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는 청계면 소재지로부터 무안읍 방향으로 약 6Km 떨어진 광주-목포간 국도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로는 국도1호선, 우로는 무안읍 우회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화설당, 사마동, 전리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사마1리인 화설당은 국도1호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당골과 화설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당골은 화설당 맞은편 국도 1호선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화설당(花雪堂)이라는 지명은 원래 청천리의 아랫마을이라고 ‘하청천’이라 부르다가 뒤에는 큰서당이 있는 ‘하서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인 1610년경에 마을에 거주하던 문화류씨 류운(柳運, 1580~1643)이 강학교류공간으로 정자를 건립했는데, 1612년 겨울에 나주목사 박동렬(1564-1622)이 수은 강항(1567~1618)과 찾아와 겨울인데도 동백꽃이 있어서 화설(花雪)이라 하여 당호를 화설당(花雪堂)이라고 한데서 연유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에는 원래 광산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나주 다시면 문암리에서 세거하던 문화류씨 류자(柳慈, 1522~1607, 호-만포(晩圃), 훈련원 주부 역임)가 아내의 고향인 이곳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류자 공은 염결하고 정직하여 문필로 일찍이 세상에 문명을 떨쳤으며, 의를 사모하고 예를 좋아하여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을 길렀다. 임진왜란 때는 친척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아들은 류수경, 손자는 류운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화설당마을은 국도1호선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아래 바다 쪽에는 해풍을 막아주는 숲이 조성되어 있어 그 숲을 ‘숲거리’라 부른다. 숲거리 너머에는 ‘족판머리’가 있는데, 발족(足)자에 판자 판(板)자를 쓴 족판머리는 옛날에 여기까지 배가 들어와 족판을 딛고 배에 올랐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 주변을 주민들은 창포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에 유독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협봉과 그 아래 암구마봉, 숫구마봉이 있고 마을의 주산은 갈마봉이다. 또한 현재의 마을회관 자리를 말매미라 하고 그 앞에는 다박솔과 마을 입구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다. 또한, 옆마을은 사마동이다. 사마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 사마동(司馬洞)이라고 했다지만, 말을 관리했던 마을이어서 사마동(飼馬洞)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사마동 옆 아래호치에는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쉬었다 가는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성씨
문화류씨 집성촌이었으나 이후 처가살이로 들어온 나씨를 비롯하여 서씨, 강씨, 김씨, 문씨 등이 어울려 사는 복합성씨 마을이 되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사마1리에 속하는 화설당이라는 마을 명칭은 원래, 조선시대의 기록인《호구총수》에는 물론이고 1917년 문헌인 《조선면리동일람》까지 청천리의 아랫마을이란 뜻의 ‘하청천’이라고 불렸다. 이후 이 마을 입향조인 류자(柳慈)의 손자인 류운(柳運)이 정자를 짓고서 당호를 화설당(花雪堂)이라고 한데서 연유하여, 일제강점기에 마을 명칭으로 삼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司馬里)와 하청천(下淸川), 전리(箭里)로 나오며,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전리를 제외하고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와 하청천으로 표기되었다. 1917년 자료에서 청계면 사마리 사마동, 남계동, 하청천, 삼노동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하청천이 화설당으로 바뀌고 삼노동은 무안읍 평용리에 편입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지명인 청계면 사마리 화설당, 사마동, 전리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은 원래 강학교류공간인 화설당을 중심으로 학문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면학 분위기가 강한 마을로서 주민들은 역사와 문화적 자긍심이 강하였다. 한때는 이 마을이 광-목간 도로 주변 마을 중에서 기와집이 가장 많았던 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화설당노래’를 만들어서 마을주민들이 모이거나, 예전에 야학에서, 그리고 결혼식 등에서도 불렀다고 한다. 3절까지 있는 화설당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류현석 선생이 정리해주었다.
‘사이산정 깊은곳에 공기좋은 화설일세/ 동산산이 내려와서 화설뒷산 되었도다/ 병원산에 늦은눈은 삼월까지 남아있고/ 양지위에 일은꽃은 정월에도 피어있고/ 앞으로는 푸른청산 뒤에로는 맑은시내/ 공기좋은 화설일세’(화설당노래 가사 / 류현석)
낮은 산의 구릉을 중심으로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상마리 일대의 지형조건과 함께 옆 마을에 입주한 청계농공단지는 물론, 무안읍과 청계면으로 이어진 국도1호선 및 우회도로가 교차하는 편리한 물류 교통의 요지가 되어서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이에 농사를 짓는 주민들과 산업시설에서 일하는 주민들이 섞여서 살아가는 마을로 변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방앗간,동각아래통샘
전통식품/특산품
류준선식초(식용,농약으로사용)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선독, 막음독,앞당산, 하네당산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동계와 함께 문화류씨 문중에서 매년 ‘대문중계’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오래전에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냈던 입석이 있었다. 현재 농산물시험장 안에 있었던 입석은 당시에는 주민들이 배를 매기도 하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었다. 입석은 석주형으로 당산나무에 박혀있는데 마을에서는 선독, 막음독, 앞당산, 하네당산 등으로 불렀다. 자연석으로 사람이 서 있는 형태를 한 입석의 높이는 170cm, 둘레 32cm의 크기이며, 일 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유물, 유적
화설당마을의 가장 중요한 유적은 마을 이름이 연연한 화설당(花雪堂)이다. 이를 건립한 류운(柳運, 1580~1643, 자-건숙, 호-화설당)은 학문과 시에 능통하였으며 문명과 덕이 주변에 떨쳤다. 특히 말년에 화설당이란 정자를 건립하고 당대의 석학이었던 우암 송시열, 수은 강항, 남곽 박동열, 시남 유계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논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현재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1호인 화설당은 특이한 건축양식과 구조로 우리 지역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 정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화설당이란 편액의 글씨는 송시열이 칡뿌리로 쓴 갈필휘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자 화설당에는 3가지 보물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동백나무와 용침 그리고 괴석을 말한다. 이중 동백나무와 용침은 없어졌지만 정자 뒤편에 있는 괴석은 30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정자와 함께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문화류씨 집안 출가외인의 욕심을 경계하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화계거사 류기순이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화계정(花溪亭)이 있다. 정자 내에는 화계정기(花溪亭記) 등 10여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후손인 류재업이 1951년 신묘년에 중건하였다. 화계거사는 당시 문명이 높았으며 부귀를 뜬구름 같이 여기고 선조인 화설당과 청계 공을 사모하여 이 두 사람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화계정이라 이름 지어서 숭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에는 ‘효자류재성비’와 ‘열부이천서씨비’, ‘효열부무안박씨비’ 등의 효열각이 있으며, 마을회관 옆에는 ‘류호풍표성비(2004)’와 화계정 안에 ‘남계류공효행비’와 ‘후계류공선행비’가 있다.
