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은 망월1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로읍에서 6㏎ 정도 떨어져 있다.
본 마을인 망월동을 비롯하여 마을 입구에 있는 골짜기가 소 머리처럼 생겼다는 우둣골, 바다를 바라본다는 마을 앞의 망해동, 청호리의 청호마을과 경계에 있는 박실, 그리고 달팽이 모양의 왓등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이 두 군데여서 회관도 두 곳에 있다. 큰마을과 작은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지명유래
마을은 玉兎望月(옥토끼가 달을 보는)의 형국으로 마을 뒤인 꼬작봉과 땅샛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작은 망모산 큰 望母山(전주 이씨 족보에는 望每山으로 나온다, 이 산에는 두 개의 굴이 있다)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세종대왕의 14번째 아들인 수춘군의 후손 전주 이씨 李俊嘛(이준마. 1565-1629, 자-경보, 호-노암)이다. 이준마는 일로읍에 전주이씨로서는 처음 들어온 사람이기도 한데 정유재란을 피해 전북 남원에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세종대왕의 후손이다. 하지만 세조의 왕위찬탈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조상들은 오랜 세거지였던 경기도 양평을 버리고 전북 남원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다시 무안과 영광 등으로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 홀로 이 궁벽한 산촌에서 살게 된 입향조는 앞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친족을 떠난 외로움과 세태의 비정함을 달랬을 것으로 보인다. 해서 망월동의 지명유래는 입향조가 달을 보면서 왕족의 외로움과 현실의 고달픔을 달랬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망월동의 지명 유래는 ‘마을 동쪽에 있는 망모산의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다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마을 유래지에 의하면 ‘전해오는 이야기로 조선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후손이 인조 때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았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밤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며 배고픔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시대나 인물 및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이를 정서적으로 유추해보면 왕족의 회한이 담겨 있는 유래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전주 이씨 동족 마을로 타성은 한 가구도 없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 주변의 마을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 주민들도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어렵게 살았으나 영산강의 하구둑이 막히면서 농지가 조성돼 비교적 여유 있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을 둘러싸고 여러 개의 들[野]이 있다. 집앞들 뻐뚜 구룡개들 광대재들 박곡들로 주민들에게는 소중한 식량 보급원이었다. 마을에는 망머리샘 아랫말 샘 등이 있었으며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될 정도로 화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뿐만 아니라 전부 친족이어서 주민들간 우애가 깊기도 해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마을에 문제가 발생했을 시 왕족의 후예답게 서로 협력하고 양보해 문제를 해결하니 주변 마을에서 부러워한다고 한다.
주요시설
마을에 교회가 있으나 주민들이 한 사람도 다니지 않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다닌다고 한다.
마을변화
망월동 뒷산을 경계로 오룡지구 2차 아파트건설이 진행중이다. 숭어와 농어가 살던 오룡마을은 삼향면 오룡리에서 일로읍 망월리가 되었다.
1980년 6월 25일 영산강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아파트가 지어진 자리는 간척지를 불하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라남도 땅으로 남겼고 농사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오룡지구 이다. 천오백평 한방구씩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는데 마을에 사는 사람만 살 수 있었고 제비뽑기로 번지수르 뽑아서 불하하였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망머리 샘은 큰마을 옛 바다 근처에 있었다. 아랫말샘은 청용 샘으로 정자옆에 있었고 물이 좋았다.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는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다.
구룡개 위 범바위는 개울창이 9개여서 구룡으로 부른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갯벌에 잡히는 어종이 많았다. 칠게, 대가이, 짱뚱이, 새우, 낙지, 꼬막 등 모든 어종이 잡혔다.
대가이(대갱이)는 장대에 가꾸리를 걸쳐서 홀치기를 하는 다매라는 도구로 잡아 10마리씩 꼬챙이에 끼워 말렸다가 구워서 두드려 봄에 풋마늘에 무쳐먹는다. 낙지는 키만큼 큰 낙지가 잡혔다. 장뚱이는 된장국을 끓여서 먹었고 7월에 잡는 맛은 가장 맛있었다. 새우는 개웅을 더듬어서 잡았고 꼬막은백합처럼 생겼고 깔치기에서 많이 잡혔다. 바지락은 없었다.
구멍이 두 개인 맛은 7월이 가장 맛있었다. 새우는 개웅을 더듬어서 잡았다. 숭어는 가래로 잡았다. 보리밥(민챙이) 조개종류로 고동이 많았다. 산에서는 고사리를 채취했고 나무를 해다 썼다.
바다 앞이지만 배가 없어서 어업을 하지 않았고 예전에서 밭에서 서숙밥을 먹고 살았다. 100여마지기의 논이 있었다.
동/식물
마을 우측에 340여년이 되는 팽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4미터 10이 넘는다. 이 나무는 마을의 풍수적인 지형으로 보아 지맥이 허한 곳에 비보의 개념으로 심었는데 후일 마을의 당산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당산제도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망머리 꼬작봉 땅샛봉을 포함하여 나드리, 마을 뒤 노랑섬, 마을 서쪽 끝에 있는 부리인 섬끝, 마을에서 청호리로 넘어가는 청망분교 앞의 파랑새 잔등, 꼬작봉 너머 깔치기 위에 구룡개(구렁개라고도 함)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는 구룡개 위의 바위를 범바위라 부르고 있는데 뒷 마을 죽산2리 양지촌 마을에서는 공알바위라 부른다. 망해동 앞에 있는 둔덕을 간대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망해동에 전주이씨 정자인 ‘老庵’이 있다. 노암은 입향조의 호로 18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인데 삼문이 있으며 12개의 주련과 10개의 현판이 있다. 다른 마을의 정자와는 다르게 입향조의 호를 정자이름으로 하고 있어 이 마을 주민들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다. 특히 정자를 둘러싸고 4면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우리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정자의 뒤에는 전주 이씨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데 흥양군을 모신 신도비가 있으며 그 비각이 독특하다. 또한 문신석도 우람해 우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상은 아니다.
음력 3월 10일에 제를 지내며 예전에는 150여명이 참여했으나 요즘은 20여명이 제에 참석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이범길 어른신은 1900년경 출생하신 이씨 집안 장사로 키가 2m, 손이 30cm정도로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영암군 씨름대회에서 1등하여 송아지를 받았고 이장사로 불리웠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일로에서는 처음으로 동학 후손을 발견했다. 이중관(호-남오, 1870-1894, 12, 12)인데 전주이씨 수춘군파 족보에는 동학농민군 포장으로서 전주성 전투에 참여하고 우금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항시 백마 타고 나들이를 하였으며 이 지역이 아닌 전라북도에서 동학의 접주를 하며 보국안민의 선두에 서서 맹활약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료가 없어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