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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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곡1리 몽탄면 박실마을 작성
  • 박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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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박실, 개라울, 박울매
지명유래
藥谷里는 약초가 많이 나오는 골짜기라는 의미의 약곡이라 하였다. 박실은 지형에서 관련된 지명이다. 약곡리의 지형은 호로병처럼 생긴 모습으로 좁은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터가 나온다. 마치 호박과 같은 종류로 박덩굴과의 표주박의 모습처럼 생긴 것이다. 해서 표주박의 모습을 띤 골짜기가 박곡이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金載振(자-行敏, 1609-1670)이다. 그는 영광 불갑에서 세거하였으나 병자호란 등 당시의 혼란을 피하여 이곳 박곡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류에 흔들리지 아니하며 덕을 기르니 주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약실마을의 입향조인 박무원보다 더 먼저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이 마을은 원래 천씨가 살았다 하나 지금은 한 가구도 없고 김해김씨를 비롯한 복합성씨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아랫마을인 박실마을은 김해 김씨, 웃마을인 약실마을은 무안 박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박곡면 약곡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구박곡 약곡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약곡리 구박곡 약곡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약곡리 약식 박실로 표기된다.
행정구역 변경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박곡, 언동 일부를 병합하여 약곡리라 해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원래는 한 행정구역이었으나 2005년도에 두 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박실과 약실로 이루어졌다. 서로 다른 성씨 마을 간의 마찰이 있어 분구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변 송전탑 공사를 할 때, 모래 등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산으로 나르고 나면 무게와 크기에 따라 표딱지를 받을 수 있었다. 표딱지로 과자를 사먹었던 기억(초등시절)이 있다고 한다. 83-84년 소파동 때 많은 마을 분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졌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깡샘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정월이면 이 샘물을 가져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주민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유행을 타고 무늬 동백을 특산품으로 시도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는 성적골을 중심으로 맥반석이 깔린 산이 있다. 해서 물을 아무리 오래 두어도 이끼가 끼지 않으며 지하수를 나르는 파이프가 10년이 넘어도 녹이 슬지 않는다. 수질검사에서 최고등급을 받음은 물론 목포나 광주 등지에서 일부러 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많다. 게르마늄 암반층으로 약수가 나온다. 경작을 위해 땅을 깊게 파면 뻘이 나오기도 한다.
동/식물
마을 입구는 길 위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여겨지는 당산나무 세 그루가 있다. 큰 것은 둘레가 4미터 50이 넘기도 한다. 그 중 한 나무는 이미 고목이 되었으나 다시 가지에 새순이 돋고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들에 대해서 애정이 각별하다.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는 주민들이 나들이 할 때마다 당산나무 앞에서 손을 모아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했던 신앙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 나무 아래에서 논을 경작하던 주민이 이 나무 그늘을 없애기 위해 가지를 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일이 있기도 하였다. 산에 자생약초가 많이 자란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감남골 옆의 숯구뎅이는 골짜기에 불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라울은 佳也月 또는 月桂라고 불렸으며 좁싸리 고랑이라고도 했으며 얼마 전까지 여우가 잡히기도 하였다. 현재 약곡정이 있는 골짜기를 새터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의 골짜기는 성적골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남산골 방아골 풍덕골 솔학골[松鶴洞]로 이어진다. 현재 풍덕골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무덤등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솔학골에는 장사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는 장사의 손 자국으로 알려진 흔적들이 두 군데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제는 예전에 지내오다 지금은 사라졌다.
유물, 유적
감남골 밑에 정면 4칸 팔작지붕의 나주오씨 제각이 있다. 마을에 나주 오씨는 한가구도 살지 않으나 예전 나주 오씨가 세도를 부릴 때 맞춤했던 땅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마을 주변에 오씨 소유의 산들이 많다. 또한 일반 가옥처럼 생긴 김해김씨 제각도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맥반석 개발 업체가 마을로 들어오려 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반대하여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 탐정하고 샘플조사를 진행하였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원래 현재의 다리 형태가 아니었는데 마을 분들이 기존 안을 반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한 달이 넘게 마을 분들이 시위를 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에는 보행기가 없다. 주민들 중 상당수가 80이 넘은 노인인데도 지팡이는 물론 보행기에 의지 않고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깨끗한 주위환경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단연코 물 때문이다. 이 마을 앞에는 성적골을 중심으로 맥반석이 깔린 산이 있다. 해서 물을 아무리 오래 두어도 이끼가 끼지 않으며 지하수를 나르는 파이프가 10년이 넘어도 녹이 슬지 않는다. 수질검사에서 최고등급을 받음은 물론 목포나 광주 등지에서 일부러 물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많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고속철도 공사로 인해 개라울 지역민들 안쪽 마을로 이주하였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마을과 떨어져 있어 소음피해가 크지는 않다.
주민요구사항
분구 당시 인구수를 맞추기 위해 박실마을 사람이 약실마을로 포함되는 경우가 있었다. 올바르게 재조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약실마을에 한옥마을을 조성할 당시 자부담 4천/대출 4천/지원금 4천의 조건으로 만들어졌다. 박준영 도지사 시절의 이야기이다. 약실마을에 온천수 개발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기타사항
약곡 교회는 1935년 광주 양림 교회의 진공례 전도부인이 세웠다. 처음엔 명산 마을에서 포교활동을 했으나 주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이 마을에 들어와 전도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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