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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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신3리 일로읍 중촌 작성
  • 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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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5세대 4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중촌은 상신기 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원래 상신 기 2리인 환학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몇 년 전에 신정동과 함께 상신기 3리로 분리되었다. 중촌은 들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도 中村으로 표기한다. 상신기와 신정동 마을의 중간에 있다 해서 중촌이라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마을유래 지나 주민들 은 마을 이름을 한자로 仲村으로 쓰고 있었다. 이 유를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없고 예전부터 써 왔 기 때문에 그대로 쓰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지명 의 유래도 물론 알고 있지 않았다. 한 주민은 ‘中川’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추정하 기도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옆으로 농공단 지 진사동 등에서 모여진 물이 내[川]가 되어 흐 르는 하천이 있기 때 문이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 는 ‘중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처음 경주김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현재 는 한 세대도 남아있지 않고 마을 주변에 흔적들 만 남아 있다. 이후 들어 온 성씨가 장흥고씨로 입향조는 고 준 (자 - 제원, 호 - 樂窩. 1742 - 1806)이 1700년대 후반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 로 여겨진다. 해서 얼마 전까지 고씨 집성촌이었 으나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성 씨의 마을 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老村面 中村으로 나온다. 그리고 장흥고씨 족보나 다른 자료에도 中村으로 나온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 람에는 나오지 않다가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 에도 일로면 상신기리에 용교리 신흥리 환학동 상 신기가 나오나 중촌이나 신정동의 마을 이름은 나 오지 않는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벼농사, 밭농사, 하우스가 가장 많은 동네로 고추를 육묘하여 신안군까지 보급하고 있고 육묘농가는 2~3명이 있다. 로컬푸드에 겨울쪽파를 생산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이 마을은 다산로를 사이에 두고 복룡리 사교 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 앞에 형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간척으로 조성된 들이다. 지금 은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가구 수가 많아 처음 온 일꾼들 이 주인 집을 찾을 때는 소의 뒤를 쫒아가며 찾았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오른쪽에 당산이라 부르는 언덕이 있다. 이곳은 환학동의 이천서씨 무덤이 있는 자리 이며 주변에 수령이 상당히 되어 보이는 소나 무 6그루가 자라고 있다. 5 - 6년 전까지 환 학동 서씨들이 이곳에서 해년마다 제사를지 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이후 묘 관 리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하고 있다. 마 을의 주 소득원은 잎담배와 고추 등 특용작물 이다. 주민들이 서로 돕는 협동심이 강하며 친환경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절 밑은 개꿀재라 부른다. 개꿀재는 일본인들이 철도공사를 하는데 주변의 지형 으로 보아 바위가 없는 흙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공사를 했는데 파고 보니 바위 투성 이었다. 바위를 파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굴은 내지 못하고 주변을 파 협곡을 만들어 철로를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 은 진짜 굴이 있는 재가 아니라 거짓굴의 재라 해 서 개꿀재라 했다. 마을 앞으로는 남악에서 나주까지 이어지는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남아 있는 지명으로 마을 뒤 에 초새(촉새)구녁이 있으며 마을 오른쪽에는 구 수둠벙이 있다. 몰무덤 갈머리 뒷등 청룡끝도 남 아 있다. 또한 마을 앞에 있는 들을 개들이라 하 고 골짜기를 수밋골이라 하는데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고 준은 효자로 신정동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고 공유허비의 주인공으로 효행이 뛰어나 10세에 아 버지의 병환에 斷指引血로 5일을 연명케 하였을 뿐 아니라 육순의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심히 슬퍼하여 몸이 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규를 벗 어난 삼년상을 치루기도 해 후일 進士 林基洙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천장을 작성 하여 효 행을 널리 알렸다. 현재는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지만 주변의 상황 을 보면 상당한 절세[寺刹勢]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설로는 4칸 팔작지붕의 법당과 사경각 그리고 살림집이 있다. 절 뒤로 나 있는 시멘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 정상에는 좌불과 와불이 조성되어 있다. 와불은 길이가 14미터 가 넘을 정도의 규모이다. 비록 바위가 아닌 시멘트로 조 성된 것이지만 대단한 공력으로 세웠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절 입구에 는 8칸의 재래식 변소와 1 동의 창고가 조성되어 있다. 신정동 마을 입구에 ‘효자고공유허비’와 장흥 고씨효열비‘등 두 개의 비를 안고있는 효열각이 있다. 1925년에 세워진 유허비는 입향조인 고 준 의 효성을 기록한 비이고 효열비는 고 준의 손자 인 고형진 등 4대에 걸친 효자와 열녀가 계승되었 음 을 추앙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936년에 세 운 비이다. 내용을 보면 ‘형진은 아버지인 시무가 횡화를 입 어 博州에 귀양 가 있을 때 귀양 길에서 외로운 혼이 될까 봐 상경하여 목숨을 걸고 애원하니 모 두가 그의 효성에 감읍하여 귀양길이 풀리게 되었 다. 형진의 큰 아들 제천의 처 김해김씨는 제천으 로 부터 버림을 받아 친가에서 지낼 때 남편을 원 망치 않았으며 형진의 둘째 손자 은 주의 처 경주 김씨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늙은 시 부모와 젖먹이를 버릴 수 없어 외로운 등불을지 키며 수절을 하였다. 또한 형진의 증손 광의의 처 부안박 씨는 시집온 지 3년만에 시어머니를 잃고 30이 못 되 남편이 죽으니 두 아들과 시 아버지를 위안하며 가문을 지켰다’는 내용이다. 마을 뒤에 두 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하나는 없 어지고 가옥 안에 있는 고인돌은 남아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같은 행정구역의 신정동은 新亭洞으로 쓰기도 하 고 新井洞으로 쓰기도 한다. 마을 대부분이 한옥 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의 정책에 발맞춰 정부의 도움으로 한옥단 지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 뒤에 서당뫼라 부르는 산이 있는데 그 기 슭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다. 주지인 박홍수는 신 정동 마을 주민으로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많았 다. 특히 서울 등 도시에서 오는 신도가 많았다. 하지만 20여년 전에 주지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박홍수씨는 군대다닐 때 결혼도 하였고 월남전에 참전한 이후 절을 지었다. 신도들이 많았으며 개인사찰이었다. 도덕사에서 스님이 오셨다가 다시 가신 후 정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
기타사항
10여년 전 한옥마을로 지정되어 12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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