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은 일로읍 소재지에서 몽탄 방면으로 1.5㎞ 쯤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가운데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가려면 어려움이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어려움이 없는 행정구역명이 일로읍 산정1리인 산정 마을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寶盖山(광암쪽에서 보면 마치 보물이덮어 있는 길지의 산으로 보임. 복개산으로도 불림) 동쪽 능선을 따라 금산재 재각자리에 300여 년 전 서당이 있었는데 오풍정(唔豊亭-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풍요롭게 들리는 마을) 산정(산재이) 도리봉이 원산정 마을이다. 또한 竹田(대사밭)과 소나무와 팽나무가 우거져 있다하여 松亭(송재이), 그리고 오른쪽 능선 따라 있는 연지원(淵池苑-주샘물이 펑펑 쏟아져 깊은 연못을 이루는 마을)이 그것이다. 한해 때 물을 나눠 먹을 정도로 풍부했다고 한다. 현재 연지원은 없어졌다.
지명유래
山亭’이란 지명의 유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18년 9 월에 강진의 귀양살이에
서 풀려나 고향인 마제(현재의 남양주) 본가에 가는
도중 이곳 산정서당(금산재)에 들러 며칠간 머물고 갔
다하여 산재이[山亭]라 불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개산의 ‘산’과 송정 마을의‘정’을 합
쳐 ‘산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1600년경 종만공이 보개산 아래 현재의 금
산재 제각 터에 서당을 열고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
는 산속의 집이라는 이야기로 구전되어 ‘산정’이라
고 불렀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서당을 개설
하여 250여년간 글공부가 계속되어 한시 작가인 滄浪
亭 奇訥, 錦坡公 永燮 공을 배출하였다. 또한 한약방
을 차렸던 奎秀공 在衍공 奇祐공 침술가인 得燮공 서
예가인 斗七공 등도 서당의 공부 때문에 가능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산정리에 있는 ‘부사정공나주정씨묘표’에서는 무안
의 입향조로 26세 정대흥(丁大 興. 1428 - 1498. 호-
\詩翁)공으로 보고 있다. 공은 1428년 황해도 개성에
서 태어났 는데 자품이 영수하고 지개가 견확하여 학
\문에서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수재였다. 단
종 조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호조정랑 집현전학사를 역
임하였으며 연안 부사를 제수 받았다. 이후 사육신의
정변이 있고서 당시 학문적 교분을 맺어왔던 박팽년
성삼문등이 변을 당하자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공은
벼슬을 버리고 청계면 송현리 솔치 마을에 은둔하여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이어 후손들이 청계 복룡리 장자리와 일로 월암리 강
남산등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31세 丁宗萬(1575-1636. 자-以德)
이다. 공은 무과에 등과하여 어모장군 훈련판관을 역
임하였다. 참고로 대흥공 3세손인 욱공은 강남산에 입
향하여 살았으며 나주정씨 일로 입향조는 욱공이다.
종구공 큰손자는 송암마을에서 작 은 손자인 종만공은
보개산 아래 산정마을에서 살았다.
실지로 마을 주민들도 입향조가 450여년 전(15대조에 해당)에 청계면 송현리 솔 치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산정리로 표기되었고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산정리로 나온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지금은 행정구역이 광암리에 속해 있는 검태(劒笞)와 등림 마을도 모두 나주 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 마을의 입향조는 宗萬공의 후손들이다. 용산1리에속해 있는 松岩마을도 종구(宗耈 - 일로 입향조인 旭 공 큰손자) 공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지금도 강남산 마을의 입향조인 욱공 자손들은 큰집(종구공 후손)과 작은집(종만공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농지는 학두리와 사교마을에
연결된 둑으로 인하여 형성 된 농지이다. 마을 앞에는
아직도 배들이 드나들었다는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담배와 시금치 그리고 갓이다. 양파의 고
장인 무안에 속하면서도 일로읍과 몽탄면과 삼향면은
양파 재배를 소규모로 하고 대신 담배와 시금치를 많
이 심는다. 기후와 토질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황토 흙에는 자갈이 없다고 한다.
현재는 콩과 깨도 재배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당산목인 팽나무가 있었다. 정씨 문중산에 있는데 군에서 정자를 지어주기로 하였으나 정씨문중에서 반대하여 짓지못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배들이, 연지나무골(예전에 연지
꽃 나무가 많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그루도 남아있지
않다)(제재소 뒤), 간대골(금산재 뒤쪽) 새실[鳥谷]등이 있으며 40여 가구에 60여 명의 주민이 있으나 남자는 모두 합쳐도 15명뿐으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 이장의 푸념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사업을 하고자 하여도 젊은 사람이 없어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는 말이 결코 엄살은 아닌 듯하다. 금산재에서 글 읽는 소리가 원풍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공산은 묘를 쓰는 곳이고 원풍정은 금산재 앞쪽에 있다. 잿등은 방뫼 넘어가는 재를 말한다. 연지나무골에 대해 기억하는 주민이 한명도 없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사당이 있다.
사당이 생긴 이유는 ‘다산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가
끝나고 한양으로 갈 때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당시 제
자이 자 친족이었던 눌재 정근철의 청을 받아 한 달여
동안 이 마을에서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강론을
하였던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자면 평소에 다산 선생의 학문을 흠모하고
같은 친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눌재 선생의 현손인
정재연이 사재를 떨어 이 마을에 1967년에 ‘다산사
(茶山 祠)’를 건립하고 추모하였다. 나아가 1976년에
는 백범 김구 선생을 함께 모셔 매년 음력 3월 17일에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제사를 모셨다.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지금은 월암리로 이거하였지만 정완의 기적비가 있었
다. 기록에 따르면 ‘정 완은 선조 병자년에 무안군
청계면 송현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년 후인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군대에 편입되어 당포싸움, 한산도싸움, 진도싸움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임진왜란 공
신으로 선무훈록에 기록되었다. 그 후 영조 임금이 忠
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忠良祠에 배 향하였다. 후손
들은 충절공의 德業을 오래 기리고자 공이 만년에 기
거하던 일로읍 산정리에 忠節祠를 지어 문중에서 제사
를 받들며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고 정리했으
나 충절사란 사당의 존재 여부는 알 수가 없고 월암리
5구에 ‘충절문’과 ‘충 절공정완기적비’ 가 있어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마을에 30여년이 넘은
성덕교회가 있으며 일로읍에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초산정재연경로비’가 서있다. 정미소가 남 아있으
며 송정마을에 2개 인동마을과 경계에 7개의 고인돌이
있다.
현재 다산사는 없어지고 ‘다산정선생유적비’와 ‘문
도공다산정선생추모단’이 일로 읍 월암리 5구 강남산
마을에 다른 유적비들과 함께 모셔져 있다. 또한 보개
산 기 슭에 있는 나주 정씨의 사당인 금산재에 다산
선생이 현판에 친필을 남겼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
다. 금산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84
년에 지었으며 주변 관리가 잘되어 있다. 재각 뒤에는
나주정씨 묘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재각 안 에는 금산
재기 등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금산제의 제는 11월 둘째주에 지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