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읍에서 북동쪽으로 5㎞의 거리에 있는데 일로읍 복룡2리에 속해 있다. 원래는 용호동과 한 마을이었는데 주민수의 증가로 2007년에 분리되었다.
回山이라는 마을 이름은 영암이나 목포 쪽으로 갈 때 섬을 돌아서 간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 마을에 다시 모인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원래 이 마을은 回島라 불리는 섬이었다.
이 마을의 앞들이 신원장(영화농장), 뒷들이 구원장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온 성씨는 나주 임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회산마을에는 신씨가 제일 처음 들어왔으나 지금은 없고 다음에 장흥 고씨, 나주임씨, 전주 이씨 순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장흥고씨 입향조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온 고만희(명종대 출생. 자-자성, 호-돈쌍)씨이다.
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문화현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던지 이임할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유임을 간청할 정도였다. 공에 관한 송덕비가 그곳에 있다. 후일 모략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 아랫 마을인 두래미 마을에 장흥고씨 제각인 장영재가 있다.
전주 이씨의 입향조는 이정(李禎. 초명-헌방, 호-사현. 1654-1715.)이다. 자료(무안향토문화자료)에 따르면 조부는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왕족인 근령군 ‘농(農)’의 후손으로 이정은 원래 나주 죽암에서 세거하다가 주변 환경이 좋고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좋은 이 마을에 영조 때에 터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정은 문장이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났으나 靑雲을 꾀하지 아니하고 구원(丘園)에 덕을 갖추어 후진을 양성하고 청검(淸儉), 효제(孝悌)로서 전가의 요법을 삼았다 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에 간행된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回山村으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回山洞, 龍虎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조선조 말 현재의 백련지 중간쯤에 둑(구원둑이라 함)이 생기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그 둑이 있었던 자리(덕애 마을 서순근씨 마당)에 둑을 막은 민병석씨의 공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백련지 조성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뻘밭에서 개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생활의 여유를 갖다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잘 살게 되었다. 숭어, 운저리, 게, 맛, 장어, 짱뚱어가 주로 잡혔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구정 전에는 마을 청년회에서 주관하여 마을 어른들을 전부 모시고 목욕탕에 가 1년 동안의 묵은 때를 밀어드리고 씻겨주며 새해에는 더욱 잘 모시겠다는 경로사상을 키운다고 한다.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라고도 불렀음. 하지만 유리온실 부근을 제외하곤 산정리 소유의 땅이었다)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저수지로 의산리의 돈도리에서 양도로 이어지는 원둑이 쌓아지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 방죽으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사용하였는데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근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회산방죽 위, 아래 웃방죽, 아랫방죽 물이 빠지면 가운데 길로 산정리까지 걸어다녔다. 흔들다리를 경계로 물량이 적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오늘날의 백련단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전에 별세한 덕애 마을의 정수동씨 때문이었다 한다. 꿈에 학을 보고 백련과 인연을 맺었다는 정수동씨는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정도로 엄격하게 연꽃을 관리해 현재 동양 최대의 백련단지를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다. 정수동씨는 방죽가에 살면서 힘이 좋았다고 전해지며 현재 큰아드님이 90여살 이라고 한다
동/식물
당산나무는 팽나무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소실되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지명으로는 구언장, 신언장, 땅골(관란재 아래, 지금은 연방죽에 편입되었음), 인세(유리온실 앞), 뿔장재, 선창목(용호동에서 복룡1리로 가는 다리) 불당너머 등이 남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정월 보름에는 마을 회관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할 뿐 아니라 어버이날에는 공동으로 마을 어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려 어버이의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한다
유물, 유적
장영재는 10월 보름에 제를 지낸다. 30~40여명이 참석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에 상사(喪事)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밖에 나가있던 이 마을출신의 젊은이들이 모두 돌아와 함께 일손을 거들고 어려움을 나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연을 캘 때 연춤춘다고 하여 발로 밟아서 손으로 캐낸다고 한다. 연방죽의 뻘이 연하고 부드러워 연근이 크고 부드러워 맛이 있다고 한다. 논에서 재배한 연근은 짧고 맛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저수지에 물반 고기반이었고 마을에서 연농사는 짓지 않는다고 하며 종근을 재배하는 농가가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오폐수공사를 제일 먼저 하였다.
연방죽으로 인해 마을 진입로가 없어져 피해가 많다고 한다. 또한 축제기간중에는 소음피해가 심하다고 한다. 마을 주민 중 연방죽에서 일하는 사람은 4명정도로 70세 미만이 근무한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