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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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선2리 청계면 중화동마을 작성
  • 중화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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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세대수 64세대, 인구수 103명(남 51, 여 52)가 거주한다.
자연마을 구성
월선2구 중화동은 월선1구의 월선저수지를 경계로 그 아래의 구릉지와 오른편의 작은 산을 끼고 돌면서 지제 저수지를 포함한 중화, 신촌, 지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예전에는 월선제 아래로 재골, 해골 그리고 지제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솥골, 위로 올라가서 작시골 등으로 불린 곳이다.
지명유래
중화라는 지명은 한자로 중화(重華)이지만 예전의 기록인《호구총수》에는 중화(中化)로 나온다, 또한 다른 자료에는 중화(仲化)로도 나온다. 그러나 주민들은 중화(重華)가 맞다고 한다. ‘重華’는 ‘거듭 빛난다’라는 의미와 함께 중국의 옛 성군이었던 순임금의 이름을 따서 사용했다고 한다. 즉, 성군으로 추앙 받고 있는 순임금의 이름이 重華이고 순임금이 태어났던 마을 이름이 중화촌(重華村)이다. 그리하여 이 마을의 지형이 중국 중화촌의 지형과 흡사하여 重華로 사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중의학(中醫學)과 각종 고문학을 공부하고 온 마을의 정문일 선생은 중국 순임금이 태어난 마을이 바로 월선리 중화동이라고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신촌마을은《한국지명총람》에서는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어서 신촌(新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산 곳이라는 설과 마을 형성 당시 신(申, 辛)씨들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신촌이라고 했던 설 등이 전해온다. 그리고 지제마을은 월선리의 두 번째 저수지인 지제를 중심으로 있던 마을인 솥골과 작시골 등을 합하여 부르던 지명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세상(金世相, 1561~1592, 향교 자료에는 金世上으로 나옴)로,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자는 성보(聖寶)이고, 호는 퇴휴재(退休齋)이며, 벼슬은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이이(李珥)의 양병설(養兵說)을 지지하다가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곳 무안 청계면 월선리로 낙향하여 장정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 장군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전투에서 김천일 장군이 죽자, 이순신 군대의 우익장(右翼將)으로서 전투에 공을 세우다가 당포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공의 나이 33세였는데 후에 나라에서 정려를 세우고 형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그러나《마을유래지》에는 그분의 손자인 김시운 선생이 입향조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의 조부인 김세상 공이 입향조이다. 또한, 이 분이 들어오기 전에 경주이씨가 먼저 살았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이외에 밀양박씨 입향조도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의 박자신(朴自信) 공으로 예문관응교와 국자직학 등을 역임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두응촌에서 세거했으나, 당시 정국의 혼란과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여기며 이곳에서 은거하여 덕을 기르며 문호를 세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월선리는 풍수지리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지목한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곳에서 형성된 운중수월(雲中囚月)의 혈처와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선인독서(仙人讀書)의 지맥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그리하여 월선리(月仙里)란 마을 이름도 운중수월(雲中囚月)의 ‘月’과 선인독서(仙人讀書)의 ‘仙’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그렇듯이 승달산이 끝나는 지점의 산자락에 안긴 월선2구 중화마을은 예전에 월선리의 중심마을이었듯이 삼십여 년 전부터 새로이 입주하기 시작한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월선리예술인마을’을 주도하고 있다. 운중수월(雲中囚月)로 시작하여 월선1구 월선동이 선인독서(仙人讀書)를 받아내고 있다면, 월선2구 중화동은 선인무수(仙人舞袖)를 수용하여 예술이라는 옷소매를 들어 올리며 춤을 추고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일서면 신촌중화리(新村中化里), 낙천동(樂天洞), 월명촌(月明村) 등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일서면 중화리(仲化里), 신촌리(申村里), 일신동(日申洞), 낙천동(洛川洞) 등으로 나오며, 1917년에는 청계면 월선리 낙천동, 중화리, 일신동(日新洞), 지정리(芝亭里), 신촌(新村) 등이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청계면 월선2리 중화(重華), 신촌(新村)가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에 기록된 바로는 무안군 일서면 신촌중화리(新村中化里)였고, 1910년에 잠시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다시 무안군 청계면으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1917년 자료에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중화리, 1987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청계면 월선2리 중화동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농촌마을인 중화동 주민들은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월선리예술인마을>을 일구어가고 있다. 1990년 경부터 인근 목포와 광주 등에 사는 문화예술인들이 입촌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도예가, 화가, 시인, 작가 등 많은 이들이 직접 집을 짓거나 예술스튜디오를 개설하여 거주하면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물론, 이전부터 농사를 짓던 선주민들은 벼농사, 양파, 마늘 및 월선초라고 불리는 시금치 등의 농사를 짓고 있다. 이처럼 농촌과 예술이 자발적으로 어우러진 월선리예술인마을은 무안을 비롯한 전남 서남권의 대표적인 문화마을로 잘 알려져있다.
주요시설
전남교육청wee센터, 사)월선리예술인촌, 사)한국다도문화원, 조계종 유리광사, 물아혜요
마을변화
중화동마을 역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2006년에 월선동을 포함한 월선권역이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지로 선정되면서 농촌문화마을, 모범생태마을, 살기좋은마을 등의 각종 농촌개발사업을 잇달아 추진하였다. 여기에 입주하는 예술인들과 또한 이를 애호하는 문화지향적인 도시민들의 귀촌이 늘어나면서 <월선리예술인마을>을 표방하는 각종 마을사업들이 진행되었다. 정보화마을사업과 자연생태체험마을 및 휴양마을 등 여러 사업들을 통하여 다른 시골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각종 문화기반시설이나 프로그램들이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래의 농경마을에 더하여 예술인은 물론 은퇴하여 귀촌하거나 또한 인근 도회지로 출퇴근하는 도시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복합마을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더욱 고민해야할 시점에 있다고 하겠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 조직으로 마을의 재정 관계와 재정 경과보고, 이장선출을 하는 동계(매년 12월20일), 개발(발전)위원회,부녀회, 청년회, 예술인(6명) 모임등이다.
