이며, 청계의용소방대, 청계면게이트볼장, 국립푸른숲어린이집과 둥지어린이집 등이 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지역에서 거의 처음으로 도시계획을 통해 형성된 마을이다. 도로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마을회관은 위치가 좋고 넓어 청계면 등에서 행사할 때면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변 마을에 마을회관이 없었을 때를 비롯하여 각종 주민교육을 할 때 이 회관을 사용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를 비롯하여 부녀회와 노인회가 운영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마을정자, 백련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오른쪽에 있는 산을 서당뫼라 하는데 지형이 연잎[蓮葉]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 산에는 무덤에 석물을 하지 못한다. 무거운 석물을 하면 연잎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서당뫼 주변에는 연골, 연동, 연동개, 연곡 등 연(蓮)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또한, 보살봉과 서당뫼 아래로 흐르고 있는 하천을 연동개라 하는데 지금은 농개천이라 부르는 큰 개웅이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라고 한다. 12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원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의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고씨 산의 촛대봉이다. 마을은 보살봉(소살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하고 좌측으로는 놋종골 집각골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서당뫼 또는 안산이라 부르는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복길 방조제로 형성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청주한씨의 문중산인 놋종골은 산 정상에 놋종이 묻혀 있다고 전해져오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유점동(鍮店洞)이라 불렀다. 남성3리와 이 마을 사이에 ‘도남교’가 이어주고 있으며, 총길이 50m, 교폭 25m, 설계 하중24t, 공사 기간은 2000.4.7.- 2001.7.17.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놋종골. 집각골, 서당뫼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청주한씨 제각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연동개는 6.25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이 개웅에는 수많은 좌익 인사들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웃 청림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전남 서남부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좌익인사의 영향을 받아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이다.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곳을 지날 때면 몸이 오싹해진다고 한다. 1980년대 일시에 주택을 짓다 보니 모자라는 건축자재에 부족한 경험으로 허술한 주택이 많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복길간척지의 수문 고장으로 주민들이 염해 피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이 부지런해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함으로 부를 이룩한 마을로써의 자립심과 자긍심이 강한 마을이다. 한때는 고향에서 쫓겨왔다는 의미로 ‘쪽개촌’ 또는 ‘쪽개민’으로 불리기도 하여 주민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었다. 하지만 백련동 주민들의 성실함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 됨과 아울러 주민들의 양보로 지역에 대학이 들어서게 되어 지역발전을 견인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이 크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개웅 옆의 연동은 일제강점기 때 골재채취장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골재는 망운비행장의 터닦이공사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골재의 운반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즉 여러 대의 멍텅구리배에 골재를 싣고 한 척의 기선이 끌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 골재는 서해안 물길을 따라 현재의 무안국제공항 곧 망운비행장 공사장까지 운반되었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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