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복룡6리 일로읍 용호동 작성
  • 용호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20가구 34명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용호동 마을은 불당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는데 마을 앞으로는 10만평의 회산백련 단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일로읍 복룡6리에 속해 있으며 복룡2리의 회산과 한 마을이었는데 2007년에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龍虎洞의 지명유래는 마을의 지형에서 비롯된다. 마을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뒷산에서 발원한 길다란 맥이 마을 앞을 지나 복룡저수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주민들은 이것을 龍이라 불렀다. .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면서 토사 채취를 하는 바람에 지금은 몇 그루의 소나무 동산만 남아있다. 또한 마을의 주산이면서 선창목의뒷산이 되는 곳을 호랑이 산으로 불렀다. 이 산에는 바위가 많아 일제강점기 때 바위에 구멍을 뚫어 남포로 튀겨서 떨어져 나온 돌들을 백련지 확장공사에 사용하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선창목 주변을 남포갓이라 부른다. 이처럼 마을 앞의 용과 마을 뒷산에 해당되는 호랑이산을 이용해 龍虎洞이라 한 것이다. 다른 주민은 용이비를 타고 승천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래 가운데 글자인 ‘虎’는 ‘壺’를 썼다하나 한자가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임씨다. 임씨의 입향조는 林 타(1593 -1664. 자-실지, 호-몽촌)이다. 상주목사를 지내서 상주공이라 부른다. 공은 광해조에 生員 進士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계해년에 정사원종공신이 되어 상주 목사를 지냈다. 임타의 묘갈명에는 ‘공의 사람됨이 걸출하고 학문이 도저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주읍지에서는 공을 ‘호남 제일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말년에 그는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나주 회진에서 용호동으로 옮겨 와 경치가 좋은 이곳 회산에 정자 觀海亭을 짓고 소요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계속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에 간행된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回山村으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回山洞, 龍虎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캠핑장의 피해 때문이다. 캠핑카와 텐트촌이 어울려 있는 이곳은 주말이면 예약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있다. 해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캠핑장에서 올라오는 관광객들의 고기 굽는 냄새로 온 마을이 곤욕을 치러야 한다. 즐거워하는 이들에게 뭐라 불평을 쏟을 수는 없지만 이런 상태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자주 반복되다 보니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만 가고 있다. 덧붙여서 옆 마을인 복룡촌 마을의 퇴비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오물냄새 또한 주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벼농사를 짓고 있다. 밭은 농지가 백련지로 포함되어버렸다고 한다.
주요시설
백련단지와 유리온실 캠핑장
마을변화
이 마을은 농지가 없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뻘밭에서 개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생활의 여유를 갖다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잘 살게 되었다.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라고도 불렀음. 하지만 유리온실 부근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산정리 소유의 땅이었다)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한 저수지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부녀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신언장 구언장 땅골 인세 뽈당재 등이 있다. 선창목에는 복룡촌 마을과 연결되는 나무다리가 있었으나 1968년에 시멘트 다리로 바꿔지면서 복룡교라 부르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회산으로 가는 길은 진등길이라 했으며 진등에는 당산골 사당골 등의 지명이 있었다. 사당골에 들어선 관해정 위에는 당골네가 살았던 점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현재 사당동(祠堂洞 - 회산과 용호동 사이)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관해정이 서 있는 자리이다. 관해정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무안군과 나주임씨 문중이 힘을 합하여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 관해정에는 솔대가 함께 세워져 있어서당시에 이 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사회복지의 이론을 마련한 임춘식 교수와 행정고시 합격자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만 섬이고 바다였던 마을인데 영산강에서 바다어업을 하였고 양두까지 가서 기와 맛, 대가니, 장뚱어를 잡았다. 민물쪽은 갈산쪽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맛젓갈과 게젓갈을 먹었는데 소금간을 하여 무쳐먹었다고 한다. 맛은 미역국을 끓여 먹으면 맛있었다고 한다. 망둥이(운저리)는 회로 많이 먹었고 대가이는 말려서 고소하게 구워서 파나 마늘잎에 무쳐먹었다. 저수지에서 겨울에 더듬개질으로 손으로 고기를 잡았고 풍개질은 양쪽을 막아서 고기를 잡던 방식인데 이 마을에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긁캥이는 거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막대에 잡아당겨 고기를 잡던 방식으로 겨울철에 주로 피라미 대피리를 잡았다고 한다. 연방죽 근처에는 4가구가 살았는데 예전에는 연방죽에 모람이 가득 있었다. 모람을 삶아서 먹으면 밤맛으로 까서 먹었는데 입이 시커멓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연방죽 주무대 쪽에 집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