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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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용1리 일로읍 복룡촌 작성
  • 복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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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97세대 250명의 인구가 산다.
자연마을 구성
복룡촌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옛등과 본마을로 이뤄졌다. 일로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5㎞ 가량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우봉을 기점으로 몽탄면과 경계에 있다. 무안군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백련지 가꾸기 사업의 덕택으로 마을의 모습이 점차 새로워지고 있다. 여러 동의 한옥이 들어서면서 예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특히 다른 마을과는 달리 마을회관과 건강관리실이 각각 독립해서 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일로읍 복룡1리 복룡촌 마을이다.
지명유래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밀양 박씨 족보에 나오는 목동(牧洞)이라는 이름이다. 이는 마을의 뒷산이 황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황우봉(황우뫼, 황우산, 황골뫼)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소를 키울수 있는 터란 의미다.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목문재[牧門峙], 독골[犢(송아지독)谷],犢고지, 목골[牧谷] 등의 지명이 있으며 마을 앞의 조그만 산을 여막(소여물 담는그릇, 소 밥그릇. 몽탄 당호리의 선산임씨 문중산)으로 부르고 있다.또 하나의 지명은 마을의 앞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해서 안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산의 지형이 困龍得水의 지형으로 마치 피곤에 지친 용이 영산강 물을 만나 승천하기 위하여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복룡으로 부르고 있다. 호구총수의 기록에는 목동이 아니라 지금의 마을 이름인 복룡촌으로 나온다. 참고로 우리 지역에 복룡이나 용산이란 지명이 많이 나온다. 이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산의 맥이 강이나 바다를 향해 뻗어있으면 붙여지는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첫 입향조는 朴世徵(1670-1750. 자-서경, 호-돈옹. 난정공의 손자이며 만연공의 아들)으로 본가인 금성(나주)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이 시작되었다. 박세징에 대해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무안지망집에 ‘공은 용모가 청수하고 성격이 인자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여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출사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를 수양하고 주변을 가르치기 위해 했을 뿐이다’고 적고 있다. 또한 碑文에 의하면 ‘몽탄강 어구에 한 마리 용이 잠복하였으니 심양(潯陽)에 자취를 찾아서 깊숙이 홀로 자청하여 天命을 즐기고 쌓인것을 만끽하니 그 은덕 남아서 자손들끼리 누리도다’ 며 입향조를 찬양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또한 안산에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봉우리로 인하여 이 마을에 세 명의 인물과 세 명의 부자가 태어날 것이다’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민들이 인정할만한 부자나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 이름인 목동(牧洞)에 걸맞게 소를 많이 키우고 있다.
마을성씨
원래 이 마을에는 정씨, 이씨, 오씨 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씨들은 마을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으나 뒤이어 들어온 밀양 박씨들은 일가를 이루어 번성하며 정착하였다. 예로부터 이 마을의 터가 ‘밥은 없고 손은 넘치는’ 터로 알려져 있어 박씨들의 자손은 번창했으나 크게 부자 된 사람은 없다. 한때는 옆 마을인 사교마을과 합쳐 500세대 4천여명의 대가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박씨 이외의 성씨들은 손도 귀하고 재산도 늘어나지 않아 대체로 이 마을에 남아 있지 못했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복합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처럼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마을에 누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마을이 활성화 되고 있으며,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주는 등 번거로움보다 실익이 너무 많아 주민들이 오히려 좋아 한다’고 한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우물이 두개가 있으며 복룡주향교회가 들어서 있다. 회산백련지에서 연으로 한참 기세를 올릴 때 이 마을에서도 백련과 관련된 산업이 활발하게 유치되었다. 백련차 가공공장인 ‘다연’이 있었고, 연을 재료로 하여 생산하는 ‘연 맥주 공장’이 가동되었다. 여기서 생산된 연 맥주는 이번 백련축제 때 특산품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익이 나지 않아 지금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이다. 연 홍보관은 현재는 신활력플러스 사업단이 들어왔다. 퇴비공장도 있다
