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국사봉을 뒤로하고 남창천을 앞에 두고 있다. 마을이 국사봉 자락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예전에는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울창한 수림이었다고 한다. 해서 일부 주민들은 난리나 변란을 피할 수 있겠다 하여 감돈이라 이름 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감돈이란 마을이름대로 감나무와 돼지가 많아 이름값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남양홍씨 입향조에 의해서 정해졌다. 즉 甘心遯世(현실의 혼탁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상을 피해 은둔하여 생을 영위한다)의 뜻을 취해 마을이름을 감돈이라 한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남양홍씨 洪致善(자-지현, 호-사천. 1584 - 1645)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에 이미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으며 9세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또한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고 그 뜻을 어기지 안했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다. 임란을 당하여는 어린나이에 가첩(家牒) 등을 보듬고 남하하여 이곳 국사봉 아래에서 몸을 감추고 세사를 멀리하였다. 이후 학문에 전념하여 중년에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중 많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올랐다.
이 마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이천서씨 입향조는 서진구(1690-1743)이다. 공은 몽탄면 대치리 한재 마을에서 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남양홍씨, 이천서씨, 무안박씨, 광산김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로촌면 감돈리로 나오고 1914년의 자료엔 이로면 감돈리로 1917년의 자료엔 일로면 감돈리 감돈 마을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동물 축사가 많다. 해서 마을에 들어서면 축사에서 나오는 악취 때문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무안에서 가장 큰 돼지농장을 이루고 있는 성아농장도이 마을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에 돼지 농장이 들어선 것은 60년대 중반부터였다. 이후 많은 축사들이 들어섰으나 현재는 돈사가 3군데 우사가 4군데 있다.겨울인데도 마을에는 동물의 분뇨 냄새가 베어 있고 파리가 방안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다. 주민들에게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자 돼지와 소 때문에 지금은 잘 살게 되었다고 오히려 고마워한다. 실지로 1960년대만 해도 이 마을은 일로읍에서 두번째로 못 살 정도로 마을이 빈촌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한두 집이 키우기 시작한 돼지와 소들은 마을에 부를 가져다 주었으며 현재는 일로읍에서도 부촌 마을에해당된다.이 마을의 주변 환경도 소와 돼지를 기르는데 한몫을 했다. 수질이 좋고 아늑한분위기 때문이다. 아랫마을인 선돌 마을에서는 3년 연속 쌍둥이를 출산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감나무 단지가 많은 이유는 주민 중 한 사람이 노후대책으로 감나무만한 작목이 없다고 추천해 주민들이 너도나도 심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소득은 오히려 떨어지고 일거리는 많아져 주민들에게 불편만 주고 있다는 푸념이다.
빈촌이어서 나무를 해서 목포로 팔러다니고 가마니를 짜서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조밥, 보리밥을 주식으로 먹었다. 성화농장을 만든 박천재씨가 돼지를 키우면서부터 두집, 세집이 키우기 시작하고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 하천의 맑았던 물이 오염되고 지하수와 땅이 오염되어 남창천까지 오염되는 악순환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감나무 재배는 농업기술센터의 추천으로 홍은표씨가 감 재배를 시작하여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로읍에서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당시 목포시민의 수원지였던 달산저수지 때문이었다. 저수지의 모타를 돌리기 위해서는 전기가설이 필수적이었는데 전봇대가 지나는 길에 마을에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탄면 내리 양마 마을에는 감디 할머니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감디(감돈리에살았다 해서 불린 이름)할머니는 22살에 혼자되었는데 주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수절해 가문을 지켰으며 후손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사회의 재목을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 양마 마을에서는 감디할머니에 대한 기념사업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주산인 국사봉(國師峰)은 이름만큼이나 많은 골짜기와 사연을 안고 있다. 산 정상에는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봉홧불을 올린 흔적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일제말기 굴을 파면서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지역 역사 자료에는 국사봉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해서 봉수대가 정말 있었냐고 확인을 해도 확실히 봉수대였다고 한다. 또한 가물 때에는 이곳 무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으며 현재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79년의 역사를 갖고있는 감돈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처음엔 감돈저수지 아래에서 시작했다가 마을 중앙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에서 자리잡았다. 감돈교회는 예전에 100여명의 신도가 다녔으나 현재는 46명 정도 된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국사봉을 뒤로 하고 남창천을 앞에 두고 있다. 감돈마을은 국사봉의 한 줄기인 뒷주산(달구봉이라고도 함)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남창천이 흐르고 있다. 또한 1932년에 축조된 감돈 저수지가 있어 농업용수를 해결해 주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는 큰 길이 지나고 있는데 이 길은 마을 뒤 큰골에서 내려온 하천을 복개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안산은 봉천지기라는 산으로 천 마리의 鳳이 깃든다는 산이다. 국유지인데 지금은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의 내로라하는 풍수들이 다녀가는 명당지이기도 하다.