공동이용시설
다목적회관,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이루어진 월선저수지와 지제저수지로 잇대어 흐르는 하천 등은 수달 등이 사는 일급수로 사계절 내내 수량이 풍부하여 농업용수로 사용됨은 물론 자연친화적인 생태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지층에는 깔려있는 청석(靑石)으로 인해 이곳에서 나오는 지하수는 약수로 알려졌으며, 특히 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 뒷산에는 샘과 관련된 산정뫼(山井)가 있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목포사람들이 먹기 위해 만들어서 사용했던 우물이 여섯 개 있다. 이 우물은 법천사 아래에 있는 달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저장해 두었다가 내보내는 중간기지 역할을 하는 곳으로, 법천사에서 목포의 가정까지 전달되는 물로 기계나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자연적인 수압을 이용하여 보내졌다.
동/식물
무안군 지정 보호수인 마을회관 느티나무와 몇 년 전에 농사에 방해된다며 한 주민이 베어버려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전조제 제단 앞 당산나무가 있다. 그리고 승달산 골짜기로 형성된 산골마을이어서 고라니와 멧돼지, 삵 등 산짐승들이 많이 내려와서 농사에 곤경을 겪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뒤에 은당골, 공적골 그리고 신촌마을 뒤에 범산골, 백정골, 지재골이 있다. 그 외에 숙녀골, 개밥골, 비석거리 등이 있으며, 노화촌에서 청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당산과 신촌마을 앞에 있는 버든들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제사인 전조제(田祖祭)를 매년 유월 유두날에 지낸다. 이는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인데, 특히 멸구 등 병충해 방제에 초점을 두는 행사로 여느 마을에서 행하는 당산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제사는 전답을 관장하며 보살펴주는 지신(地神)에게 주민들의 소망을 담아 들판(野)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원래 이 제사는 월선리의 지형과 관련된 다리에서 비롯되었다. 예전에 마을 앞으로 커다란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개울을 건너는 ‘독다리’ 두 개가 월선1구와 월선3구에 있었다. 그리하여 두 곳에서 ‘독다리게’라고 하여 비석이 세워지고 제사가 이루어졌으나, 위에 있는 독다리는 월선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비석만 저수지 둑방으로 옮겨지고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었으나, 월선3구의 비석거리(석대정) 앞에 남아있는 비석과 전조단에서는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조제는 월선2구와 3구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매년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날에 지내는데, 밤 12시에 엄격한 절차에 의해 선임된 제관의 주관하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저녁 무렵 적당산 시간에 지내고 있다. 그런데 전조제의 제사상에는 두 그릇의 국과 밥이 올려진다. 한 그릇은 전조제의 주신인 지신(地神)에게 올리고, 또 한 그릇은 자손이 없이 죽은 이처사를 위한 것으로, 오래 전에 이 마을에 살던 이 처사라는 이가 후손이 없어서 자신의 전답을 마을에 기부하여 제삿상에 밥 한 그릇을 부탁하였던 마을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민들 사이에선 이 처사의 묘에서 득남(得男)하기를 기원하면 원하는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외지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져서 많은 이 이 묘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 제사의 특성은 여자들은 일체 참여를 하지 않았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5-6년전부터는 여자들도 함께 참여한다. 그리고 또한 다른 제사와 달리 미역국을 끓여서 제사상에 올린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 비석거리에는 비석 1기와 하천을 건널 때 놓았던 커다란 돌(2ⅿ10cm☓3ⅿ10cm☓55㎝)과 제상으로 쓰이는 돌 등 4개의 돌이 있다. 비석에는 1769년 가설되었으며, 다리가설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또한 월선저수지 둑방에 있는 비석에도 1775년에 세웠다는 가설시기와 도움을 준 사람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유물, 유적
명당으로 알려진 마을에는 수많은 묘역과 함께 여러 문중의 재각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재각으로는, 김해김씨의 재각인 송은당(松隱堂)은 김종현(金鍾炫) 선생의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942년에 세워졌다. 그 주위에는 마을에 있는 11개의 삼강문 중에 하나인 열부현풍곽씨비(烈婦玄風郭氏碑, 1890년)는 임진왜란때 순절한 김세상(金世上)과 그의 부인인 현풍곽씨 그리고 난저공 김영학의 충, 열, 효를 기리는 삼강문이 있다. 그리고 마을길을 조금 걸어들어오면 문화류씨와 밀양박씨의 재실이 있고, 지제마을에는 남평문씨의 재각인 지정제가 있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입석(立石)과 함께 운파김용현효절실적비, 삼사김재걸경모비, 소석김순상행적비, 청송김쌍호공적비, 월당김덕진공적비 등이 있다. 또한 주민에 의해서 지어진 ‘월선가’도 전해지고 있다.
설화
삼사재 김재걸 문집『삼사재만록』, 소석 김순상 문집『소석우록』, <전조제소고> 등
기록물, 문헌
박일정, 김문호, 윤숙정(이상 도예가), 민경(천연염색), 김석전(화가), 조상옥(옥공예), 정문일(대체의학), 이장석(건축), 김대호(차인) 등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화설당 류운 처사묘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수변공원, 마을 둘레길, 월선저수지 조망데크. 마을벽화 등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문화예술인들과 귀촌인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생태적인 환경의 구성욕구와 자꾸 늘어나는 독거노인 등에 대한 문제가 있으나 주민들의 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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