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는 마을이 영산강 가에 늘어져 있다 해서 불려진 이름인데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이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어오지(於吾地)라 하는데 주민들은 늘어지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어오지라는 말보다 늘어지라는 이름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 늘어지가 아닌 느러지라 불러야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을 분들이 많았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확하지가 않다. 배뫼에서 살던 나주 임씨들이 농지를 찾아 이곳에 하나 둘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기 때문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쪽박골은 유명한 무덤터라고 한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나주 임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타성이 많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이호리 당촌 강정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이호동 강정리 당촌 어오지리 등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이산리 어오지 강정리 이호동 당촌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이산리 이산 당촌 어오지 로 나온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부터는 어오지리로 나온다. 운남면의 양곡마을도 어오지라 불렀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는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어오리 강정리 정호동 당촌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32년 박곡면에, 1939년 몽탄면에 속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풍요롭고 여유가 넘쳐 보이는 이 마을도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무안에서 가장 늦게 모내기를 마칠 정도로 하늘만 바라보는 농사를 지었다. 즉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군내에선 제일 빈촌에 속했다. ‘몽탄의 북만주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척박한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마을 앞을 막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강물이 들어왔다. 농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고 농지가 늘어나고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주민들의 살림이 펴지고 현재는 생활보호대상자가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생활의 여유를 갖고 살고 있다.
영산포로 들어가는 배가 썰물 때 머물렀다 가는 나루였다. 그 당시 인근 나루들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요시설
장구부에 몽탄초등학교 이산리 분교가 있기도 했었다.
1~3학년까지만 다니고 4학년부터는 중앙교로 가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범바위 주변에는 60년대까지 영산강 나루 중에서도 꽤 크다고 분류되는 나루가 있었다. 나주의 동강, 공산 면의 사람들이 철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 나루를 이용해야 했고 무안 사람이 나주를 가기 위해서도 이용했던 나루이다. 특히 서울이나 제주, 그리고 부산에서 오는 배가 영산포까지 갈 때, 썰물일 때는 이 나루에서 머물렀다가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사대강 사업 당시 조성된 야구장이 느러지에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맛, 농게, 숭어, 장어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을 보면 마치 한반도의 지형을 보는 것 같다.
범바위는 마을의 주산인 신선봉이 연징산 줄기를 따라 힘차게 나주를 향해 달려가다가 영산강물에 막혀서 우뚝 서 버린 바위를 말한다. 옆에서는 제 모습이 보이지 않으나 강 건너 나주에서 보면 범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아들바위라는 바위가 있었다. 몽탄에서 강정포구를 지나 당재를 넘어서면 마을로 오는 길로 들어선다. 새석골(새집 명당이 있다는 골짜기)을 거쳐서 아들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길이 나면서 없어졌다. 아들바위에서 조금 가면 조그만 포구였던 가새가 나온다. 물론 이곳도 흔적만 남았다.
늘어지(한반도 모양)와 관련하여 김성남 현 이장님이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 관광지로서의 가능성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20여년전 SBS 뉴스왕 프로그램)
영산강을 곡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모든 것을 배로 실어 나를 수밖에 없었다.
영산강을 막으면서 살아있는 뻘이 사라졌다.
※ 느러지가 예전에는 더욱 한반도 모양에 가까웠지만 느러지에 퇴적작용이 일어나며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늘어지, 뒤구지라는 토속적인 마을명이 지금도 널리 불려지고 있다.
마을에서 위로 조금 올라가면 영산강을 曲江이라고도 부르게 만든 새 乙자의 굴곡진 형상을 한 곳이 있다. 이른바 장구부라 부르는 곳이다. 長丘(久)阜는 마을 왼쪽의 봉우리인 조리봉에서 뻗어 내려온 줄기가 둥글게 활처럼 휘어진 형상으로 언덕을 이루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예전에는 12가구까지 이곳에서 살았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뒤구지에는 예전에 관광농원과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 오리탕 집이 들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펜션이 들어서 있다. 펜션이 들어서 있는 곳은 ‘이슨 밭고랑’이라 불려진 곳이며 그곳에는 암자가 있었다 한다. 암자가 있었던 곳의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이슨 바위(밭과 밭 사이를 잇는 다는 의미)라 불렸으며 바위 밑으로 나는 물은 이 지역에서 드물게 보이는 약수라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절터 큰절골 작은절골 조팝골 새마등 조리봉 가마등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 마을에서 상(喪)을 만나면 객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전부 휴가나 틈을 내어 내려와 상여를 매고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물론 초상도 장례식장이 아닌 마을에서 치른다.
