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3리에 속하는 전리(箭里)는 청천리 앞 바이오에너지센타에서 창포 쪽으로 1Km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깃대봉을 배경으로 주치봉을 마주하고 있다. 전리마을의 주민들은 마을 중간에 있는 팽나무를 중심으로 아랫마을은 절리, 윗마을은 남계(南溪)로 분리하여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절리는 조선시대 이전에 화살을 만들던 마을로 추정되는 화살 전(箭)자 전리에서 소리가 나는 대로 표기해서 ‘절리(節里)’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지명유래
이 마을의 지명은 조선시대에 화살을 만들던 마을로 추정되는 전리(箭里)이다. 앞의 상마동이 무안현에서 필요한 말을 공급하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화살을 만드는 곳이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물론 삼국시대 이래로 화살 곧 전죽(箭竹)을 만들던 향소부곡 마을이었던 삼향(三鄕)은 망운 말목장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와 나주목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무안현에는 따로 필요했던 것들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마을 명칭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이는 지금도 주민들이 ‘전리’를 소리 나는 대로 편하게 ‘절리’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이다. 하지만, 이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전리(箭里)로 표기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큰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화살 전(箭)자는 화살대를 만들기에 적합한 작달막한 대나무 또는 화살을 뜻한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을에서 화살을 만들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은 창포만 건너 맞은편 마을인 평용마을에 있었던 활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즉 평용마을은 예전에 나라의 창고인 국창(國倉)이 있었던 곳인데, 그곳의 관리들 또한 화살과 활터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실제로 마을 곳곳에 신우대가 자라고 있으며, 주민들 스스로 알고 있듯이 주변 마을에서 이 마을의 주민들에게 ‘절리놈’ 이라며 천대했다는 사실 등이다.
마을형성(입향조)
구전에 의하면 입향조는 300여 년 전에 들어온 탐진최씨 최광국이다. 그는 낙향하여 산천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이곳에 이르러 잠시 쉬었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뒤편에는 파란 파도가 넘실거려, 그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 후로 경주정씨와 진주강씨가 입향하였다고 하지만 《무안세적지》에는 입향조가 최천강(崔天綱, 호 청은(淸隱), 영조대)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원래 나주 초동에서 살았으나, 이곳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자손 대대로 번영하며 살 수 있도록 옮겨 왔다는 기록이다. 특히 효제(孝悌)를 실천하고 독서를 하며 자손들에게 의롭게 살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창포만이 간척되기 전에는 마을의 형국이 반도형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에 더하여 지층이 바위로 이루어져서 예전부터 물이 귀한 곳이었다. 또한, 마을의 뒷산인 깃대봉(86.7m)에는 측량 표지석이 있다.
마을성씨
탐진최씨를 중심으로 정씨, 강씨, 이씨, 장씨, 김씨,노씨, 박씨, 소씨, 조씨, 진씨 등이 어울려 살아가는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이전부터 전리로 불리웠고 이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군 이서면 전리(箭里)로 기록되어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우리말에서 ‘ㄴ’이 유음 ‘ㄹ’ 앞이나 뒤에서 ‘ㄹ’로 바뀌는 유음화(流音化)현상으로 인해 ‘절리’라고 불렀다. 이는 이 마을의 명칭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언어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절리(節里)의 마디 절(節)이 마디마디 진 대나무와 상통한 것이어서 더욱 편하게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 또한 주민들은 ‘절리’에 대해, 절개를 지킨 여자가 살았던 마을이었다. 또는 《마을유래지》에 나온 것처럼 화설당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수천 천변에 있는 마을로써 맑은 하천에서 풍겨 나오는 계절의 향기가 절기마다 뚜렷해서 절리로 불렸다는 의미로 알고 있어서 흥미롭다.
하지만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절리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 남계동(南溪洞)으로 나온다. 남계라는 지명은 남안리 남쪽 시냇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광복 이후 다시 전리라는 지명을 쓰고 있지만 주민들은 부르기 편리한 대로 절리라고 부르고 있기도 하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司馬里)에 속한 전리(箭里)로 나오며, 1917년 자료에서는 청계면 사마리 남계동으로 나오다가,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지명인 전리로 나와 청계면 사마리에 속하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원래부터 창포만 바닷가에 접한 작은 마을로 1990년대 행정구역 개편 때에야 독자적인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마을의 세대수가 15가구 안팍으로 늘 일정하며 세대 간 빈부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마을의 청년들이 억세고 단합이 잘 되어 주변 마을에서 늘 어려워했다고 전한다.
주요시설
내원사, 나산냉동, 수산업.
마을변화
주민들이 마을에 있는 사찰인 내원사에 다니는 불교 신자가 많다. 원래 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농사는 외지인들이 짓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 들어오면 다 부자가 된다는 말처럼 기초생활수급자와 단독세대가 거의 없으며 영농자금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주민들끼리 서로 잘 돕고 단합이 잘되는 마을이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날 때는 예의를 지키게 한다 고 마을어르신이 전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이 없어서 마을 입구에 간이 동각을 마련해서 이용하고 있으며, 주민들 다수가 내원사에 다니는 불교신자들이다.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는 예전에 포구로 사용했던 바우백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근대사의 아픔인 동학군들의 아픔이 배여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창포만 쪽으로 뻗어 낭떠러지를 이루면서 천연의 포구를 이루었던 곳이 바우백이인데, 서해바다로 나가거나 한양 등으로 나갈 때 이용했던 포구이다.