이외에 마을에는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주치봉 자락에 있었던 창주사는 류운공의 손자인 창주처사 류제(柳悌, 1652~1727, 자-운로(雲路))공이 1704년에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송시열 선생이 화설당에서 기거했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지방 선비들의 논의로 세워졌다. 우암과 주자학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주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우암 선생을 배향하여 하마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폐허가 되고 지금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고 한다.
설화
마을에는 문화류씨 선산인 주치봉 관련한 전설이 있다. 임진애란 때 왜구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에 너나없이 피난을 가는데, 문화류씨 문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식솔이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한참 피난을 가다가 문중의 한 어른이 족보를 빠트리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급히 문중회의를 열었으나 걱정만 할 뿐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을에는 이미 왜구들이 들어와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인인 할멈이 자기가 가겠다고 하며 나섰다. 할멈은 동네로 돌아와서 족보는 찾았으나 이미 마을에는 왜구가 들어와 있어서 앞에 간 일행과는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옆에 있는 주치봉으로 들어가 석굴에 숨어 있었다. 숨어 지내면서 먹을 식량이 없어 주변에 있는 열매 등을 따서 먹으며 연명하였다. 그러다가 왜구가 물러간 후 문중 사람들이 돌아와 주치봉 석굴로 찾아가니 할멈의 가슴에는 족보가 안겨 있었으나 할멈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후에 문중에서는 할멈의 죽음을 가상히 여겨 그 시체를 문중의 선산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충성스러운 할멈의 넋을 기렸다. 예전에는 할멈제사를 음력 10월16일 마을에서 모셨으나, 현재는 월선리에 있는 문중 재각에서 다른 선조들과 함께 제사를 모신다.
또한, 화설당의 괴석과 관련한 출가외인 설화가 전한다. 결혼 한 문화류씨 따님이 친정은 잘 사는데 자기는 어렵게 사니까 친정을 못살게 하려고 큰 삿갓을 쓰고 마을에 나타나, 류운의 손자인 류재 할아버지의 묘를 옮기지 않으면 큰 변고가 생길 것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묘를 팠는데 짐이 터져 나오고 송아지가 앞발을 꿇고 나와서 겁이나 그냥 다시 덮어버렸다. 그 후로 친정은 망해버리고 그 딸은 괴상한 형태의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전설이다.
기록물, 문헌
화설당지(花雪堂誌, 류종현, 2016. 11 간행)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류준선(92세, 30년 전부터 단감식초로 농약을 만들어서 사용함)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화설당과 얽힌 선비와 학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근대 동학운동과 관련한 인물로는 유재득 (柳在得) 선생이 있다. 인근 청천리에 무안동학의 집강소가 있었기 때문에 긴밀한 연유가 예상되었지만,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그의 손부(孫婦)를 통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득은 인물이 걸출하고 힘이 세어 주변에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으며, 동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동학이 진정된 후 헌병대에 잡혀가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때 면장을 오래한 류재능은 일본말을 모르지만 일본인들이 물어보면 무조건 “하이!”라고 대답을 하여 ‘하이면장’으로 유명했다 하며, 무안향교의 전교를 한 류재성과 초대 도의원을 역임한 류상현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행정고시 사법고시 양과에 합격한 류길선과 부산 수산대 교수를 역임한 류상현, 무안군 면장을 역임한 서상기, 류광열, 류학선 씨 등이 있다. 또한, 청계면에서 제일 큰 부자였던 류길남은 일 년에 한 번씩 추수를 할 때면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1610년경에 화설처사 류운(柳運)이 건립한 무안 화설당(務安 花雪堂)은 겨울인데도 동백꽃이 있어서 화설(花雪)이라고 노래한 나주목사 박동렬의 시에서 연유한 아름다운 정자이다. 수은 강항이 화설당기(花雪堂記)를 남겼고 우암 송시열이 칡뿌리 갈필로 판액을 썼다. 건축 구성에 있어서도 다른 정자와 평면형식이 구별되는데, 완전한 ‘一’자형으로 좌로부터 방, 방, 대청 2칸 순으로 꾸며져 있고 전·후로 모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특히 좌측 방에는 이 지역 민가에서 볼 수 있는 '봉창'도 설치하였다. 그렇듯이 화설당은 강학교류 공간으로서 중요한 유적지이며, 관련 인물이나 자료 등에 있어서도 오래된 역사성이 담긴 마을의 자랑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