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라는 지명은 학산리 전체적인 지형을 바탕으로 한 풍수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마을 뒷산인 신선봉 옥녀봉 대포리봉 그리고 앞산인 잉어산으로 이어지는 맥은 마치 하늘의 선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인 옥녀직금형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지명도 이렇게 추정하는데 한몫을 했다. 즉 신선봉이 베틀이며 마을 앞 잉어산이 잉앳대(뒤로는 눈썹줄에 대고 아래로는 잉아를 걸어놓은 나무)이며 구리 마을을 꾸리(북 안에 들어 있는 실)라 했다. 또한 마을 입구를 챗등이라 했는데 이 또한 베틀의 한 부분명칭이다. 해서 주변의 주민들은 꾸리라 불렀는데 이는 명주꾸리 실꾸리에서 비롯된 말로 베를 짜는데 필요한 실을 말한다. 후일 꾸리 마을이 한자로 정착하면서 현재의 구리 마을이 되었다.
구리 마을에 이어서 형성된 마을은 산음이다. 마을 이름이 특이해 지명의 유래를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분이 없었다.
後洞마을은 뒷골 또는 뒤꼬라실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이 마을의 이름도 지형에서 비롯된 말로 영산강이 주된 통행로였던 예전에는 산음 마을 뒤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마을형성(입향조)
九里 마을은 세 마을 중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는데 도강김씨 청주한씨 전주이씨의 三姓이 임진왜란을 피해 정착하면서 이루어졌다.
산음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김해김씨로 나주 복룡에서 난을 피해 왔다는 것 외에는 자세하지 않다. 김해김씨와 같은 무렵에 장흥고씨 고몽길이 장성 삼서 관서당에서 살다가 구리에 사는 도강김씨 金 亨의 딸과 혼인하여 정착하였다. 현재는 5가구만 살고 있다.
후동마을은 산음 마을에 터를 잡았던 김해김씨와 장흥고씨들의 후손이 분가를 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졌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입향조는 고정엽과 김상영이며 1810년경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 마을 중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나 마을 옆으로 지방도로가 나면서 구리와 산음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와 현재는 학산2리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뒷산인 신선봉 옥녀봉 대포리봉 그리고 앞산인 잉어산으로 이어지는 맥은 마치 하늘의 선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인 옥녀직금형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마을성씨
산음은 장흥 고씨, 제주 고씨가 많이 살았고
후동에는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곳은 본래 석진면 지역으로 1789년 호구총수에는 仙巖리 山陰리 鳩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鶴동 仙岩리 鶴仙동 丑岩동 山陰리 九리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학산리 학동과 신학동 그리고 산음 구리 후동이 나온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선암리 산음리 구리 마을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선암리 학선동 구리 산음리 등이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학산리 산음리 구리 학동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음리, 구리, 학동을 합해 학동과 산음리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불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32년에 석곡면(현 몽탄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구리, 산음, 후동이 차례로 2구,3구,4구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구리마을은 영산강 가에 있어 해상교통이 활발했을 때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산음마을은 교통과 연료 등 많은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으나 물이 귀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근으로 이주하였다. 산음이 큰 마을이었으나 물이 없어서 후동으로 넘어와서 지금은 후동이 큰 마을이 되었다.
학산리 마을은 예전에 부촌이었다. 간척지가 아닌 육답의 넓은 농지가 마을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안은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대부분이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를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은 간척이 아닌 천혜의 농장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이 마을의 죽은 송장은 무겁기도 하다고 했다.
장을 보기 위해 성암을 넘어 철소재길로 무안을 나갔다. 가마니를 짜서 이고 다니며 팔았다.
학산리 까지 몽탄북초를 다녔다. 이산분교는 느러지 사람들만을 위한 학교였다.
몽탄역을 이용해 기차로 도시에 나갔다. 철길이 있어서 매우 좋았다. 그러나 버스가 생기면서 기차를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부업으로 어업을 했었다. 갯물이 들어오는 시간이면 막으러 다니기도 하였다.
