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마을은 사천저수지를 경계로 있는 우적동과 함께 사천2리에 속하며 사천리 안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제시대까지는 ‘사천’ 마을로 불렸는데 언제 ‘사내’ 마을로 지명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 형성 시에는 마을 앞까지 영산강물이 들어와 배들이 다녔다고 한다. 마을 중앙을 흐르고 있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月川, 서쪽은 죽림촌이라고 부르다가 사내로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마을 형성은 밀양박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해서 최초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것은 나주정씨 鄭義弘(1594-1646. 자-汝裕, 호-斜川, 효종조)이다. 그는 나주 동강면 시중동에서 살았는데 1600년대 중반에 조상의 묘지를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보고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승달산에 수원을 둔 하천수가 풍족함을 보고 농사 짓기에 알맞다고 여겨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정씨 족보를 비롯한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공은 마음가짐이 강직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명확하며 산수를 즐기고 명성을 구하지 아니하며 出塵한 기상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에 들어온 성씨가 죽산안씨다. 안씨들은 안우적동에서 거주하다 사내마을로 내려왔는데 나주정씨 뒤를 이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죽산안씨 응봉공파의 가승보를 보면 현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안기운(72세)의 14대조인 안곤(安騉)께서 사천리로 들어오신 것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더 이상의 자료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이어 경주 이씨 입향조는 李命遜(호-湖山, 영종대)인데 나주 동강면 장동에서 세거하다가 처가가 대치리여서 처가를 가다가 이곳의 풍광이 좋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공은 일찍이 공명을 포기하고 湖山의 농경을 탐하여 아침에 옥산의 고사리를 캐고 저물 때 몽탄강 가에서 고기를 잡아 말년의 즐거움을 이루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현재에도 정씨가 가장 많고 이씨, 안씨 등이 함께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박곡면 간기곡리 신기리 사천리 죽림리 묵방리 우적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사천리 죽림동 간기곡 매곡리 월천리 우적동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사천리 만복동 사천 봉서동 우적동 등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사천리는 모래내[沙川里]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천리 관련 자료들을 조사해 보니 빗기내 즉 斜川里로 써야 맞는 표기다. 현재의 沙川里란 표기는 일제강점기 때 바뀌어진 명칭으로 볼 수 있다.
행정구역 변경
斜川里는 몽탄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만복동과 봉서동 앞으로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림동, 간기곡리, 매곡리, 월천, 우적동 등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만복동, 사내, 봉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1969년에 축조된 사천저수지는 지금까지 딱 한번 물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20여년 전 제방의 보수공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아무리 가물러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할 정도로 풍부한 수자원을 갖추고 있다.
사천저수지는 68년부터 하천을 막아서 만들었다. 만들 당시 300mm의 비를 기준으로 만들어서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우적동 마을회관을 관광객들에게 대여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지어서 이내수 신부 묘역 등을 찾는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몽탄초등학교가 생기기 전에 다녔던 간이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이를 바탕으로 생산된 죽제품은 담양의 죽제품과 견줄만한 물량과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으며 베짜는공장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빗자루, 바구니 등을 기차와 화물차로 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사천저수지 주변에 동굴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마을 쪽에서는 범바위라 하는데 대치리나 내리 쪽에서는 상여바위라 부른다. 왜냐하면 사내 마을에서는 이 바위 때문에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 해서 범바위라 이름 하였는데, 대치리 마을에서는 호랑이의 피해가 심해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 상여가 자꾸 나가기 때문에 상여바위라 했다.
저수지 주변에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는데 통나무로 고인돌을 옮겨 몽탄 성당에 옮겨 놨다. 당시 고인돌을 옮기면서 많은 생활도구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20톤 크레인을 불렀으나 옮기는데 실패하여, 25톤 크레인을 다시 불러서 옮겼다고 한다.(정재용 씨)
그러나 성당에서 공사를 하면서 파손하여 없어졌다.
