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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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천1리 청계면 상청천 작성
  • 상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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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가구수 107세대, 인구수 193명.
자연마을 구성
청천리(淸川里)를 말하는 “맑으내”는 청천을 한글로 풀어 쓴 이름이다. 맑은 물이 산골짜기에서 쉬지 않고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면소재지에서 무안으로 이어지는 목포-광주간 도로를 따라 태봉리와 사마리를 지나서 무안읍 성남리와 경계인 청계면의 끝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도로를 중간에 두고 승달산 방향에 상청천이 있고 아래쪽에 하청천마을이 있다. 청천1리에 속하는 상청천마을은 원래 이씨와 박씨가 살았지만 15세기 중반에 배씨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점차 다른 마을로 이주해갔다. 아직도 마을 주변에는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는 이씨, 나씨, 고씨 등 이주민들이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성배씨 집성촌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청천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샘 정(井)자가 들어있는 세 개의 지명에서 비롯된다. 마을을 가르며 흐르는 맑은 물의 원류가 빈대정골과 마협봉의 동쪽에 있는 점지정골 그리고 마협봉의 서쪽에 있는 왜가리정골인데, 이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들이 전부 마을 앞으로 흘러서 지나고 있다. 이처럼 청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원래 이씨와 박씨 등이 살고 있었으나, 15세기 중반에 달성배씨 증암 배회(甑巖 裵繪)공이 경상도 대구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입향하면서 점차 다른 마을로 이주해갔다. 증암 공은 세조 때 충신들의 거사인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세조 2년 1456년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곳을 찾아 이곳 ‘맑으내’로 들어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쳤다. 특히 증암 공은 무안박씨 박익경(호-애한정, 고절리 입향조)의 동서였다.세조가 천륜을 버리고 왕위찬탈을 할때 이의 부당함을 눈물로 호소하며 만류했으나 듣지않자 벼슬등 모든것을 버리고 동서를 따라 이마을로 들어온 것이다.마을 앞에는 국도1호선을 따라 열을 지어 나무들이 서 있는데 팽나무66, 개서나무20, 느티나무3그루가 있다 대부분 500년이 넘은 오래된 나무들인데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배회공이 마을의 땅기운은 흡족한데 서해 창포에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가옥은 물론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입고 있어 고민하다 마침내 지나가는 나그네의 말을 듣게 되어 심게 된 나무들 이라고 한다 .이나무들을 심은 후 부터는 건해풍(서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막을 수 있어 자손이 번창해지고 마을도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고 한다.또한 마을뒤에는 이른바 무안에서는 제일의 명당이라는 금구도니형(금거북이가 뻘밭을 넘어오는 형국)의 무덤자리에 증암공부인인 강산이씨를 모셔 후손들이 발복하는 좋은 일을 가져왔다고도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주산은 시루봉(甑岩, 241.3m)이며 조산(祖山은 승봉이다. 매봉과 알뫼봉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와우형(臥牛形)의 지형이며, 길 건너 바라보이는 하청천의 봉우리는 주치봉이다. 그리고 마을 뒤에는 이른바 무안에서 제일의 명당이라고 하는 금구도니형(金龜渡泥形)으로 금거북이가 뻘밭을 넘어오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증암 배회 공의 부인인 강산이씨를 모셔 후손들이 발복하는 좋은 일을 가져왔다고 전한다.
