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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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길 1리 청계면 복길 작성
  • 복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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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148세대, 인구수 218명(남 112, 여 96)
자연마을 구성
복길리(卜吉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있다. 동으로는 복길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해안과 인접해있으며 복길선착장이 있어서 인근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복길1리 복길마을은 서쪽 방향으로 약 1km를 더 진행하면 나오는 마을로 큰동네, 우데미, 아네미, 고래미 마을로 구성되었다.
지명유래
마을지명인 복길(卜吉)을 뱃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마을의 형국이 서해안을 향해 직선으로 쭉 뻗은 데다가 마을 옆에는 토끼섬(兎島)이 있어서 마치 한자 ‘복(卜)’ 자의 형태이므로 복길(卜吉)이라고 했다.’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로부터 ‘바다를 상대로 생업을 이어갔으므로 점술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점술을 하게 되면 마을이 흥해진다.’라고 해서 복길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에는 원래 최씨들이 살았었다고 전하나 옛 무덤인 고총(古塚)들만 있을 뿐 후손들이 없어서 확인할 수가 없다. 이후의 입향조는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이종만(李宗萬, 자-종호)으로 영광 묘량에서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 진만과 함께 일로읍 영화정으로 피신했다가 이 마을로 왔다. 공은 일찍이 집안의 가르침대로 효도와 우애를 바탕으로 생활하였으며 후손들의 학문 증진에 힘을 쏟았다. 이어서 나주정씨의 입향조 정도(鄭嶋. 호-호은)가 들어왔는데, 그는 고려후기의 문신인 정가신(鄭可臣)의 후예로 나주 금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임인무옥(壬寅誣獄, 1722년 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무고한 사건)으로 복길로 피신하였다. 공은 집안의 가르침대로 일찍이 공명을 업으로 삼았으나 불행히 화를 만나 모두 포기하고 자연에 은거하여 유유히 세상을 마쳤다. 그 외에 박씨, 함씨, 김씨 등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이 소(牛) 형국이라고 한다. 이에 마을 안 당산나무 아래에 당산샘이 있었는데, 이 샘이 있는 곳이 소의 배에 해당하여 마을에 피해를 준다고 하여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전한다.
마을성씨
이씨, 정씨, 박씨, 함씨, 김씨 등 복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서 복길리(福吉里)로 나오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현재의 지명인 청계면 복길동(卜吉洞)으로 바뀌어서 현재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는 백제시대 이래 무안군 일서방 지역이었으나 조선 후기인 1909년(고종 32년) 무안부 일서면으로 개칭했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일서면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무안군 청계면으로 개칭하여 이에 속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청계만을 끼고 있는 천혜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안고 있는 마을로 일찍이 청계면 제일의 부자마을로 알려졌다. 도시로 유학 간 대학생 등 학생 수가 다른 마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지난 2016년의 마을조사에서도 당시 기준으로 봄, 가을 두 철의 수산물 수입이 가구당 약 1,500만원에 이른다고 조사되었다. 어부들은 주로 서해안의 위쪽 바다인 칠산바다를 주어장으로 삼아 조업하는데 대체로 연중 네 차례의 고기잡이를 한다. 곡우철의 조기잡이, 망중살의 병어잡이, 소서의 민어잡이 그리고 추석 이후 가을 조기잡이 등이 그것이다. 현재는 김양식과 낙지어업을 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복길교회(1921년 설립), 복길항 등.
