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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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돈2리 일로읍 선돌 작성
  •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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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60세대 150여명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감돈2리는 선돌 뒷생이 백학 손이안(손연) 마을로 구성되어있다. 백학은 학이 많아 붇여진 이름이다. 손이안은 현재 4집이 거주하고 있는데 편안할 안자를 써 편안한 자리로 학이 알을 품는 자리이고 묘가 많다고 한다. 남창천 흐름을 따라 행정구역을 나눠 경계가 걸쳐 있다.
지명유래
국사봉을 주산으로 하고 서망봉을 안산으로 하고 있으며 남창천을 앞에 두고 있다. 백학은지형이 학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삼향읍 맥포리와 경계에 있는데 일부에 해당된다. 손이안에 관련된 지명유래는 없다. 마을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예전에는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울창한 수림이었다고 한다. 마을이름의 유래가 된 선돌은 마을 앞에 있다. 마을 이름에 관해서 구전되어 오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전에 이 마을 주변에는 숲으로 우거져 있어서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울창한 수림이었다고 한다. 해서 난리가 났을 때 피할 수 있겠다 싶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1811년 홍경래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조정에서 남양 홍씨를 보는 대로 죽인다는 소문에 이 마을에 숨어서 세상을 피해 산다는 의미도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감돈리 입향조는 주민들이 뚜렷이 알고 있듯이 남양 홍씨 홍치선(자-지현, 호사천. 1584 - 1645)이다. 공은 1584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5세에 스승을 찾아 글을 배울 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고, 나이 9세에 사서삼경을 끝냈다고 한다. 또한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고 그 뜻을 어기지 안했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과 함께 남하하여 일로읍 국사봉 아래에 자리를 잡으니 甘心遯世(현실의 혼탁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상을 피해 은둔하여 생을 영위함 –편집자 주)의 뜻을 취해 마을 이름도 감돈리라 했다. 이후 공은 학문에 더욱 전념하여 중년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부 판관까지 지냈으며 손자는 성균관 진사로충청도 병마사를 지냈다. 정비장(이장님의 7대조 할아버지)님은 고종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셨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남양홍씨 집성촌이나 유씨, 정씨, 홍씨가 같이 살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감돈1리인 감돈 마을과는 언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며 입향조의 마을형성에서 보듯이 16세기 말에 감돈 마을이 형성되었고 선돌 마을은 19세기 초에 감돈에서 분가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을은 현재도 자작일촌을이루고 있다. 실지로 호구총수에는 감돈리만 나오고 선돌 마을의 이름은 1912년의자료에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일로읍소재지에서 청계면 쪽으로 3㎞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일로에서 청계로 넘어가는815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지방도로에서 남창천을 가로 지른 선돌교(2005년 준공)를 지나 들어오면 마주하게 되는 수산가공물 공장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수산가공물 공장 외에도 참나무 목초액 생산공장 그리고 주물 금속 공장이 들어 있어 마을 경관을 해치기는하지만 공장들이 주민들의 농한기 주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은 벼농사와 축산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 앞 서망봉 기슭에는 1967년 11월 개교하여 1999년 9월 폐교된 일로북초등학교가 있는데 지장리 감돈리 마을 주민들의 공동행사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가 있고 동계를 운영하며 마을어르신들과 야유회를 간다고 한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수산물 공장 뒤에는 우리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잘 생긴(?) 선돌이 우뚝서 있다. 끝이 뾰쪽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몸체는 각이 진 화강암 재질의 돌이다. 길이도 3ⅿ가 넘어 보이고 폭도 1.8ⅿ가량 되는 사각형의 우람한 모습이다. 선돌 주변에 5기의 고인돌이 남아있으며 드문드문 굄돌도 그대로 보인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뒷산인 국사봉(國師峰)에 일제강점기 중반까지 봉홧불을올린 흔적이 있었으나 일본인들이 일제 말기 굴을 파면서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지역 역사 자료에는 국사봉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해서 봉수대가 정말 있었냐고 확인을 해도 확실히 봉수대였다고 한다. 또한 가물 때에는 이곳 무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으며 현재는 헬기장이 있다. 현재 고인돌은 손이안에 1기만 있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묻어버렸다고 한다.
