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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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안3리 청계면 상천동마을 작성
  • 상천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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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세대수 34세대, 인구수 61명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남안3리를 이루는 상천동은 까치내, 상천동(물윗동네), 윗호치, 망뫼 등 네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마을은 깃대봉, 수리봉, 동뫼, 저봉, 조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비옥한 농지가 펼쳐져 있는 농경마을이다.
지명유래
상천동(上泉洞)은 말 그대로 좋은 샘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의 뒷산을 이루고 있는 저봉(猪峰)이 돼지형국으로 돼지의 젖꼭지에 해당하는 자리의 샘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풍부한 수량에 물맛이 좋아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에 별다른 저수지가 없어도 농사를 편안히 지을 수 있었으며, 윗샘(웃샘)으로 불렸던 이 샘은 사계절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서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사랑받았다. 특히 맞은편 승달산 아래 암반지대에 위치한 태봉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낼 때, 상천동마을에 와서 물을 기원하는 샘제사를 지내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또한, 일설에는 상천동(上泉洞)이 원래 까치 형국이라 하여 ‘자작동’으로 불리던 것을, 1900년경에 어떤 지관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는 상천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여 해방 후부터 바꿔 부르게 된 지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뒤에 상천동에서 분가하여 새로 생긴 망뫼마을은, 원래는 ‘망뫼’가 아니라 날아다니는 매를 바라본다는 ‘망매’, 또는 마을의 ‘저봉(猪峰) 곧 죽은 돼지를 바라보는 매’라는 뜻의 ‘망매’였다고 한다. 남안리의 원래 이름 역시 남안(南雁) 곧 기러기 ‘안(雁)자’였듯이 태봉천과 인근의 창포만으로 찾아드는 새들이 많았다. 또한, 호치(虎齒)마을은 지형이 호랑이 이빨처럼 보인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호치라는 이름만큼이나 억센 마을로써, 외지인이 이 마을을 지날 때면 발소리를 줄여야 할 만큼 조심해야 했다고 한다. 예전에 승달산 언저리를 타고 도는 동쪽의 길이 산자락을 따라 멀리 돌아야 하는 길이어서, 서해 연안의 상천동과 호치마을 등을 통해 무안읍내로 가는 직행로였던 마을길로 인해서 생긴 지명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든다.
마을형성(입향조)
상천동의 입향조는 화설당마을에서 분가해온 유종간(柳宗侃, 1637-1702 ,자-종인) 선생으로, 화설당 류운(花雪堂 柳運, 1580-1683) 공의 아들이다. 그 후손들이 문화류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풍수에 따른 마을의 형국은 쌀을 건진다는 조리형국에 누운 소로 보이는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와우형이어서, 어느 정도 복이 쌓이면 넘치는 형국이기는 하지만 조리의 쌀을 솥에 넣고 끓여서 밥을 짓듯이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형이다. 물론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태봉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역수(逆水)이지만, 이는 왕조시대에나 어울리는 풍수적인 해석일뿐 호봉산과 중봉을 마주하고 있는 상작천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좋아서 여전히 농사짓기에 좋은 마을이다. 또한, 이러한 마을의 지형에 따른 형국을 풍수적으로 풀어내어 생기(生氣)를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하자는 노력으로 상천동에 있는 문화류씨의 집들을 대부분 북향으로 지어졌다. 즉, ‘저봉(猪峰)’이라 부르는 마을의 뒷산(주민들은 ‘깃봉’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죽은 돼지형국이기 때문에 이를 풍수로 풀어보면, ‘까치내’의 까치가 죽은 돼지를 먹으려고 날개를 펴고 있으나 ‘수리봉’의 매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지형은 서로 간에 긴장관계가 유지되며 안정적인 균형과 발전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마을 어딘가에는 좋은 터가 있어 보이는 지형이라고 한다.