마을변화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마을에서는 학업에 열중하여 학문적 열기가 대단했으며, 또한 일찍이 교회가 설립되어 앞서서 개화된 마을이었다. 목회자이자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낸 이남규 선생의 고향이 복길인 점이 이를 잘 나타낸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 19일(음력)에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86명(신원 확인자 71명. 미확인 15명)의 사상자가 나와 큰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이에,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물고기를 잡으러 위험천만한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이 섬기던 제사’들도 없어지고, 지금은 주민의 약 80%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리고 또한 마을에서는 김양식 연구에 매진하여 김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의 씨앗인 포자, 지주식, 그물망(조기망), 채취시기 등을 세밀히 연구하여 재래방식을 탈피하여 김양식을 위한 현대화 기기까지 개발하여 보급하였다. 이에 다른 지역에서 찾아와 실습하기도 했다. 1986년 복길간척지 완공 후 논농사를 겸하는 반농반어의 마을이 되면서, 주민들의 단합으로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교회. 마을회관. 어민회관
전통식품/특산품
김. 낙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뒤 성적골 너머 통개라 부르는 곳에는 아무리 가문 날에도 물길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있었다. 텁석골에서는 시여샘이라고 부르는 그 샘물은 약수로 소문이 나서 나병환자들이 그 물로 목욕을 하면 낫는다거나, 앉은뱅이가 그 물로 목욕하며 바로 일어설 수 있다는 신기한 샘물이었다. 그런데 샘이 있는 토지의 소유주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샘물을 이용하기 위해 몰려들자 귀찮은 생각에 어느날 개를 죽여서 그 샘에 밀어 넣어 버렸다. 그 후로는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약효도 떨어져서 샘을 메워 버리고 지금은 농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삼면이 바다에 접한 반도형태의 복길리는 복길항, 청계만, 토끼섬, 망막산, 나리산, 복길평야는 물론 바닷가에 토끼섬을 지니고 있다. 복길항은 2005년 11월 10일 어촌 정주어항으로 지정되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 나룻길의 통로였던 ‘나룻깐’이 있으며, 산 너머에 있는 들이라 해서 ‘너먼들’, 아래쪽에 있어서 ‘아내미(교회 아래쪽에서 왼쪽으로 바다쪽)’, 위쪽에 있어서 ‘우데미(회관 뒷쪽)’, 골짜기에 있어서 ‘고래미’가 있다. 또한 토끼처럼 생긴 섬이라 해서 ‘탯섬(兎島, 토끼섬)’, 큰 산 북쪽에 있는 들을 ‘마파지’, 나룻깟 북쪽에 있는 부리를 ‘배나리 끝’이라 하며, 너먼들 아래에 있는 개를 ‘뻐다개’, 마을 북쪽에 있는 부리로 소의 머리처럼 생겨서 ‘쇠머리’, 그리고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성적골’, 마을 남쪽에 있는 들로 ‘작은 너메’, 마을에서 덥석골로 넘어가는 고개인 ‘진등개’, 마을 동남쪽에 있는 산을 ‘큰 산’이라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1987년에 교회 내에 세운 <6.25 희생자 추모비>에서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마을의 개화는 물론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복길교회의 설립은 하지만 전통적으로 행했던 지신밟기, 용왕제, 선왕신(배 신앙) 등의 마을공동행사를 미신으로 배격하게 되었다. 물론 그래도 6.25한국전쟁 전까지는 마을에 ‘당골’이 살았고, 돛배에 오색기를 꽂고 배를 건조하거나 조기잡이를 나갈 때는 시루떡을 올린 풍어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비록 어업에 종사하면서도 기독교 신자들은 이를 미신으로 치부하여 행하지 않았어도 전통 풍속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차츰 미신으로 밀려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유물, 유적
복길교회는 새로 증축을 해서 옛날 모습과는 많이 바뀌었지만, 입구 오른쪽에는 <6.25 희생자 86인의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뒷면에는 희생자 86인의 이름과 「유월아」라는 김정삼 시인의 추모시, 그리고 옆면에는 추모비를 건립한 이들이 새겨져 있다. 복길교회는 건립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무안읍의 제일교회와 일로읍 구정리교회 다음으로 세워졌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에는 인민군 7-8명이 거처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재임기간 1948. 10~1950. 4)를 역임한 이남규 선생을 배출한 마을이다. 그가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걸었듯이 이 마을의 주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는 신자이기도 하다. 이남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광주숭일학교를 졸업하며 기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1924년 일본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에 병을 얻어 귀국했다가 1938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활동하면서, 한때 목포의 장로교를 일본의 기독교단에 통폐합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일제에 의해 목사직을 해임당하며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을에 복길교회를 세웠으며 교회 옆에는 간이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쳐서 양성하였다.
거처/생가/묘소
이남규 도지사 생가.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1950년 8월 19일(음력)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86명(신원 확인자 71명과 신원미상의 15명)의 희생자를 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복길항의 아치형 수문 및 바닷가 둘레길.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해비치나루펜션, 석조대, 노을게스트하우스 안마원, 조선소, 휴펜션 외.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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