앞으로 새로운 축제나 문화 행사가 가능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느러지, 최부묘 등은 새로운 문화 행사를 만들어 내는데 충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아들바위는 오직 아들만 바라보고 살던 한 할머니가 고기 잡으러 갔던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바위에 올라 아들을 기다리며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의 강변(관광)도로가 나기 전, 길이 산비탈의 오솔길로 나 있을 때 오가면서 돌을 던져 이 바위를 맞히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사연을 안고 있다. 해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집집마다 10남매, 9남매 등 자녀들을 많이 낳아 한때는 인근에서 부러워하는 다복한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마을회관 앞 길 건너에는 ‘표해록’을 지었던 금남 최부 父子의 묘와 사당이 있다. 최부(자-연연, 호-금남. 1454-1504)는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왕의 명을 받고 제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을 거쳐 6개월 만에 돌아온 사람이다. 돌아와서 왕의 명으로 표류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엮어서 내놓으니 그것이 유명한 중국 견문록인 ‘표해록(漂海錄)’이다. 표해록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 기후, 산천, 도로, 관부, 풍속, 민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특히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후일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이를 사용해 해갈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한다.
후에 임금이 최부의 공을 높이 사 최부에게 소원을 물으니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임종도 치르지 못한 저의 선친을 편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은 곧 國地官을 보내 전국의 좋은 터를 알아보게 했다. 국지관이 남도의 여러 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왔는데 마침 명당으로 보이는 지점이 있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때는 동지섣달인데도 칡꽃[葛花]이 피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이른바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葛花浮水의 형국이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묘가 마을 뒷산인 천마봉의 기슭에 있는 이곳이다. 얼마 전까지 묘 앞에는 방죽이 있어 葛花浮水의 명당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부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옮겨 쓸 때는 나주, 함평, 무안의 세 고을에서 선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묘의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묘를 보면 지금도 봉분이 큰데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지금보다 배가 더 컸다고 한다. 또한 앞에 있는 문인석의 석상은 주변에선 보기 어려운 크기와 모습을 하고 있어 관심이 간다. 아래에는 단기 4282년(1959년)에 해남에서 옮겨온 최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천마봉의 또 다른 줄기인 조리봉엔 漁翁垂釣(어옹수조-노인이 물가에 앉아 낚시로 고기를 낚아 들이는 형국)의 명당이 있는데 나주 임씨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금남선생의 후예들이 청계면 복용리 용수동 마을에 살고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최부묘에 있는 장승을 도벌꾼들이 파러 왔다가 너무 깊게 묻혀 있어 그냥 도망간 사건이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오덕교 군수 시절, 마을길에 아스콘 포장을 가장 먼저 했던 마을이다.
마을 인근에 대형 축사가 없어 깨끗한 청정마을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4대강 사업으로 늘어지에 있던 농토가 모두 사라졌다. 4대강 사업 기간에 야구장이 조성되었다.
영산강 개발과 지하수 개발 등으로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생활의 여유를 가져왔다. 물론 옥토를 얻게 되었지만 어업은 소멸했다. (영산강 하구언 + 사대강 사업 등)
영산강변도로가 마을 뒤 산을 지나서 가기를 원했지만 풍수적인 요소와 예산문제로 마을 앞을 가로지르게 만들어졌다.
주민요구사항
마을 이름을 느러지로 고쳐야 한다. 또한 나주 전망대 이름에서 ‘느러지’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 (예, 몽탄 한반도 지형 전망대)
두 지명을 혼동하여 잘못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마을로 오는 손님이 나주로 가는 경우도 많다.
백두산의 위치에서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게 천마봉에 전망대를 세워야 한다. 우릴 몽탄의 관광자원을 나주에 빼앗길 수는 없다.
금남 최부 묘에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휴게실 화장실 등의 공간이 필요하다.
느러지부터 식영정을 거쳐 석정포까지 데크길을 활용해 관광자원화 해야 한다.
마을에서 보유하고 있던 느러지 사진을 면사무소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복귀를 희망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최부의 후손들이 청계면 복용리 용수동 마을에 살고 있다.
중국의 최부 축제에 최씨 문중의 회장단을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한다. 왕인박사 축제보다 규모가 크다. 이것은 최부라는 인물의 가치를 반영하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