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오갈치 마을은 오갈재 안에 있는 마을로 주민들이 누룩쟁이라 부르는 산을 돌아서 자리 잡고 있다. 깊숙하게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원래 세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가 있어 三松村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마을 지하로는 호남선고속철도가 지나가 수맥이 끊기는 등 자연환경이 바뀌자 점차 시들어 모두 죽어버리고 그 자리에는 대신 구수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지나고 있는 고속도로에 방음벽이 설치되지 않아 소음 공해가 심하다.
回龍亭 마을은 811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脈을 龍으로 봤는데 마치 용이 돌아오는 형세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러나 마을 아래에 왕건과 견훤이 한 시대를 놓고 싸웠던 두대산과 파군교가 있어 다른 시각으로 회룡정의 마을 이름을 보는 시각도 있다.
아래뜸은 비선동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안오갈치 마을의 아래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大敎村은 근래에 붙여진 지명으로 원래는 큰 절골과 작은 절골이 있었다. 또한 절골 너머에 서당골이 있어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당골은 수자원공사가 들어오면서 메워졌다.
烏渴峙의 지명은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까마귀 명당을 뜻하는 ‘渴烏啄屍(갈오탁시-목마른 까마귀가 시체를 쪼는 형국)’의 지형으로 보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형국의 명당에 대응하는 시금골[屍禽谷]이라는 지명이 마을 아래에 있다. 해서 목마른 까마귀가 시금골의 시체를 쪼아먹는 형국이다.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금오탁시(金烏啄屍)의 형국이다. 이는 까마귀가 앞에 있는 시체를 쪼아 먹으려는 형국을 말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아직 혈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 온 성씨는 무안읍 평월에서 분가한 영성정씨 정덕민의 아들 정흥열(자-여즙. 1631 - ?)이며 그 후에 이천서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무안읍 평다리에서 살던 정덕민이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부인 광산김씨와 함께 이곳에 옮겨 와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푸른용이 헤엄치고 돌아왔다.
마을성씨
처음 들어온 영성정씨들이 안오갈치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현재의 4개 마을로 분화되어 발전하였다.
현재는 영성정씨, 김해김씨, 이천서씨, 박씨, 오씨 등 오합지졸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이 지역은 무안군 박곡면의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회룡정, 오갈치, 당호동, 청계동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청룡리란 지명은 청계동과 회룡정의 이름을 따서 조합한 지명이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박곡면 사동리 파군교리 오갈치리 청동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청계리 오갈치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청용리 회룡정 오갈치 당호동 청계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청용리 오갈치 회룡정 파군교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 마을 앞의 길은 일로나 삼향에 사는 사람들이 한양을 간다거나 함평장에 갈 때 다니던 길이었다. 하지만 계곡이 깊고 마을 주변의 산세가 험해 도둑들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많아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길이기도 하였다.
벼농사와 보리농사를 주로 한다.
주요시설
목포사람들의 식수를 제공하기 위한 수자원공사 시설이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곳에는 깊숙한 계곡의 마을답게 열세 개의 골짜기[谷]와 네 개의 재[峙]가 있다. 큰 절골, 작은 절골, 서당골, 큰골, 위골, 덤덤골, 초분골, 넘언골, 그만저골, 할매골, 안골, 방아골, 신골 등이 열세 개 골짜기이다. 네 개의 재는 큰 오갈재, 작은 오갈재, 솔개재, 함정재가 있다.
이 마을에는 파군교와 함께 후삼국 시대 왕건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두대산이 있다. 두대산은 회룡정 마을 아래에 있으며 당호저수지를 접하고 있다. 당시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왕건이 견훤을 격파하기 위해 두대산을 노적봉처럼 꾸미고 영산강으로 흐르는 물에는 밀가루를 풀어 마치 수많은 군사가 숨어있는 것처럼 보여 견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두대산 설화의 대상은 왕건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구와 관련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서당골은 지금의 수자원공사 대불정수장 자리로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수장 입구에 세워진 수성최씨 세장비의 뒷면에는 특이한 글이 쓰여 있다. 내용은 ‘수성최씨 문중의 사람이나 차량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음을 보장한다.’라는 글이다. 큰골엔 물이 많아 예전부터 물줄기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신골은 시금골로 불리기도 하는데 회룡정 마을 아래에 있으며 땅이 기름지다. 시금골 위에는 까마귀의 머리에 해당하는 둔덕이 있다. 또한 파군교에서 몽탄과 나주 동강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신골모퉁이라 한다.
방아골은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드들방아 형상으로 그곳에 우물이 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그 우물로 목욕을 하고 합방을 하면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많았으며 골짜기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져 찾기가 힘들다.
덤덤골은 그곳에 있는 샘물의 맛이 덤덤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나병환자들이 그 물로 몸을 씻으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효험이 좋은 약수터였다. 또한 소들이 그 물을 먹으면 축 늘어진 소도 금방 일어설 수 있을 만큼 특효가 있다고 한다. 특히 그 골짜기에서 밭을 경작하는 사람이 작물을 심기 위해 밭을 파는데 옛날의 주거지로 여길수 있는 여러 군데의 화덕과 기물들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솔개재는 회룡정에서 명산리 도산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으로 매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재이다. 함정재는 오래 전에 왜적이 이 마을에 들어 와 약탈을 하다 관군에게 들킨 일이 있었다. 왜구들은 남과 북쪽의 큰오갈재와 작은오갈재로는 숲이 우거져 갈 수가 없었고 동쪽인 솔개재 너머에는 영산강이 막고 있어 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쪽으로 도망간 왜구들은 안심하고 넘다가 관군들이 쳐 놓은 함정에 빠져 붙잡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이 고개를 함정재라 불렀다고 한다.
회룡정 마을 뒤에 굴뜸이라는 지명이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옹기를 구울 때 굴뚝에서 연기가 많이 나 굴둑이라 불렀던 말이 와전되어 불려지는 지명이다. 회룡정 남쪽에 금구덩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신골에 있는 논을 샘배미 그리고 샘배미 아래에 있는 논을 멍에처럼 생겼다 해서 멍에배미라고 불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회룡정 마을 옆에는 1930년대에 지은 언동 마을의 수성최씨의 제각인 영모재가 있다. 정면 3칸 팔작지붕의 형태로 안에는 현판이 5개나 걸려있다. 이 제각의 후손들은 고시패스 등 잘 된 사람이 많다.
또한 안오갈치 마을의 꽃밭등이라 부르는 곳에는 영성 정씨의 제각인 사효재가 있다. 194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세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199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안오갈치 마을입구 주변의 경작지에서 회색경질토기편과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의 유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전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산업통상부 서기관, 변호사, 의사, 농학박사, 한전 나주 부사장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오래 전에 회룡정 마을 뒤 정지재라 부르는 곳에서 토취 작업이 진행되었다. 영산강 주변의 둑을 높이는데 사용했던 흙을 채취하는데 주변 마을이 피해를 많이 봤다. 특히 이 재의 맥을 직접 이어받은 언동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재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계곡이 깊어 물이 좋다. 오갈재 안에 200여 두락의 논이 있는데 저수지가 없어도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다.
마을 분들이 단합이 잘되고 정이 많다.
귀농, 귀촌하신 4가구도 마을과 잘 어울린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마을 지하(오갈치 밑)에는 호남선 고속철도가 지나가 수맥이 끊기고 자연 환경이 바뀌어 주민들이 매우 불편하다. 방음벽 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 소음공해가 매우 심각하다. 특히 안오갈치 마을은 밤에 발생되는 소음으로 잠을 자기 어려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