마을성씨
배씨,이씨,나씨,고씨 등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지명의 변화를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천동’으로 나오며, 이후 《호구총수》에는 이서면 ‘청천리’로, 그리고 1912년에 이서면 ‘상청천리’로 바꿨다가, 1917년 이후에는 청계면 ‘상청천’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청천 일부와 외읍면의 대동리 일부를 합하여 청천리라 해서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의 입향조인 배회 공이 당대의 왕인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충의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향리로 내려와, 참된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수학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였듯이, 이 마을에서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드물게도 마을에는 동학혁명 당시의 집강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달성배씨의 사당인 청천사(淸川祠)는 1894년 농민들의 변혁운동인 무안동학의 중심지였다. 배상옥 장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무안의 동학군들은 이 마을 달성배씨 사당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이 중심이 되는 대동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배상옥 장군은 당시 청계접주인 배정기의 잠실(청천재옆에 있었다)에 기거하면서 동학군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마을에는 동학과 관련해서 찬과 반 두 부류의 흐름이 있어 주민들의 생각도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무안의 향리들을 다스리는 실력자인 호장(戶長)을 맡고 있었던 달성배씨 집안의 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집강소가 토포군들에 의해서 불 질러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시대의 선두에 섰던 이들을 배출했던 이 마을에서는 해방공간과 6.25 한국전쟁 때도 무안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사상이 드세었다. 인민군 무안군당 총무가 이 마을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이 진보적이었다 그러니만큼 주민들의 피해도 잦았으나 또한 극단적인 갈등과 혼돈을 녹이고 보존하는 마을이 되었기도 하다. 일설에는 전봉준 장군의 아들이 이 마을로 숨어들어와 살아남았다고도 하고, 실제로 인민군 무안군당 총무를 했던 분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주요시설
오랜 역사와 문화가 집성촌이라는 지역공간으로 형성된 이 마을의 주요시설은 달성배씨의 사당인 청천사(淸川祠)와 그 안에 있는 제각인 청천재(淸川齋)라고 하겠다. 청천사(淸川祠)는 1683년(숙종 9년)에 무열공 배현경, 율헌 배균, 증암 배회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1803년(순조 4년)에 향내유림의 발의로 향현사가 되었다. 이후 1868년에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46년 향내유림의 발의로 옛터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건 시 달성군 배운용, 금헌 배정지(1257~1351), 정절공 배극렴(1325~1392), 희암 배명 등이 추배되었고, 2007년 청절당 배상옥(동학농민운동 무안지역 의병장)을 추배하였다. 조선시대 한때 이곳 배씨들은 무열공 배현경과 정절공 배극렴 때문에 병역이 면제된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은 전국 달성배씨 문중에서 청천사가 최초이다. 청천사 앞에는 흑산도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던 면암 최익현의 글을 새긴 유허비가 있다. 청천사 아래에는 재각인 청천재가 있는데, 조정으로부터 받은 청(靑)기와 두 개가 지붕 위에 있어 문중의 자랑으로 내려왔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오래전에 마을의 한 친족이 청기와를 욕심을 내어 머슴을 시켜 팔았다가 머슴의 폭로로 훔친 사실이 알려졌다. 마을에서는 문중 회의를 열어 이를 다시 찾아 원상회복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여 새로 갖다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청천사는 2009년에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역주민들의 의미 깊은 사랑방이자 많은 답사객이 이용하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또한, 마을 뒤의 산골에 있는 명옥폭포 옆에는 1954년에 건립된 절로 추정되는 마곡사(麻谷寺)가 있다. 이는 배종무 전 국회의원의 어머니가 세운 절로 알려졌으며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사찰이다.
마을변화
주로 달성배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에 다른 성씨의 입주민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따라서 마을의 성격이 복합성씨 마을로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집성촌의 성격이 강한데다가 마을 입구의 방풍림인 개서어나무 등의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동물축사 등이 일절 들어오지 않아서, 자연생태적으로 청정함을 자랑함은 물론 역사와 문화적인 깊이가 고요히 안겨있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새마을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유산각,희망교회,마곡사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맑으내’라는 지명처럼 청천리(淸川里)는 맑은 물이 산골짜기에서 쉬지 않고 흐르는 마을이다. 승달산의 마협봉을 중심으로 샘 정(井)자가 들어있는 빈대정골, 점지정골, 왜가리정골의 세 골짜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사시사철 마을 앞으로 흘러가면서 자연생태적인 마을 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농촌마을에 불어닥친 소, 돼지, 오리 등 가축 축사의 무분별한 건립도 마을 앞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방풍림으로 해서 잘 막아내는 청정마을이 되고 있다. 마을 입향조가 마을을 형성하면서 막아내려던 해풍을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막아내면서 그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동/식물
이 마을 앞에는 울창한 마을숲이 늘어서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숲으로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건해풍(乾亥風)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자 조성한 방풍림으로 추정된다. 국도1호선을 따라 열을 지어 서 있는 나무들은 팽나무 66, 개서어나무 20, 느티나무 3그루 등으로 대부분 500여 년이 넘은 오래된 나무들이다. 원래 입향조인 배회 공이 마을의 땅 기운은 흡족한데 서해 창포에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가옥은 물론 농작물이 큰 피해를 보고 있어서 고민하다가, 마침 지나가는 나그네의 말을 듣고서 심게 된 나무들이라고 한다. 흔히 ‘우실’이라고 부르는 이 숲을 조성하고 나서 자손이 번성함은 물론 마을도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두 줄로 이어져 있던 팽나무 숲을 일제강점기에 한 줄만 남기게 베어버렸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서 몽탄으로 넘어가는 길을 ‘좁은골재’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몽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서호리, 남안리, 무안읍 일부 등 지역민들이 기차역을 가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던 재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차소리가 들렸다고도 하며, 이외에도 외얏등, 세난골, 삼바실폭포, 한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1956년-70년대까지 마을에서 굿, 농악놀이 등을 많이 하였으며, 이러한 연행을 할 때면 마을을 찾아온 외국인들도 사진을 많이 찍어 갔다고 한다. 하지만 기능보유자가 죽고 나자 중단되었다.