그런데 윗마을인 청천리의 맑으내는 동학봉기 때 농민들의 의결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동학군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또한 동학군들이 창포만을 이용해 해제의 동학연병장까지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동학이 실패로 끝나면서 무안지역의 동학군만 아니라 타지역의 동학군들이 관헌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가고자 이곳 창포만의 바우백이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미리 낌새를 알고 바우백이에 숨어서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관헌들에게 붙잡혀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또한, 바우백이 아래에는 지형적인 여건으로 청천리, 남안리, 평용리의 물이 모이는 지역이라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었다. 여름철에는 해수찜을 하러 인근 마을에서 몰려들었으며,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래는 주변의 시군 등에서 공사를 할 때 건축자재로 팔려나가기도 하였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절터가 있었다는 간석골, 달건네, 족판머리, 팽나무개, 나들이개, 건강에 좋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까지 찾아와서 즐겨 목욕했다는 옥둠벙 등의 이름이 남아서 전한다. 또한, 마을 앞에 병샘이 있었는데, 이는 병자년에 팠거나 또는 병자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으로 평용마을, 청천리, 화설당 등의 농지에 물을 댔던 샘이다. 이 역시 지금은 메꿔지고 이름만 남았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얼마 전까지 마을에서는 방천제(防川祭)를 지냈다. 갯물이 들어오는 둑에서 백중날 저녁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둑이 무너지지 말라고 지신(地神)과 해신(海神)께 지내는 제사로, 그날에는 마을의 모든 주민이 나와 둑이 무너지지 않고 농사가 잘 되어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다.
유물, 유적
주민들은 윗마을인 남계에서 아랫마을인 절리로 이어지는 마을의 능선에서 숯구덩이와 옹기를 구은 후에 나오는 찌꺼기 등이 발견되어 혹시 이곳에 옹기를 굽는 곳이 있었지 않았는가 여기고 있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이마을에는 동학군들의 아픔이 배여 있는 장소가 있다. 윗마을인 청천리의 맑으내는 동학봉기 때 농민들의 의사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동학군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또한 동학군들이 창포만을 이용해 해제의 동학연병장까지 오가면서 활동하였다. 동학이 실패로 끝나면서 무안지역의 동학군만 아니라 타지역의 동학군들이 관헌의 눈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가고자 이곳 창포만의 바우백이로 숨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낌새를 알고 바우백이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관헌들에게 붙잡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장보름(국악인, 씻김굿)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무안에 최초로 양파를 알려서 심게 한 강동원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일본의 양파를 재배하는 농가에서 양파종자 1홉과 재배 기술서적을 숙부인 강대광 씨께 보내어 양파재배를 성공시켜서 오늘날 무안의 대표농산물이 되도록 하였다. 이외에 현대적인 인물로는 신경하, 박현욱, 박익수(호남대 교수)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일제강점기 때 마을에 사는 정참사라는 사람이 현재 대밭으로 변해있는 곳에 선대 묘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재각을 지어서 묘를 관리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마을의 규모가 괜찮았다고 한다. 당시 정참사는 무안 제일의 부자였지만, 지금은 정씨묘를 몽탄면 달산리로 이장해 가면서 재각과 관리사는 무너지고 잡초가 우거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예전 해방 이후에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일어나면서 이 마을 역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죄수들이 승달산줄기를 타고 도피하면서 이 마을까지 몸을 숨기려고 찾아 들었다. 옆 마을인 아래 호치에서는 많은 죄수가 잡혀 죽었다. 당국에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전리에서 시루봉까지 인의 장막을 쳐서 죄수를 수색하기도 했다. 6.25한국전쟁 때는 한 가족 6명이(경주정씨) 몰살당하는 아픔도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에서 서호리를 거쳐 상마리까지 나있는 도로는 소화 13년(1938년)에 만들어진 신작로다. 이도로는 청계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신작로인데 주변의 풍부한 농산물을 가져가기 위한 운송로이기도 하였다.
-이마을 사람들은 부자여서 영농자금도 쓰지않는다함
-마을사람들 스스로 주변정리를 깨끗이 한다함
-자영업자가 많고 수급자가 없다고함
-마을 앞에 병자샘이 있었다. 병자년에 팠거나 병자년에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인데 평용마을,청천리,화설당등 농지에 전부 물을 댔던 샘이다.지금은 메꿔지고 이름만 남았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나산냉동, 유림수산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 앞에서 서호리를 거쳐 상마리까지 나있는 도로는 소화 13년(1938년)에 만들어진 신작로이다. 이 도로는 청계면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신작로인데 주변의 풍부한 농산물을 가져가기 위한 운송로이기도 하였다. 이후 청계 도림리에 사는 강대원씨가 국도 1호선 도로변에 최초로 벚꽃 가로수길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