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안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무안방면으로 6km 가량 떨어진 광주-목포간 국도 1호선 주변에 있다. 남안리는 동암, 남안동, 상천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암(東巖)마을은 행정지명으로 남안1리를 말한다. 원래 동암마을에는 조선시대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문명을 떨친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 선생의 후손들이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마을이다. 무안에서 목포로 이어진 광-목간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계북초등학교 초입에서 좌회전하여 약 1km 정도를 들어가면 만나는 승달산 골짜기에 안겨있는 마을이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마을의 인문적 전통에 더하여 승달산의 서기어린 자연환경과 풍광으로 빛나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이 마을의 원래 지명은 ‘처음에 ‘절우정’이라고 불렀으나 이름이 좋지않아 ‘동암(東巖)’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마을 동쪽에 바위가 많다해서 붙인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표지석에도 ‘마을의 주산인 마협봉이 새가 날아가는 형국이어서 절우정이라 했으나 이름이 좋지 않아 동암으로 바꿨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렇지만 절우정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789년의《호구총수》에는 ‘절우정’이나 ‘동암’ 특히 ‘남안’이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아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 마을의 동쪽에 해당하는 마협봉에 큰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로 동쪽바닷가에 큰바위가 있는 운남면에도 동명의 동암(東巖)마을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수원백씨 백운헌(雲汝 白運憲) 공이다. 공은 해남 옥천에 살면서 1644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변(水便)의 벼슬에 오른 인물로 그무렵에 전국을 휩쓸었던 가뭄을 피하여 이 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이미 그의 조부 백흥남 공이 1603년에 무안현감으로 재임했던 인연이 작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며, 증조부인 백광훈은 16세기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는 문인으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은 백광흥의 동생이다.
<입향조와 성씨자료>에 의하면 ‘백운헌은 특히 용(勇)을 좋아하여 날마다 궁검(弓劍)으로 일을 삼으니 사람들은 능히 세상을 구할 재목이라 칭송을 했는데, 시대와 마음이 서로 엉키어 뜻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임천(林泉)에서 늙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라며 아쉬워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이야기는 ‘백장사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이후 또한《마을유래지》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로 ‘1776년(정조 원년)에 최씨가 최초로 입향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미 1600년대 후반에 수원백씨에 의해서 마을의 입향이 이루어져 있어서 오기(誤記) 내지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마을조사 당시에, 대개 수원백씨 집안을 비롯하여 외가나 인척들이 대부분으로 다른 성씨들은 몇 가구에 지나지 않았던 점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형국과 관련해서는 새가 날아가는 형국이라는 설이 있으나, 마을의 입구인 청계북초등학교 주변의 호치(虎齒) 곧 호랑이 이빨을 뜻하는 지명에 더하여, 호봉산(虎峰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음은 물론 호랑이 꼬리를 나타내는 호미(虎尾)가 있는 것으로 봐서, 호랑이와 관련된 마을 형국을 지녔음과 아울러 실제로 승달산에서 자주 발생한 호환(虎患)에 대비하여 풍수지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길에 서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이처럼 마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비보장승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동암마을에는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승달산의 제3봉인 마협봉(해발 285m)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문지리적 형국이 숨겨져 있다. 즉, 우리지역의 최대사찰이자 총지종의 본산이었으나 지난 19세기에 사라진 총지사(摠持寺) 터가 마협봉을 건너 반대편 몽탄에 자리해있다. 주민들이 전하는 말로는 ‘마을 뒷산인 호봉산에서 총지사까지는 버선발로도 갈 수 있을만큼 절이 많았다.’라고 하며, 지금도 마을 뒤의 밭에서는 종종 오래된 기와조각들이 나와서 예전에 이곳에 많은 집이나 절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마을성씨
주로 수원백씨 집성촌이었으나 최근들어 다른 성씨의 이주자들이 늘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동암(東巖)이라는 마을 명칭은 1789년의《호구총수》에 이서면 흑동(黑洞). 인장리(仁場里). 양동(陽洞) 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1912년의 자료에 이서면 남안동(南安), 동암리(東巖), 상천동(上泉)으로 기록되어 나타난다. 이후 1917년에 청계면 남안리 남안동, 동암리, 하작동(下鵲), 상천동 등으로 나오며, 1987년 자료에 현재와 같이 청계면 남안리 남안동, 상천동과 함께 동암이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동암마을의 행정구역은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남안동, 하작동(까치네), 상천동 등과 함께 동암마을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무안군 청계면 남안2리에 속하는 마을로 남안동(남안2리), 상천동(남안3리)과 함께 남안리를 구성하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승달산 줄기에 안겨있는 동암마을은 마을이름이 그렇듯이 자연풍광은 수려했지만,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층이 암반이어서 물이 귀했다. 