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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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길 2리 청계면 텁석골 작성
  • 텁석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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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 세대수는 44세대이며,총인구수는 77명(남47, 여 30)이다
자연마을 구성
복길리(卜吉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있다. 동으로는 복길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해안과 인접해있으며 복길선착장이 있어서 인근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복길2리 텁석골은 윗쪽에 있는 마을로 연방죽골, 질막금골, 텁석골(중앙교), 함박금골 등 네 개의 골짜기에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지명유래
텁석골이란 지명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고 전한다. 원래 바닷가라 깔따구가 많았던 해남지역 할머니가 깔따구를 치마폭에 담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다가 같은 바닷가인 이 마을에 와서 덥석 퍼버려서 텁석골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한 나그네가 청계에서 복길로 가다가 이 마을을 지나갈 무렵에 힘들어서 ‘텁석’ 주저앉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듯이 ‘텁석’이란 사전적 의미가 <갑자기, 매우, 세차게>라는 뜻으로 복길마을 외곽의 바닷바람 내지는 지형 때문이 아닌가 추정되며, 아무튼 텁석골이라는 지명은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을 준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한양조씨 조경원(자-여진, 1865 ~?)으로, 공은 청계면 상마리에서 살다가 1900년대 초에 이 마을로 건너왔는데, 선대는 진사시에 합격한 선비 집안이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앞 간척지 너머에는 야구방망이 모습을 하고 있는 둔덕이 펼쳐져 있는데, 이 맥은 승달산에서 보살봉으로 이어지는 서당뫼의 맥을 잇고 있다. 주민들이 ‘방망치 코뺑이’라고 부르는데 이웃 마을인 남성리에서는 ‘방망치’라 부른다. 주민들은 이곳에 백 명의 아들과 천 명의 손자를 본다는 길지인 ‘백자천손지지(百子千孫之地)’의 명당터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찾지 못했으며, 간척된 후로는 풍수로 본 길지의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방망치 위쪽에는 물이 들면 솥뚜껑이고 빠지면 자라목 같다는 ‘소드랑섬’이 있었는데 지금은 육지가 되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텁석골이라는 지명은 예전에는 나오지 않으며 1970년대에 인구가 증가하여 복길마을에서 분리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는 백제시대 이래 무안군 일서방 지역이었으나 조선 후기인 1909년(고종 32년) 무안부 일서면으로 개칭했다.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일서면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무안군 청계면으로 개칭하여 이에 속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풍부한 수산자원이 있는 복길1리 마을에 비해 이 마을에는 바다가 없고 대신 낮은 산이 있을 뿐이어서 논농사마저 지을 땅이 없어 매우 어려웠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앞은 바다였기 때문에 쌀이 나올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춘궁기가 되면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주변에 있는 풀을 뜯어다가 한줌의 좁쌀로 열 그릇의 밥을 만들기도 하고 고구마를 넣은 풀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복길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비로소 밥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간척지 개발로 확보된 논경지에서 논농사를 지으면서 주민들에게는 여유가 생겼고, 지금은 이에 더하여 축산업 등으로 비교적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주요시설
동명원(노숙인 재활시설, 1967년 목포 개원 후 1984년 복길마을로 이전), 복길초분교장(1963년 개교, 1994년 폐교)
마을변화
현재의 텁석골은 농업 및 축산업의 경영 등으로 비교적 경제적인 여유가 있지만, 1970년대 복길마을에서 분리될 당시만 해도 대단히 어려운 환경의 마을이었다. 1986년에 바다를 막은 복길간척지 둑은 삼향면 왕산리 금동마을과 청계면 복길리 복길마을을 잇는 제방으로 이 마을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해 준 고마운 둑이다. 마을 형성 시에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고, 농지가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이 마을은, 간척지 둑으로 형성된 간척지로 인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 옆에는 노숙인 재활시설인 동명원이 자리하고 있다. 동명원은 1967년 목포에서 부랑아 복지시설로 개원하여 1984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자리 잡았다. 마을회관 옆에는 1963년에 개교한 복길초등학교가 있으나 인구감소로 1994년에 폐교되어 방치되고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연방죽골, 질막금골, 텁석골, 함박금골 등 크게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 앞으로는 복길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으며, 간척지 너머에는 주민들이 ‘디진머리 또는 방망치 코뺑이’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또한, 마을에는 그 약효가 널리 알려진 샘이 있었는데, 복길 제방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들어오는 바닷물 가운데서도 물이 쿨쿨 솟았던 샘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마치 폭포처럼 물길이 솟아올라 인근 주민들이 그 물을 받으러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그 물이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자 마을주민들은 번거로워 싫증을 냈다. 그러다가 한 주민이 죽은 개를 물구덩이에 집어넣자 물길이 잦아들고 효험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 샘은 ‘시여샘’으로 주민들은 ‘시어지 물둠벙’이라고 하며, 복길마을에서는 통개샘으로 알려졌다. 이는 무안의 못샘-화설당샘-농공단지샘-상마정샘-그리고 이곳으로 연결되는 수맥(水脈)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샘의 수량이 얼마나 풍부한지 5인치 양수기로 온종일 물을 품어 올려도 마르지 않아, 사람들이 시여샘의 수맥을 찾으려고 주변을 파헤쳤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텁석골에서 복길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바닷바람이 불어왔던 ‘진등재’ 안에는 ‘장바닥골’이 있었고, 또한 ‘질막금’이란 곳에는 옹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었다. 그리고 금(金)과 관련된 지명도 많았다. 사금이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삭기미(砂金)’라는 곳이 마을 서남쪽의 골짜기에 있었고, 큰 금덩어리가 묻혀있다고 하여 함박골 또는 함박등이라 부르던 ‘함박금’, 그리고 금은보화가 숨어있다고 해서 ‘은금이’라고 부르는 등의 지명이 있었으며 또한, 함박금골에는 ‘돌캐’라는 지명도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큰 마을인 복길마을은 한국전쟁 때 좌우익의 갈등으로 큰 피해를 보았으나, 옆에 있었던 텁석골마을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배로양계장, 청계농장, 복길농원, 은혜네펜션, 굿나잇도그. 책마당.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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