유물, 유적
이 마을의 역사적인 유적과 유물은 대부분 청천사와 청천재를 중심으로 소장되거나 배치되어 있다. 청천사에는 고려 개국공신인 무열공 배현경,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절공 배극렴, 달성배씨 시조인 배운룡, 마을의 입향조인 배회 및 배연지, 배균, 배명을 비롯하여 무안동학의 두령 청절당 배상옥 장군 등 여덟 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임을 보여주는 두 개의 효자각이 있다. ‘배규한효자각’과 ‘배병의효자각’으로, 배규한(자-덕보, 호-사모재 1824-?)은 부친이 오랫동안 병으로 신음할 때 손수 약을 달이고 부친의 대변을 맛보면서 간호하였다. 부친이 운명했을 때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머리도 안 감고 손톱도 자르지 않았으며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모친도 돌아가시자 부친과 똑같이 시묘살이를 하며 자신의 불효를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배병의(裵炳儀, 자-석린, 호-촌심당, 1863-?)는 천성이 바른 사람으로 부친에 이어 모친마저 앓아눕자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부친의 임종 시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의 입에 넣어 드렸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흐트러짐 없이 하여 마을주민들 모두가 그의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효자비각은 1927년에 세웠고 1980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정려(旌閭)가 있다. 하나는 고절리에 있는 여산송씨 정려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무안박씨 박제 장군의 부인인 여산송씨가 왜군에게 희롱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열녀였다. 후일 왕조에서 그의 절개가 가상하여 정려를 내린 것인데, 원래 그 정려각이 이 마을에 있었다. 지금도 정문거리라는 지명과 정려를 위한 위토탑이 남아있어서 어느 시기에 현재의 고절리로 정려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당시 무안현이었던 현재의 함평 옥동에 있는 이 마을 출신 배광언의 무남독녀로 당시 의병장이었던 윤함 부인의 정려이다. 또한 배명의 따님도 현경면 양학리로 출가했는데 남편의 간호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간호할 정도로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이 ‘달성배씨열부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교훈 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에는 고인돌이 11기나 있다. 마을 앞에 2기와 4기 그리고 냉동창고 뒤편에 5기가 있다. 5기 중 큰 것은 4m 10cm, 넓이가 3m 30cm나 될 정도로 크다. 또한, 마을에서 무안읍 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삼정농수산 맞은 편에 지석묘 1기가 있다. 예전엔 고인돌이 많이 있었지만 길을 내거나 밭을 경작하면서 많이 묻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설화
각종 병의 치료에 신기한 약효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마을 뒷산의 명옥폭포 옆에 있는 동굴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어떤 주민이 굴속에 사는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굴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일로의 주룡나루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몽탄강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는, 영산강과 연결된 깊은 굴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기록물, 문헌
- 달성배씨 족보를 종손인 배태율 선생이 보존하고 있으며 조선 숙종 때 받은 효교지 등도 있다. 그런데 이외의 책과 문헌 자료를 벽지 불쏘시개로 사라져버렸다. *배영찬 (1943년생) 선생이 제공한 기록문.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무안현 청천동 주동도자기 요업지가 있으며 품질은 중품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입향조 배회 공은 대구 칠곡 출신 부인이 광산 이씨, 무안박씨 박익경의 큰동서로 단종 복위 운동에 같이 참여하였다. 이에 세조의 박해를 피하여 동서를 따라 무안박씨촌인 무안 청천동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광산이씨는 궁예왕의 후손으로 장자는 광산에 둘째는 대구 칠곡에서 살았고 삼자는 경기도 남양주에 살았다. 선조 때 정여립역모사건 당시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요, 영의정 이산해도 동인이었다. 