본래 원학산과 교류가 많지 않았으나 서로 인구가 줄어든 지금은 서로 한 마을처럼 지낸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 담배농사로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담배 농사가 마무리 될 때쯤 몇 잎은 놔두고 깨를 밑에 심어 수확하고 그 다음엔 시금치를 심어 한 땅에서 3번 수확을 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현재는 물 문제가 없어 산음으로 들어오는 외지인들이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꾸리 방죽이라 부르는 곳에는 용샘이 있다. 예전에는 연꽃이 많이 피었지만 현재는 관리 소홀로 잡초가 무성하다. 국유지 였던 이 방죽은 이석호 사건을 거치면서 현재는 농어촌공사 소유가 되었다. 이 샘은 신학산 마을이 들어서면서 지하수 개발이 이루어져 물길이 끊어졌지만 예전에는 67년 68년 大旱害 때도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던 샘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던 마을 뒤 터가 있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동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강변의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와 두 개의 저수지가 있다. 옆으로 호남선 고속철로가 지나고 있으며 신선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구리마을이 영산강 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상교통이 활발했을 때는 번성했던 마을 중 하나이나 이제는 한 가구만이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을 뒤에는 아직도 물이 콸콸 솟는 샘이 있다. 마을 옆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은 돌봉산이다.
산음마을에는 고민이 있었다. 마을에 물이 없었던 것이다. 교통이나 연료 등 다른 것은 구비되었는데 단지 물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재는 상수도 공사로 인해 어려움이 없다. 마을 앞에 귀산이 방죽이 있다.
마을 앞에는 두 개의 저수지가 있다. 후동 마을 앞에 있는 것은 구리 방죽이고 구리 마을 가는 입구에 있는 것은 학산제라 부른다.
구리 마을 뒤에 있는 봉우리가 대포리봉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봉우리의 형국이 호랑이 형으로 영산강 건너 누워있는 소를 잡으려 영산강을 건너려 했으나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 대각 마을의 소 옆에 갈기를 세우고 있는 사자를 보고는 멈춰 서 버렸다’ 한다. 지금도 그 봉우리 밑에는 멈춰버린 범바위가 있으며 강 건너 마을에는 와우 마을과 사자봉이 있다. 주민들은 이 대포리봉 주변에 명당터가 있다고 믿고 있다.
동/식물
산음 마을 앞 당산나무가 있으나 큰 보호수는 없어졌다. 당산제는 없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학산2리의 마을 이름을 따서 전해오는 노래가 있다. ‘뒤꼬라실[後洞]에서 뒤쳐서 산음에서 삶고 꾸리[鳩里]에서 꿀꺽했다.’는 노래로 주민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유물, 유적
원학산 마을에서 후동 마을로 넘어가는 중간에 효열각이 있다. 유인장흥고씨효열비가 있는 이 각은 1983년에 세웠다. 그 옆에 2001년에 세운 송암김연구효행비가 나란히 서 있다.
후동 마을 뒤에는 1985년에 세운 김해김씨 제각이 있다. 재각의 이름은 없고 정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마을 앞에는 절효각이 있다. 절효부정씨실적비가 있는 이 각은 1987년에 세웠다. 또한 후동 마을에서 산음 마을로 가는 중간에 효부각이 있다. 효부광산김씨기행비가 서 있는 이 각은 1991년에 세운 것으로 비 앞에는 돌하르방 두 기가 서 있다.
광산김씨효부각 바로 뒤에는 장흥고씨재각이 있다. 삼문인 일심문을 지나면 歸厚齋라는 재각이 나온다. 정면 4칸에 팔작지붕으로 1980년에 세웠다. 재각 안에는 6개의 현판이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구리 방죽은 이석호 사건을 거치면서 현재는 농어촌공사 소유가 되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들은 학산1리의 마을과 같이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지리적으로는 北向이어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좋은 주거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승달산의 맥을 이은 산세의 영향으로 많은 인재가 배출된 것으로 보인다.
고씨집안에 42년전에 시집오니 종가집 시숙이 “우리 집안에는 대학 나온 사람이 21명”이라고 자랑했다고 할 정도로 인물이 많았다. 문중에서 장학금을 주기도 하였다.
현 노인회장님이 젊은 시절 마을에서 벌어들인 농사 수익금등을 모아(공동생활로 100원씩 각출) 어르신들을 모시고 전국을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70년대 후반(정확하게 시기를 기억하지는 못하심) 전국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여행을 많이 다녀 집에 관광기사와 안내양이 묶을 정도였다. 동네효자로 불렸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영산강변도로 개설은 이 마을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만들 때 고씨들 땅이 많았는데 수용되어 많은 이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