마을변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영화농장이 들어서고 간척지가 농지로 변하면서 물이 귀해 농사철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친척 간에도 많았었다고 한다. 해서 원래는 현재의 백련 저수지를 중심으로 연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었는데 물 때문에 연이 나오는 대로 주민들이 잘라 버려 없애버리다가 영산강이 막아지고 물이 풍부해지자 비로소 연꽃을 재배하고 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은 성장에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농사지을 물도 없는 상황에서 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의 우물은 회관 뒤에 하나 아래 회관 옆에 하나가 있다. 우물물이 마르지 않아 120세대가 먹고 살았다. 2006년 살기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 때 보존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는 당산으로 모셨던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다 해서 나무에 상처를 내, 끝내 말라 죽어버렸다고 한다. 소나무 당산이 있었을 때에는 매년 당산제 때 풍물을 잡으며 신명나게 치뤘으나 소나무가 없어진 이후로는 주민들이 검소하게 제를 모시고 있다. 현재는 새로운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를 심어 주민들이 보호하며 키우고 있다. 당산제는 보름날 지내는데 옷 입고 풍물을 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축소해서 인사만 드린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으로 영산강을 막기 전까지 배들이 왕래하였던 선창목이 복룡교 주변에 있으며 연소골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영산강 물막이로 농지가 되어있으나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치 소드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소드랑섬이라 부르는 섬이 있으며, 안산 뒤에 있는 들로 장구의 목과 같다 해서 장구목들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뿐만 아니라 몽탄면 당호리 갈산에서 복룡촌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목문재[牧門峙]라 하는데 멍멍재라 하기도 한다. 목문재는 복룡에서 몽탄 갈산 너머가는 재로 상을 당해서 상여가 넘어가지 못했다고 어르신들이 이야기 하였다. 몽탄에서는 넘어 올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넘어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도르매는 목문재 너머 몽탄과 일로의 경계로 마을 사람들의 모든 생활권이 명산이 주 생활권이었다. 마을에서 명산역은 5리가 걸리고 일로역까지는 10리가 걸렸다. 길이 험했다. 갈산마을 앞길은 현재이고 수로길을 따라 넘어다녔다. 장구목들은 산 뒤 너머로 영산강 뚝방, 복룡산 너머를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의 오른쪽엔 1923년 밀양 박씨 문중에서 지은 관란정(觀瀾亭)이 있다. 황우봉 자락에 팔작지붕 5칸으로 지어진 이 정자는 밀양박씨 강학소로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입구에 ‘밀양박씨난정금곡양세행적비’가 있으며 정자안에는 현판기와 중수기 그리고 방명기가 걸려 있다. 관란정의 현판기에서는 이 마을의 옛 이름이 목동(牧洞)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관란정의 제는 삼월 삼짓날 지내고 예전에는 100여명이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30~40여명이 지낸다. 마을 어르신들도 참여한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지난 시절 마을에는 장사로 소문난 인물이 있었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늘 농악대 앞에서 상쇠를 보며 꽹과리를 신명나게 쳤던 전문 씨름꾼 박이태(판동)씨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주변에서 열리는 각종 씨름판의 우승으로 36마리의 황소를받아 오기도 했던 인물이다. 특히 회산방죽에 백련을 심었던 정수동씨와는 씨름에서 서로 호각을 이루었다. 당시 정수동씨는 앞무릎치기를 잘하는 씨름꾼이었다.박이태씨는 키골이 크고 얼굴이 넓었다고 하며 들어서 밀어치기 기술이 좋았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모정 앞에는 출향인에 의해서 세워진 천지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커다란 석장승이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안내판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법원에 서기관으로 계셨던 박의준씨가 기증하였다고 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간척이 되기 전에는 망둥이, 운저리, 맛, 짱뚱어, 기, 대가니, 숭어, 장어를 잡았다. 맛은 업자가 와서 생으로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몽탄면 당호리, 용산, 노란머리에서 실어서 가지고 갔다. 숭어는 그물로 잡았다. 대가니는 다매로 잡았는데 한두릅에 20마리로 국을 끓이거나 말려서 무쳐먹었다. 대가니 애와 알은 국을 끓일 때 된장을 넣어서 먹었는데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장어는 가을에 알을 낳으러 영산포를 갔다오는 장어를 잡았다고 한다. 간척이 된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평준화가 되었는데 호당 땅을 불하하여 내 땅에 대한 자부심과 식량이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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