영수였던 이발은 부인이 파평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친고모였는데, 서인인 송강 정철에 의하여 심한 고문으로 아우 이문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광산이씨는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음력 2월 초하루는 ‘콩 볶는 날’인데, 이는 콩볶기를 통해서 그 해 농사의 흉년일지 풍년일지를 미리 알아보는 풍점(豊占)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흉년의 요인(한해, 수해, 풍해, 충해)을 볶아서 몰아내자는 기원을 담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산이씨 여인들은 이때 콩을 볶으면서 “콩볶자 콩볶자 벌레볶자 벌레볶자 송강볶자 송강볶자 정송강 볶아먹자.” 이렇게 노래를 부를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청천리 산58번지의 산봉우리 23정보를 ‘빈대정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8부 능선의 땅에서 물이 샘솟는 곳에 일년내내 소진드기가 살고 있어서 빈대정골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소진드기는 신발 위로 슬금슬금 올라온다. 개와 동행할 때는 개의 몸에도 많이 붙어서 반드시 구충을 해줘야 한다. 어느 해는 진드기가 무한히 번식하여 산에 있는 모든 짐승에게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몸집이 작은 산토끼 등은 죽어서 있기도 하였다. 그해에는 집에 있는 개나 소에게도 많이 기생하고 있었다. 소에게 붙은 진드기는 기르는 닭들이 쪼아먹어 일부는 제거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이라는 말은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가 기다린다는 말로, 반갑다는 암묵적인 표현이다. 정부는 반드시 곤충학자를 통하여 ‘진드기 성장사’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가수 배철수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 마을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배현경(고려 개국공신), 배극렴(조선 개국공신), 배정기(동학접주), 배상옥(무안동학대장군), 배종무(목포대학교총장, 국회의원), 배태일(미국 대학교교수), 배규환, 배이기(이상 향교전교), 배종대(청계북교, 면성중학교 설립 기여), 배영훈(조선대교수), 배석유, 배순선(제일교포, 마을회관기금 기증으로 마중물 삼아 주민들의 십시일반이 더해져 마을회관이 지어졌음) 등 헤아리기 힘든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거처/생가/묘소
입향조 배회 부부 합장묘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근현대를 거치면서 청천재를 중심으로 마을에 있었던 임금이 하사한 청기와 두 개, 제사 때 사용했던 병풍, 화재 시 사용했던 큰 종, 작은 종(1965년까지 사용) 등이 사라졌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뒤에는 폭포수가 떨어질 때 맑은 옥구슬 소리를 낸다는 명옥폭포(삼바실폭포라고도 한다)가 있다. 한때 이 폭포는 불치병 환자에게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앉은뱅이었던 환자는 이 폭포수를 맞고 걸어 나오기도 하였으며, 피부병이 걸린 환자는 단 한 번의 물맞이로 10년의 고질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이 폭포수를 맞으면 오히려 화를 입어 멀쩡한 사람도 변을 당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의 앞길인 국도1호선 근방의 길은 원래 한양가는 길이었다. 또한 바다로 이어진 창포포구가 마을 앞에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붐볐고, 그래서 일제강점기까지는 장승거리 옆에 객사가 있었다. 장승거리는 마을 입구에서 100m 아래 있는데, 두 개의 선돌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약 2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선돌은 길이가 각각 2m 40cm, 1m 50cm의 크기이며, 장승 옆에는 천연기념물 표지석도 서 있다. 원래 마을 입구는 현재의 길이 아니라 이 장승거리였다.
기타사항
-마을에는 1960년대 말에 세워져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된 ‘희망교회’가 있었다. 청천리는 물론 서호리, 기동마을 등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던 인근 학생들 약 15명 정도를 공부시키던 중학교 과정의 야학으로 배순기 선생이 설립 운영하였다. -시루봉 흙 속에 있는 황철광(산골)을 캐서 한약방(구리)을 섞어 가루로 단방약을 만들어서 복용하면 탈골된 뼈가 붙는 비상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회관 옆자리에 있던 종대 위의 ‘큰종’은 두 사람 이상이 들어야 움직일 정도로 컸으며, ‘작은종’은 무척 아름다웠다고 전한다. 종머리는 ‘용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종을 치면 저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흐린 날씨에는 무안까지 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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