지금은 밭 주인이 없애버렸지만 돛밧골로 불리는 촛대 모양의 바위가 저수지 주변에 있었다. 예전에 배가 마을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배들이 밧줄을 매었다는 바위다. 또한 저수지 밑에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동/식물
마을회관 앞에 무우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다. 할아버지 당산으로 부르는 나무는 회관 위쪽에 있는데 둘레가 4미터 80이 넘으며 회관 바로 앞에 있는 할머니 당산은 樹形이 잘 잡혀 있고 둘레도 5미터가 넘는다. 두 그루 모두 입향조가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99개의 골이 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많은 골짜기의 이름이 남아 있다. 초장골, 백정골(百井골), 민대골(빈대골이라고도 함-절이 있었다), 서당골, 농바우골, 분사골, 세정골, 장자등, 초안이골(남생이가 많이 살았다), 문수봉, 감투봉, 간대골(길어서), 맵새재, 빈대골(일제시대 금광이 있다), 성적골, 작은 성적골, 대밭안골, 비아골, 새앙골, 오가정골, 감나무골, 구렁골, 한새봉 등이다. 또한 죽림에서 청계면 태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구릿재, 사내에서 청계면 태봉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꽂쟁이, 마을 뒤에 있는 매봉산, 마을에서 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적치 등이 있다.
또한 돗받거리라는 지명도 불리고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회관 앞에는 1957년에 세운 나주 정씨 효자각인 삼효비각이 있다. 나주 정씨의 세 효자를 위해 세운 비각으로서 정석하와 그의 두 손자인 병도와 병익의 효행을 기린 비각이다. 정석하는 아버지의 병환을 구하기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에게 넣어드려 수일간의 생명을 연장시켰고 손자인 병도, 병익 두 형제도 부모님이 병환 시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간호하는 등 효도와 우애하는 정이 지극하였다.
정대현, 초대 몽탄 면장이 지었다. (봉서동에 집이 남아있다.)
이 비각의 追感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세 효자의 사연을 적어놓은 삼효비각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특이한 사항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현판의 글씨만이 아니라 비문도 모두 소전 손재형 선생의 글씨이다. 소전 선생의 글씨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 목포 神社에 있었던 석등이 두 개나 원형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기도 하다. 원래는 사자상도 두 개가 있었다고 하나 근래에 도둑 맞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세 개의 재각이 있다. 나주 정씨의 재각인 술선재(1923년 건립, 6개의 현판)와 수재정(1939년 건립, 두 개의 현판)이 있으며 인동장씨의 재각인 오가정(1936년 중건, 7개의 현판)이 있다.
마을 입구에 1987년에 세운 효열부달성배씨기행비가 서있다.
주변에 가마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변에서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설화
범바위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우적동에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한국사제로서 서열 6번째 신부인 이내수의 묘가 있는 것이다. 전라도 최초의 신부이기도 하였던 이내수(아우구스티노)신부는 1862년 전주에서 출생하여 1879년에 블랑신부에게서 예비신학생으로 선발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고, 말레이의 신학교를 다니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해, 1897년에 서품을 받았는데 한국사제로써는 6번째였다.
※ 이내수 신부의 서품이 6번째이기도 하고 4번째이기도 하다. 4, 5, 6번째 신부님이 동시에 서품을 받았지만 나이 순서로 인해 6번째에 받으셨다고 한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대밭 앞골 (안우적동)이라 불리는 곳에서 탈옥했던 사람들이 많이 처형당했다. 대나무 산업이 번창하다가 이 사건 이후로 산업이 쇠락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조선시대 무안에서 물이 좋은 곳을 나타낼 때 1위는 옥동(현재 함평군 학교면 상옥리), 2위는 사천, 3위는 오갈치로 말할 정도로 물이 많았다. 마을 주변에 99개의 고랑이 있다 할 만큼 계곡이 많아 수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969년에 축조된 사천저수지는 지금까지 딱 한번 물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20여년 전 제방의 보수공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아무리 가물러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할 정도로 풍부한 수자원을 갖추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이내수 신부 묘역의 공원화 사업이 진행중이다.
또한 캠프밸리(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이전)가 자리 잡고 있다. 몽탄면 그리고 마을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등 마을 기여가 크다. 최근에는 직원 연수원을 만들어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에도 주목 받은 고을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많았고 산세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다. 해서 일본인들이 이 마을에서 그들의 홍보 영화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두 개의 사찰도 있다. 선혜정사와 관음사가 그것인데 선혜정사는 근래에 지었지만 관음사는 한국전쟁 이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