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 4리 곧 월암마을은 신촌, 태양열, 안산, 월암 등 4개 마을을 포함해서 이루어진 상당히 넓은 지역공간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신촌’은 새로 마을이 이뤄진 지역으로 1980년대 중반에 형성되었으며, 도림4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태양열마을’은 태양열이 친환경 주택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때인 1983년경에 정부 지원받아서 주택단지로 형성된 마을인데, 이를 그대로 마을이름으로 쓰는 것이 흥미로운 지명이다. ‘안산’은 매봉의 산줄기로 마을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제일교회 뒤에 있는 산인데, 그 안산 앞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안산마을은 도림4리의 중심 마을이며 안산 기슭에는 새로운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또한, ‘월암마을’은 월암(月庵)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바위와 고인돌이 있었으나, 주민들은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해제면 유월리 월암이나 일로읍 월암리 월암마을의 경우에는 마을에 커다란 고인돌이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도림 4리인 월암은 도림 6리까지도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행정구역의 구분이 조금 애매한 형편이다.
지명유래
도림리(道林里)는 청계면 소재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뒤에는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이 있고 里의 중앙으로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도림(道林)이란 지명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란 의미를 갖으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길 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도림리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월암이란 지명은 1993년에 도림1리를 도림1리와 4리로 나누면서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구체적인 입향조는 드러난 게 없으나 선행조사에 따르면, 도림4리와 도림7리는 대부분 여산송씨(礪山宋氏)의 터였다고 한다. 매봉과 안산 그리고 보살봉의 상당 부분도 송씨 가문의 땅이었다. 이렇게 송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송박(宋珀, 호-애송당(愛松堂) 출생미상∼1592), 송욱(宋頊, 호 애균(愛筠)) 등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 내린 사패지(賜牌地)이기 때문이다. 매봉 기슭에 송씨들의 재실 겸 납골당이 있어서 이를 나타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도림 4리의 지형을 살펴보면 청계 제일교회에서부터 상마정 삼거리까지의 구역으로,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가는 도로의 오른쪽 지역이다. 승달산의 매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도로 건너편으로 보살봉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라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고씨 산의 촛대봉이다. 따라서 여기에 안겨있는 월암마을은 명당지리의 중심에 자리한 마을의 형국이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월암마을이란 명칭은 1993년 도림 1리를 도림 1리와 도림 4리로 나누면서 처음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도림리는 무안군 일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고, 1914년에 청림리, 양지촌, 삼덕리, 대흥리, 대암동, 격양동 일부를 합하여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선돌, 연곡 두 개의 마을뿐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나누고 이어 도림3리를 3. 5리로 분리했다. 이후 2000년에는 다시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해서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 국도 1호선 도로 아래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 있고 밭은 거의 없다. 벼농사 외에 다른 농사는 거의 짓지 않고 있으며, 대신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과 직장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도농복합형 마을이다.
주요시설
1971년에 세워진 청계중학교가 있다.
마을변화
원래 월암마을의 뿌리를 이루는 여산송씨 문중은 호국정신과 함께 열부행(烈婦行)의 표상이었다. 왜적에게 항거하다 죽음은 충(忠)이며, 적에게 잡힌 치욕을 씻을 길 없어 자신의 유방을 베고 순절한 죽음은 열(烈)이며, 적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짖다가 분사한 죽음은 절(節)이며, 의롭게 죽은 것은 의(義)이다. 이처럼 한 가문에서 忠, 節, 義, 烈이 나옴은 드문 경우이다. 이처럼 정유재란 때 희생한 송박, 송욱 형제의 사패지(賜牌地)였던 월암마을은 역사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충만한 곳이다.
이와 함께 1993년에 도림1리가 분리되면서 생긴 월암마을은, 일반적인 농촌이라기보다는 청계면 소재지가 팽창하면서 생긴 도농복합마을이라 하겠다. 현재 승달산 자락으로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서는 등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서로 협조하며 양보를 통해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던 마을회관 건립이 여산송씨 문중의 부지 기증으로 건립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를 비롯하여 부녀회, 노인회가 조직되어 있으나 동계 외엔 별다른 진행이 없는 형편이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청계제일교회(1952년 설립)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월암마을에는 속칭 ‘똥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동산’이 있는데 현재 마을회관 뒤쪽이다. 옛날 한양 가는 길목이었던 동산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며, 큰 무덤도 한 기가 있어 주민들의 쉼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또한, 마을 뒤로 무안의 주산인 승달산에서 흘러내린 매봉을 마을의 주산으로, 맞은 편의 보살봉을 바라보며 안겨있는 안산마을에는 특히 전원생활을 하기 위한 택지로 안성맞춤이다. 최근 많은 전원주택들이 입주하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동산에서 조금 내려오면 1922년 임술년에 세워진 ‘여산송씨 세장비’가 있다. 세장비 뒷면에 조금 특이한 문구가 있는데, 소산에 20정 4반, 응봉에 22정 3반, 상대암에 21정 2반 등의 송씨 문중 소유의 토지면적이 적혀 있다. 이처럼 세장비에 문중 소유의 토지를 명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문중의 위상을 과시하는 면도 있으나, 토지 분쟁을 없애기 위한 면도 있다. 예전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이기 때문에, 세장비가 매봉 기슭으로 옮겼다는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찾아가 보려 했으나 숲이 우거져 확인하지 못했다.
청계중학교 뒤편 정원에 송감사 묘에서 옮겨진 한 쌍의 석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에는 밭을 갈 때면 쟁기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기왓조각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농기계로 밭을 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없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자료나 기록은 없지만, 불당골로 불리는 곳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송감사의 묘라는 큰 봉분이 있었고, 그 묘 앞에 서 있었던 석인 두 기가 예비군 훈련 때 예비군들에 의해서 현재 청계중학교에 옮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청계중학교 교정을 찾아갔으나 석인을 확인할 수 없었고, 매봉 기슭에 있는 여산송씨 재실 및 납골당 역시 숲이 우거져 있어서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