마을성씨
원래 문화류씨 집성촌이었으나 나주정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가 입촌을 하면서, 지금은 복합성씨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현재의 남안리로 추정되는 마을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1789년의《호구총수》에는 이서면 흑동(黑洞). 인장리(仁場里). 양동(陽洞) 등이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이서면 남안동(南安), 동암리(東巖), 상천동(上泉)으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남안리 남안동, 동암리, 하작동(下鵲), 상천동 등으로 나오며, 1987년 자료에 현재와 같이 청계면 남안리 남안동, 동암리, 상천동 등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7년의《조선면리동일람》에서야 상천동으로 표기되어 나타난다. 행정구역상의 변경은 원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이었으나, 1901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동암, 하작동(까지내), 상천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비롯하여 많은 기간 도로들이 생겨서 다른 곳을 경유하지만, 예전에는 구도로를 비롯하여 ‘국도 1호선’ 등이 상천동 마을 앞을 지나가면서 마을에 주막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마을의 동뫼 뒤의 절고랑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죽림정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는 약 50여 년 전에 목포에서 사업을 했던 박찬규씨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원래 대밭이 잇어서 죽림정사라고 이름붙인 이곳 절고랑은 ‘작은골’이라고도 부르며 예전에 작은 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한다. 무안읍 성남리 대곡을 ‘큰골’이라고 부르며 그곳에 큰 시장이 열렸다는 점을 추정해보면, 구로리 이하 무안반도 서남부지역의 사람들이 무안으로 올라갈 때 지나가는 길목에 열렸던 ‘작은골’의 장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무안반도의 허리 역할을 하는 지형에서 풍부한 물로 농사를 짓는 등 시골 마을로서는 드물게 개화된 마을인 상천동에는, 교통과 물류가 발달하여 학교와 사찰 및 교회 등 여러 문화기반시설이 일찍이 자리했던 마을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며 풍요롭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주요시설
청계북초등학교(1945년 해방되던 해에 개교), 상천교회, 죽림정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마늘, 벼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돼지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상천동 길가에 큰 구슬나무와 선돌이 있었으나 1997년경 농지정리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큰깃재, 작은깃재, 동뫼, 자라목, 양목고개, 드롱샘, 선돌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양목고개 아래의 드론샘 주변에서 수많은 자기파편, 기와조각 그리고 일명 ‘똥장군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에는 마을 주변에 두 곳의 유물산포지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은 옹관편,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많은 자기류와 기와류 등이 나왔다고 한다. 충분히 중세 이전의 도요지 및 민속유적지 등이 추정되나 후속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안타까운 실정이다. 또한, 호치마을 뒤 청계북초등학교 뒷산에는 고인돌이 4개 있다.《무안의 문화유적분포도》에는 원래 11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나 각종 공사로 파괴되거나 묻힌 것으로 여겨진다. 4개의 고인돌 중에서 제일 큰 것은 2m 60cm×2m 10cm의 크기에 이른다. 청계북초등학교에 학교를 세운 공적비가 있으며, 죽림정사 옆에도 2001년에 사찰을 세운 박찬규 선생의 공덕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서영만(육군 장군)
거처/생가/묘소
문화류씨 선영(화설당 류운 외),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죽림정사의 3층석탑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해방 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때는 죄수들이 목포에서 가까운 탈출로인 상천동의 여러 산줄기를 타고 도망하면서, 이 마을로 숨어들어 와서 많이 잡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예전 마을조사를 통해 무안의 대표적인 정자의 하나인 화설당(花雪堂)의 유래 중 ‘눈 속에 핀 동백꽃을 뜻하는 화설(花雪)’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찾아냈었다. 즉, 흑산도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류운 공과의 친분으로 들른 화설당에서 만난, 류운 공의 아리따운 딸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눈 가운데 피어 있는 한 떨기 꽃과 같구나’라며 극찬을 하며 연분을 맺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화설’이란 구절이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공론화 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적인 관찰과 조사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해석을 얻는 일이라, 문화류씨 집성촌인 마을의 역사와 종중의 일에 밝은 류재남(남, 89세, 상천동 거주) 어르신을 찾아뵙고 이를 확인한 바 충분히 타당하다고 보증해주었다. 이에 더하여 상천동 마을에 있는 문화류씨 선영을 찾아가서 류운 공의 묘비에 새겨진 사위 송시열의 성명까지 확인하였다. 이는 또한 청천리에 거주하는 배영찬 선생이 알려준 화설당 관련한 시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해석된다. ‘進飯對美人 佳驚雪中白 詩中亦太白 亂步亦花雪’ 첫구의 미인(美人)이 마지막구의 화설(花雪)과 충분히 대구(對句)되는 것으로 읽힌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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