그래서 작은 가뭄이라도 들면 아낙네들은 물을 뜨기 위하여 매일 같이 샘 주위에 늘어서기 일쑤였다. 겨우 쪽박으로 한바가지씩 뜰 수 있는 작은 샘이어서 오래동안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형편에 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서 마을 뒤편에 저수지를 두개나 막았으나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하수를 개발하고 특히 상천동 앞으로 흐르는 태봉천의 물을 양수기로 퍼올려 농업용수로 쓰면서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 생업환경이 어렵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동암마을에는 수원백씨 등 유학적 전통이 강했기에 학업에 대한 열정은 물론 충효예의를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이처럼 수려면서도 깨끗한 자연생태적 환경에 인문적 가치가 더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살기좋은 마을로써, 최근 1995년도에 무안군에서 최초로 장수마을로 지정되었다. 당시 105세까지 장수한 할머니는 물론 105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며느리가 효부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때 기준으로 90세를 넘긴 노인들이 예닐곱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청계상회, 원광사, 만덕사, 청계북초등학교 외
마을변화
마을에 무안클린베리CC 골프장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민원이 발생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농산물작업장, 웰빙게이트볼장, 꽃동산, 산책로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마늘 등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버드나무숲과 소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수반’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1960년 무렵까지 온전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농로가 나서 사라지고 군데군데 흔적만이 남아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수반에 숲이 없어지면 마을에 우환이 찾아올것이란 말이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대부분 농지로 개발 되었다.
또한, 마을 앞 광장에서 마협봉을 쳐다보면 큰석골이라 부르는 골짜기에 새하얀 금빛나는 자갈들이 많이 있었다. 마을 어른들의 말씀에 지나가던 도승이 ‘마협봉 큰석골에 있는 자갈들이 숲에 가려지면 그때서야 마을이 기를 펼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서 믿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자연생태환경에 감싸인 마을을 온전히 보호하고자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터부시된 금기어와 풍수 등을 통해 이를 현실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식물
당산나무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주로 총지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데, ‘중골’이라고 부르던 마을 뒤의 골짜기는 ‘중애미밭, 상좌밭’이라는 옛 명칭과 함께 ‘담장재’라고도 불렀다. 이는 총지사의 스님들이 마을로 자주 넘어와 시주를 요구하는 등 민폐를 끼치므로, 이 마을 출신의 힘센 장사가 다시는 넘어오지 못하게 마을 뒷산의 총지사로 넘어가는 고개에 담장을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흥미로운 이름이다. 물론 마을에서 마협봉을 거쳐 총지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총지재’라고 붙인 지명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지금은 지내지 않지만 예전에는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서 매년 한차례씩 모든 주민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냈다. 이는 마을의 시정 앞 당산나무 옆에 있는 당산하네와 마을회관 뒤의 당산할멈이라 칭하는 입석을 모시고 지냈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있는 호치를 지나서 만나는 봉불사를 조금 지나오는 곳에 ‘송은백공흥선행적비’, ‘효자수원백공영방기행비’, ‘백성채행적비’가 나란히 서서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에 ‘효열부이천서씨추모비’에 각을 올린 효열각이 있다. 이는 지난 1992년에 수원백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며, 그곳에서 조금 더 지나면 호미라는 터 위에 1950년에 세운 수원백씨 제각인 영모재가 있다. 여기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를 비롯한 문중의 선조들을 모시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설화
총지사의 스님들이 마을로 내려와 시주를 자주 요구해서 마을 뒷산인 중골에 담장을 쌓아서 담장재라고 부르게 한 장사가 백장사라는 설화가 전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백정희(소설가)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 출신인 정훈은 북경 아시아경기대회 유도에서 금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 앞으로 골프장 가는 길이 있는데, 골프장을 개설할 때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뒤로 승달산을 두고 앞으로 흐르는 태봉천과 멀리 창포만을 바라보는 동암마을은 그 자체로 수려한 풍광과 깨끗한 공기 등 살기좋은 환경이 갖추어진 마을이다.
이에 더하여 인문적인 역사와 전통이 심상지리로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지금까지도 훈훈한 인정들이 넘쳐나고 있다. 여타 마을과 달리 동암마을의 마을회관에는 <정훈마을회관>이라는 인명이 함께 하고 있다. 이는 이 마을 출신의 정훈 선수가 올림픽에서 유도부문 동메달 수상을 기념하여 1993년에 관의 협조를 얻어 세운 회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