동/식물
마을 가운데 당산나무 한그루가 있다. 원래는 두 그루였는데 한그루는 고사되었다. 길가 주택 옆에 있으며 시멘트에 묻혀 있다. 둘레가 4미터 90이 넘었으며 나무안쪽은 텅 비었다. 주민들의 말로는 예전에 이 당산나무 주변에 넓은 터가 있어 마을에서 이 당목을 중심으로 크게 당산제를 지냈으나 광복 이후에는 시들해져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뒷산에는 계곡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라골 고동골 방덕골 우녕골(운영골) 검적골 각골 목암재골 부채성골 정성골 작은골 등이 그것이다. 이 골짜기 중 방덕골과 사라골에는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이 군사용으로 팠음직한 바위굴과 흙 굴 등이 남아 있다. 또 검적골에는 감씨바위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이 외에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말[馬] 발자욱이 선명히 남아있는 독짐재라는 곳이 있는데 이 재는 옛날에 한 장군이 허울로 진을 치고 있었던 재였다고 한다.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이 재를 넘어 삼향면 유교리를 거쳐 목포에 가서 물물교환을 했던 길이었다고 한다. 또한 유교리 일부와 지산리의 어린 학생들이 일로중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넘었던 재이기도 하다. 특히 독짐재 주변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이굴이 있었다.
이외에도 된재 서재 허릿골재 등이 있다. 그리고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는 굴과 붉은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는 뒷생이, 감돈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논에 대기위하여 막아놓은 양달보 함보 큰골의 장사바위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감돈저수지 아래쪽에 위치한 양달보는 없어졌고 함보는 흔적만 남아있다.
큰골 저수지 위쪽에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가 장사바위라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마을에는 솔대골이라 부르는 곳에 수많은 소나무와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바로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고인돌 산포지역과 같은 지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해서 아랫마을인 선돌 마을과 함께 고인돌 군락지를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다. 해방 이후 석공들이 마을에들어와 절구통을 만들거나 돼지 구시통을 만들기 위해 가져가 버리고 새마을 사업때는 뒷산의 사방공사를 한다면서 돌을 들어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논밭을 경작하면서 논밭에 있는 돌을 묻어버리거나 깨버렸기 때문에 많았던 고인돌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마을에 솔대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남양홍씨 후손 가운데 과거급제자가 나왔기 때문이다.주민들은 마을 주변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고인돌이 없어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나타내고 있다. 특히 주민들 중 한 사람이 자기 밭에 있던 고인돌을 땅에 묻거나깨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 집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는 감돈 저수지 아래 하나, 마을 입구 주민 집에 두 개 등세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아랫마을인 소이안에는 남양 홍씨의 재각인 영성각이 있다. 원래 이 재각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이었으나 남양 홍씨 조상을 모시는 재각으로 바뀌어졌다. 영성각 안에는 상량문과 축문을 비롯한 5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재각 옆에는 백호등이라 부르는 곳으로 마을의 입향조를 비롯한 남향 홍씨 조상들의 묘가 있는데 일반사람이 보아도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대 천석꾼이 살았다. 홍씨로 위세를 떨치고 살았으나 끝내는 도박으로 끝이 좋지 않았다.
솔대골 아래 고인돌이 12기가 있었고 6구가 남아있었는데 밭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고인돌에 대해 조사된 바는 없고 돌을 깨지 않고 밭에 묻었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1980년대 초에는 이 마을에서 軍 장성이 나오기도 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오래 전에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한 주변이 지리적으로 좋아郡 청사를 이곳에 두려 하였으나 지형이 좁아 현재의 무안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사봉 아래 절터의 흔적이 있는데 불타서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