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등과 도덕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도덕리
의 와전된 발음인 도동기라고도 불렸으며 20
여 년 전에 신언목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점등은 예전에 상놈들 사는 곳을 부르는 말로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점:등 으로 읽는 것이 맞고 점등은 웃동네라고 한다.)
행정구역상으로 분리되면서 두 마을간 다툼이
약간 있기도 하였다. 신언목 마을은 역사가
있는 마을인 반면 이 마을은 신흥 마을이었는
데 두 마을간 행정구역 조정이 안 되었기 때
문이다.
지명유래
도덕지는 산정3리에 속한 마을로 주변 사람들에
게 덕을 베푸는 마을이라는 유래 를 지니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농지는 없고, 있다 해도 물이없어
경작을 할 수 없는 천수답만 있었던 빈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비로소 여유가 생겼지만 가난해도 주변에서 도움
을 청하면 모른 채 하지 않고 기꺼 이 나눠져 도
덕마을이라 불렸던 것이다.
마을유래지나 마을 앞의 안내판에도 마을유래
를 ‘마을 앞의 논이 밥상 모양과 같이 생겨
마을 주민들은 밥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
다. 마을이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마을이어서 도덕
마을이라 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가난했지
만 인정을 나누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도덕지가 아닌 도덕 마
을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정 착
오로 사용했던 지명이 주민들의 의사와는 다
르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정부가 새
마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식량 증
산의 일환으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개발
하여 전국에 보급한 적이 있었다. 일로읍에서
도 이 정책에 호응하여 처음으로 통일벼 재배
단지를 이 마을에 조성하였다. 그때 이 단지
를 부르는 말이 도덕 마을에 있다 해서 도덕
단지(道德團地) 라 했다. 그렇게 불렀던 단지
이름이 정리가 되지 않고 마을 이름으로 변해
지금까 지 내려온 것이다.
통일벼 농사를 지낼 때 볍씨를 발아하여 육묘를 했다고 한다. 알람미 쌀(베트남), 월남쌀
통일벼가 수확량이 많아서 재배하기 시작했고 박창헌씨가 농사에 노력하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박씨 박용정(호-약헌,
1887-1949)이다. 공은 이웃 마을인 복룡촌 마을
에서 1940년대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박용정님은 1940년 생으로 이 마을에 3살 때 이사를 오셨다고 한다. 박용정 어르신의 아버님이 박대전, 조부님이 박평례씨라고 말해주었다. 복룡촌 마을에서 7,8호가 이사를 왔다고 한다.
당시 이 마을은 점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흥마을이었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 와 정착하며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이 들어선 자리도 간척으
로 농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강가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이 마을의 역사도 짧다. 조선시
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나 일제강점기인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의 자료에 비로소 일로읍 산정리
도덕지 마을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4년 전에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마을
기업을 유치했다. 마을기업이란 지역공동체에 산
재한 향토 · 문화 자연자원 등 각종 특화자원
을 활용해 주민 주도의 비즈니스를 통해 안정적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말한다. 즉 마을 주민이 주도적으로 지역의 각종
자원을 활용해 안정적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단위의 기업을 말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
기업을 통해 볏짚공예를 하는데 가마니를 비롯한
토사유출방지거적, 인삼밭보호거적 그리고 나무
보 온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 마을은 농한기가 없으며 초겨울 마을 앞 풍경
도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의 마을은 벼
를 수확하고 남은 짚은 사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하
여 속칭 공룡알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 마
을 앞의 농장은 이런 공룡알들이 없다. 모두 짚공
예로 활용하기위해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또
농장 곳곳에 해충방재기가 있다. 유기농단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 주민들은 전량 계
약재배를 통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의욕적으로 실시했던 마을 기업이 판로의
부족과 일손의 노령화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운영한다. 반상회와 상조회도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뒤 옛골(욋골로 불리기
도 함. 예전엔 초분골이었음)과 그 맞은편에 옹
기를 구웠던 점등이란 지명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마을기업으로 볏짚공예, 가마니, 조경수를 했는데 1년만 하고 끝났다고 한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주변을 생각하는 넉넉한 마음
과 주민들의 협조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다. 당시 이
마을에는 공산당 일로면 위원장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사람 때문에 목
숨을 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해서 이 마을은 농한기가 없으며 초겨울 마을 앞
풍경도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의 마을
은 벼를 수확하고 남은 짚은 사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속칭 공룡알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
마을 앞의 농장은 이런 공룡알들이 없다. 모두 짚
공예로 활용하기위해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무안군에서 처음 시작하였고 병집은 하루에 한사람이 100개씩 만들었다고 한다. 볏짚기계를 50여대 운영했다고 한다.
또한 농장 곳곳에 해충방재기가 있다. 유기농단
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전
량 계약재배를 통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하
지만 초기에 의욕적으로 실시했던 마을 기업이 판
로의 부족과 일손의 노령화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무안군 최초로 친환경을 시작했다. 동진벼를 유기농재배 했는데 20여년정도 농사를 했고 10여년전부터 유기농을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판로가 잘 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주민들은 마을 옆 회산방죽에서 개최되는 무안군
의 대표적 축제인 연꽃축제에 대해서 불만이 많
다. 많은 관광객들의 통행으로 위험하고 번거롭
기만 하지 주민들 에게는 실질적인 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주민 몇 사람이 축제 기간 동
안 노점상을 벌여 농산물 판매 등으로 얻는 소득
이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최소한 축제가 개최
되는 기간 동안 방죽 옆의 마을들을 제도적으로
참여케 해서 소득에 따른 실질적인 이득과 축제
개최지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예전에는 연방죽에서 가물치와 장어, 우렁을 잡아서 먹고 팔기도 했다. 모람도 까서 팔았다고 한다. 연방죽의 흙이 뻘땅이라 고기가 맛있다고 한다.
연을 재배했으나 캐기가 힘들어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연뿌리와 연밥, 연꽃 등을 주민들이 채취해서 팔았었다. 연꽃 축제를 시작하고 부터는 못했다고 한다.
마을을 활성화하고자 마을에 유채를 심었는데 지금은 심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