동/식물
선돌주위에 3그루의 오래 된 느티나무 당산나무가 있어서 새끼줄로 선돌에 옷을 입히면서 잡귀 잡신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냇가 옆에는 버드나무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뒷산에는 계곡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나골, 고동골, 상로봉, 방덕골, 우녕골,검적골, 각골 등이 그것이다. 이 골 중에서 방덕골과 사라골에는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들이 군사용으로 팠음직한 바위굴과 흙 굴 등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굴이 정상쪽에 위치해 있었다. 굴이 99개라고 할 정도로 굴이 많았는데 10여개정도로 여겨진다고 한다. 돌굴 아래쪽은 흙굴로 직각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굴은 반공호의 역할을 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검적골에는 감씨바위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이 외에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말[馬]발자욱이 선명히 남아있는 독짐재라는 곳이있는데 이 재는 옛날에 한 장군이 허울로 진을 치고 있었던 재였다고 한다. 독이 많아서 독짐재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이 재를 넘어 목포에 가서물물교환을 했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와 가마터로 추정되는 굴과 붉은 기와등이 발견되었다는 뒷생이, 감돈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논에 대기 위하여 막아놓은 양달보, 함보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군산동 가는 검적골 중턱에 감씨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가마터로 추정되는 곳에 황씨 집성촌 일때는 깨진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마터는 없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선돌이 있는 곳은 사각형 넓이의 지역에 5개의 고인돌이 놓여있다. 또한 선돌 아래에는 묘가 1기 있는데 비석은 없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우씨묘라고 한다. 선돌(입석)은 길쭉하고 커다란 돌을 다듬어 마을입구 등에 세워 기념하거나 신앙의 대상물로 삼았던 돌을 말한다. 주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잡귀 잡신이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며, 농사의 풍요를 기원 할 때 세워 두는 돌이다. 고인돌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하나인 선돌은 선사 시대 특히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는 거의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에 마을 앞에는 남창천을 따라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석공들이 마을에 들어와 절구통을 만들거나 돼지 구시통을 만들기 위해 가져가 버리고 새마을 사업 때는 뒷산의 사방공사를 한다면서 돌을 가져다 써버렸다. 또한 논밭을 경작하면서 논 밭에 있는 돌을 묻어버리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현재는 선돌주위를 비롯하여 10여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감돈 1구 다리쪽에 남강보라고 부르는 둑이 있었다고 한다. 무자구질을 했는데 보에서 보로 연결해서 물을 품어 사용하는 방법으로 발로 밟아 밤새 했다고 한다. 마을에 북아새로 부르는 샘이 있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먹었고 한해때 물이 말라 청년들이 진흙을 메웠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물이 나온다고 한다. 샘 옆에는 빨래하던 바위가 있다. 소이안에 있는 샘은 한해때에도 마르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1972년에 세워진 홍순진선행비가 서있다. 같은 마을인 소이안에는 남양홍씨의 제각인 영성각이 있다. 영성각 안에는 상량문과 축문을 비롯한 5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20여년전 현대식으로 지었다. 제각 옆에는 마을의 입향조를 비롯한 남향 홍씨 조상들의 묘가 있는데 일반 사람이 보아도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학이 알을 품은 자리라고 한다.
설화
감돈 마을 뒤에도 비슷한 크기의 장사바위 1기가 있다. 서당골 위에 있는 큰골에 있는데 이곳은 예전에 삼향에 사는 사람들이 지장리에 있는 삼향장을 보기 위해 넘었다는 길목이었다. 선돌에 관련되어 뚜렷이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지만 장사가 지팡이로 짚고 다니다 이곳에 꽂아두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목포 대성동에 위치한 홍약방은 6·25전쟁 후로 고향인 선돌마을의(홍씨 집장촌) 어려운 사람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 마을의 피해가 많았다.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교도소아래 다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이를 낙사자리라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한때 이 마을의 풍광과 주변 환경이 좋아 군에서 도청 직원들을 위한 전원주택이 계획되기도 했으나 축사가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우리 지역에는 선돌 마을이 세 군데나 있다. 해제면 송석리 입석 마을과 청계면 도림리 선돌 마을 그리고 일로읍 감돈리의 선돌 마을이며 마을에 선돌이 있는 곳은 대략 26개 마을의 41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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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03.0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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