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촌은 일로읍에서 제일 끝자락인 영산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망모산 줄기인 뒤까끔(뒷산)을 배경으로 하고 영산강을 바라보며 큰비로촌 작은비로촌(너매) 갯모실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비로촌은 망월3리에 속하는 마을로 백로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이유는 마을 앞 섬인 긴섬(진섬)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영산강이 막히고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농지화되었지만 막히기 전에는 넓은 갯벌에 각종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새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이 마을 앞의 긴섬을 중심으로 황새과의 백로 수백마리가 서식하고 있었다. 해서 비로촌이라는 마을의 이름도 백로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로는 예전부터 길조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이 새가 서식하고 있는 마을은 살기 좋은 환경의 마을로 알려져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은 황씨들의 터였다고 한다. 그러다 전주 이씨들이 들어오면서 황씨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전주이씨가 처음으로 망월리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임진왜란을 피해서 노암 이준마 공이 전북 남원에서 망월리에 들어왔다.
이후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사람은 전주이씨 수춘군파인 이준마의 후손으로 이후창(자-여실. 1684-1752)이다. 그는 망월 마을에 있다가 1700년도 초에 이 마을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안군 유래지를 보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200여년 전에 의산리에서 이곳으로 처음 이주해온 전주이씨 이성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전주이씨 족보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에도 1789년의 호구총수에 노촌면 飛鷺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일로면 비로촌으로 그리고 1917년엔 일로면 망월리 비로촌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30여 가구에 지나지 않지만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넓게 퍼져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반도형의 지세를 지니고 있었다. 뒷산은 벼락산이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이 산은 바위로 이뤄진 산인데 영산강 둑막이 공사 때 이 바위를 활용하기 위해서 폭파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영산강이 막히면서 상대적으로 잘 살게 된 마을이다. 왜냐하면 농지가 부족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는데 간척으로 농지가 조성돼 그때서야 비로소 농사를 지으며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이 마을 출신의 딸들이 시집 갈 때 ‘백미 서 말을 먹고 가면 부잣집 딸’이라고 했을까. 그만큼 농지가 없어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강물이 막히고 근래에는 전남 도청이옆 마을인 삼향면에 들어오면서는 地價가 많이 올라 서류상으로 부자들이 많이 살고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을 곳곳에 택지조성과 전원주택단지를 위한 기반조성을 하고 있어 상전벽해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한다
아직도 이 마을은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은데 시금치와 찰옥수수가 많이 재배된다. 그중에서도 무안에서는 찰옥수수를 제일 많이 심는 마을이다. 찰옥수수는 충북 제천과 강원도 영월 주민들과 계약을 맺고 재배를 한다.
현재는 벼농사와 옥수수, 시금치, 갓, 양파를 재배하며 옥수수는 강원도 영월과 계약재배를 통해 생산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 그리고 청년회(목포에 사는 마을 후손들)가 풀베기도 하고 마을 일을 도와준다.
공동이용시설
아랫샘은 간기있는 물이었다. 웃샘은 간기 없는 물로 80년대 까지도 먹었다. 70년대 말 지하수를 파서 사용하였는데 130m를 팠다고 한다. 영산강물을 끌어다 허드렛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엔 비록 食生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 5-6월이면 해파리(해월)를 잡기 위한 中船들이 강을 메워 장관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어나 황복 숭어 등 해산물이 계절을 바꿔가면서 많이 잡혀 나름대로 해안가에 사는 즐거움은 있었다고 한다. 특히 큰 마을의 강지끝에는 파시가 형성되어 많은 주막과 함께 흥청되기도 하였다.
동/식물
마을 주변에는 독섬 팽나무섬 진섬 콩섬 솔섬 등 5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에서 마을 앞에 있는 4개의 섬이 백로와 관련이 있다. 즉 독섬은 백로의 눈으로 봤고 팽나무섬은 새의 벼슬로 진섬은 백로의 긴 부리로 그리고 콩섬은 새의 먹이로 본 것이다. 해서 마을을 飛鷺下田(주민이 갖고 있는 호구단자에는 非老村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의 형국으로 보아 명당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전주이씨 제각인 익모재가있는 갑호등은 혈처로 알려져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선창끝 천지끝, 노랑새끝 목밭 주곡망태 섭두리 박곡 큰들작은들 솔섬(소리섬, 매섬) 새안산등(갑호등) 신방죽꼬작 새우난 넙덕자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간대끝 또는 강지끝이라 불린 곳에는 비로포구가 있었다. 비로포구는 영산강의 어업전진기지로써 큰 주막이 두 개나 있을 정도로 성시를 이루었던 곳인데 영산강 안쪽의 주민들이 큰 바다로 나갈 때 마지막으로 식수 등을 점검했던 포구이기도 하였다. 현재도 선착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로포구는 선착장으로 목포를 오가는 여객선이 다니던 곳으로 배는 영산포도 가고 목포도 다녔다.
강지끝에는 주막이 있었다. 중선배가 나불도로 다니고 유람선도 왔다갔다 했다고 주민분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마을에 장흥고씨 전주이씨 등 두 개의 재각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의 지반이 바위로 이루어져 물이 귀했다. 해서 가뭄이 들 때는 마을 주민스스로 물 배급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나무도 귀했다. 주변에 산이 많지만 대부분이 마을 세도가들인 나주나씨 장흥고씨 전주이씨 門山이어서 나무를 할 엄두를내지 못했던 것이다.
50년대 60년대에는 목포에서 영산강을 이용하여 인분과 거름(주민은 쓰레기라고 한다)을 날라다 농사를 지었다. 해서 주변 마을이 흉년이 들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이 마을은 자식들을 목포나 광주로 유학을 보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고 비록 인분이지만 기름진 비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 수확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비로촌 보리는 기름진 거름을 사용해 알곡이 굵기로 유명했다. 그 결과 한 마을에서는 드물게 교사나 공무원들을 많이 배출할 수가 있었다. 마을에서 배출된 인물을 보면 고시 합격자가 5명이나 되고 박사를 비롯한 경제계 인사 그리고 공무원들이 많다.
예전에는 마을회관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바다어업을 하던 시기에는 해파리, 게, 운저리, 대가니, 장어, 새우, 황복 등이 잡혔다. 주로 목포로 팔거나 일로에 팔았다. 바다의 고동이라 불리는 민챙이는 보리가 익을 때 잡히며 삶아서 먹었다.
종자를 생산했는데 보리, 서숙, 배추, 당근종자, 무종자. 대파종자, 우엉종자 등을 재배하여 중앙종묘에 납품을 하였다.
목화를 재배 후 일로에서 가공을 하였고 일로시장에서 베를 짜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마니짜기, 멍석짜기, 짚소쿠리(재소쿠리라고도 부름)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