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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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장2리 몽탄면 월산마을 작성
  • 월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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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60년대에 70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28가구 30여명이 살고 계신다. 빈집이 7채에 이르고 5채는 무너져내리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월산은 양장2리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달을 닮았는데 들어선 집들이 마치 山의 형태로 자리를 잡아 월산이라 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양지촌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형이 배[梨] 모양 같으면서도 달처럼 생겼다 하여 월산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풍천임씨와 나주정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풍천 임씨의 입향조는 임귀손(자-천보. ? - 1569)이다. 공은 이조정랑을 역임한 선비였으며 일로 복룡리 용호 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주 하였다. 공은 금남 최부(1454-1504)선생과 사돈간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묘비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찬하였다. 원래 이 마을 풍천임씨들의 선대는 황해도 풍천에서 살았으나 갑자사화의 주동 인물인 임사홍(1445-1506)이 참화를 당하면서 이를 피해 경기도 연천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공의 아버지인 임득영(자-美汝, 호-호은. 1507-1551) 때 일로 복룡리 용호로 이주하였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임득영을 입향조로 보았으나 그의 아들이 용호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겨 정착한 것이다. 또한 선조들이 세 번이나 거주지를 옮겼다 하여 후손들이 삼천재라는 제각을 지어 조상들의 뜻을 새겼다. 마을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나주鄭氏의 입향조는 정예중(자-덕효. 1692 - 1724)이다. 공은 원래 몽탄면 학산리 구리에서 살았으나 동생인 지중(자-덕성, 1694 - 1730)의 초청으로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동생은 이 마을의 풍천임씨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살이를 하다 이 마을의 풍광이 좋아 형을 불러 들였던 것이다. 청계면 서호리 정씨들과 인척간이다. 대체로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풍천임씨들이 동쪽에는 나주정씨들이 자리를 잡아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도림산과 양지촌 마을은 장군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입향조의 나주丁씨 마을이다. 월산 마을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나주鄭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본래 무안군 박곡면에 속 했던 곳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월산리 청계리 양지촌 도림산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양지촌과 비장동의 이름자를 따서 양장리라 했으며 도림산 월산 양지촌 등 3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은 농지가 적어 산을 개간해서 만든 다랑이 논이 많았다. 산골배미라고도 부르는데 물이 좋아 앞산의 능선까지 논을 경작할 수 있었다. 주민 중 한 사람은 아흔아홉 배미를 벌 정도로 많은 다랑이 논을 경작하기도 했다. 삿갓배미도 있는데 삿갓을 놓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적은 다랑이 논을 말할 때 부르는 이름이다. 이러한 다랑이 논들이 지금은 경작할 사람이 없어 거의 버려져 있다. 마을에는 삿갓배미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역의 위치상 행정은 몽탄 소속이지만 생활권은 일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전에 가산재를 넘어서 일로장으로 다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다랑이 논이 많았으나 1990년대 경지정리와 이후 묵전이 되었다. 현재는 숲이 되어 사라졌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가산재 밑에 정씨들이 즐겨 찾았던 독샘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메워버렸다. 임씨들은 큰샘 정씨들은 독샘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큰샘은 90년도 이전까지 사용했으나 경지정리하면서 없어졌다.
전통식품/특산품
양장리가 양파 농사의 원조였다고 한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매봉산(봉명리 중흥동 마을에서는 무재봉이라 부른다)을 주산으로 하고 무재봉을 안산으로 했으며 마을 뒤에는 비알등(도림산 마을에서는 송장등으로 보고 있다)이라는 능선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을 주변에 2개의 무재봉이 있는데 이 마을 주민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은 매봉산에 있는 무재봉이다. 일로읍과 경계에 있다. 다랑이 논은 물이 흐르는 지형 그대로 조성되었다. 그래서 1평 또는 반평도 되지 않는 논도 있었다.
동/식물
3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와 둔덕들을 꼼꼼이 살펴보면 장군봉 무재봉 가산재 사토골(조타골) 서당매 푸르매 산골 중굴재 매봉 비알등 소쟁이 구수배미 솔대배미 밤실 가재미 그리고 양지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소뭇재 등의 지명이 있다. 현재의 농공단지를 예전에는 장문재라 하였다. 도림산 마을에서 장문재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다리가 원래의 파군다리였다. 또한 도림산 마을에서 약곡리로 넘어가는 봉우리가 장군봉이다. 무재봉은 일로지역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며 가산재는 예전 일로 삼향 목포 지역의 사람들이 함평이나 한양을 갈 때 다녔던 길이다. 가산재는 동학농민혁명 때 고막원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들이 피난하러 내려오다가 토벌군과 맞서 싸웠던 곳이어서 주민들은 가산난리로 기억하고 있었다. 중굴재는 마을에서 봉명리 중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마을의 주산인 매봉은 봉정산의 맥을 이어받고 있다. 소쟁이는 도림산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를 말하며 지형이 소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쟁이 밑에 있는 곳이 소의 밥통을 상징하는 구수배미다. 이어 방죽 둑에 임씨 선대가 진사시에 등과해서 기념한 솔대배미가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서당매에 풍천임씨 제각인 삼천재가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1934년에 현재의 구조로 중건한 것이다. 삼문이 있으며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임씨들이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후손들을 교육한 곳이다. 제각 뒤에 임씨들 선대의 묘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최익현 선생이 찬한 입향조의 비석이 있었는데 후손들이 내려다 묻어버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묘가 있는 곳이 복치혈이어서 석물을 하면 후손들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지로 주민들 말을 들어보면 비를 치우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화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비석을 묻어 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을 앞 삼천재 가는 들머리에 독배기가 있다. 나주 정씨 묘들이 있는데 고인돌 4기가 묻혀 있었다. 그중 큰 것의 길이가 210×450㎝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 기왓조각 등 생활도구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굴재에는 20여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밭을 경작하면서 돌들을 묻어버려 지금은 없다. 목포대학교의 자료에는 이 마을에서 고분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파군다리는 본래 목재로 된 나무다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고기도 잡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다리는 50년 넘어서 시멘트로 조성한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이 근면하고 온순하여 마을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풋마늘을 많이 재배하며 축사가 많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최근 들어 도둑이 많아 졌다. CCTV가 설치되면 좋겠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정씨 제각은 청계 서호리와 함평 삼정리에 있다. 서호리 제각에서는 11대까지 모시고 12대 위로는 삼정리에서 모신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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