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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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천 2리 청계면 하청천 작성
  • 하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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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5세대, 52명
자연마을 구성
하청천은 청천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청계면소재지에서 무안으로 이어지는 목포-광주간 도로를 따라 태봉리와 사마리를 지나서 무안읍 성남리와 경계인 청계면의 끝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승달산 아래 쪽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래쪽에 하청천마을이 있다.《한국지명총람》에 ‘호밋갱변’으로 나오는 홑목과 아랫서당, 야등, 안고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예전에 ‘홑목’은 마을 바로 밑에까지 창포만의 물이 들어오고 자갈이 많아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또한, 야등과 안고랑은 마을에서 대곡마을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지명유래
하청천은 원래 연방죽이 있을 정도로 물이 좋은 곳이라서 연화동(蓮花洞)이라고 하였다가, 이후 마을에 큰 서당이 생겨서 하서당(下書堂) 또는 아랫서당으로 불렸다. 그러나 뒤에 승달산 마협봉의 샘 정(井)가 붙은 세 골짜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청천리를 가르며 흐르는 지형을 반영하여, 위쪽의 상(上)청천과 아래쪽의 하(下)청천으로 구분하여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무안박씨 박동양(1616-1672, 자-기보, 호-낙재)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이 마을 입향조는 달성배씨 배명(裵蓂)으로 왕조가 1618년 정월에 대비의 호를 삭거하여 서궁(西宮)이라 칭하자 이에 부당함을 상소했다. 공은 이에 왕조의 미움을 사 호남 일대를 방랑하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무안박씨 족보를 보면 배명은 박동양의 할아버지인 박임(1570-1648, 자-여중, 호-지봉)과 함께 광해군의 패륜적인 행위에 안타까워하였으며, 둘은 사돈 관계로 이 마을에서 외손 봉사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 뒤 무안박씨 문중산에 배명의 묘가 있다. 이처럼 문헌 기록에는 배명이 입향조로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 관계나 상황을 따져보면 박임이 입향조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의 손자인 박동양을 입향조로 여기고 있다. 그렇듯이 이 마을은 대대로 무안박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다가 약 80여 년 전부터 타성받이가 들어와 살면서 현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지봉(芝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나분돌들’이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나분돌들이란 넓은 돌 곧 광석(廣石)이 넓게 펼쳐진 들판을 말한다. 또한 지봉은 지초봉 또는 뒷동산이라고도 부르며 옆 마을인 화설당에서는 주치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는 무안읍 대곡마을의 물맞이고랑에서 발원한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 하천은 물길이 좋아 나분돌들뿐만 아니라 창포만 간척지의 농사에도 이용하고 있다.
마을성씨
원래 박씨 집성촌이었으나 80년 전부터 강씨, 전씨, 김씨, 권씨, 오씨, 배씨, 주씨 등이 이거하여 복합성씨 마을이 되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연방죽이 있어서 연화동(蓮花洞)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마을에 큰 서당이 생겨서 하서당(下書堂) 또는 아랫서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이서면 하청천(下靑川)으로 나온 이후 현재까지 같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현 이서방에 속하다가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무안군 이서면으로 개편되어 1910년에는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청천 일부와 외읍면의 대동리 일부를 편입하여 구성된 청계면 청천리에 속했으나, 1917년의 자료에서 잠시 청계면 사마리 하청천에 속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오랫동안 전통적인 농사를 지어왔으나 무안읍 도심지에 인접한 농촌 마을로써 마늘, 양파 등 밭농사와 주로 비닐하우스 등을 통한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전원주택 등을 지어서 입주한 도시민들이 많이 이주해서 생활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1980년에 목포에서 옮겨온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가 있다. 흔히 농진청 작물시험장으로 불리는 이 자리는 원래 일제강점기부터 목화를 재배해왔던 곳으로 창고가 있었던 자리이다.
마을변화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전통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1980년경에 바이오에너지작물연구소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소유한 토지를 시세보다 3배 정도의 가격으로 매입하고 주민들의 일자리를 우선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고령이 된 주민들이 거의 농사를 짓지 않고 여가생활을 하고 있으며, 대신 도시 근교의 밭작물을 전문적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현재 자연생태가 살아있는 마을은 주민들 간에 단합을 잘해서 서로 나눔을 좋아하는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마을집하장(1995년경 청천리 분구 시 만듦)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하청천교 다리 건너 배롱나무 밑에는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자랑하는 샘이 있었다. ‘참새암’이라고도 하고 ‘쪽박샘’이라고도 했다. 이 샘은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물맛이 좋기로 주변에 널리 알려진 샘물이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맞고는 일어섰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 정비할 때 메워져 그 물을 마실 수가 없다. 마을 앞으로 나 있는 길은 구로리, 강정리, 서호리 등에 사는 이들이 무안장에 갈 때 다니던 길이다. 그리하여 참새암은 길손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샘물이기도 하다. 또한, 무안읍내 사람들은 창포에서 모래찜하고 쪽박샘에서 목욕하고 갔다. 상수도가 개통된 1973년경부터 샘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동/식물
마을 입구 하청천교라는 다리를 건너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예전에는 여러 그루의 배롱나무가 하천을 중심으로 자라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고사 되고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주민들은 이 배롱나무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약효가 널리 알려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마을 사람들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녀자가 이 나무를 달여 먹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도 한다. 수령이 300여 년이 넘고 둘레는 120cm에 높이는 8m 정도이다. 마을 뒤 무안박씨 문중 묘에도 수백 년이 되었음 직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의 하천에는 5개의 보가 있었는데 오랜 지명유래 등이 담겨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수마이보, 각씨보, 참새암보, 불이보, 창개보 등이다. 여기에서 창개보는 창포보를 말하며 간척지를 만들면서 없어졌다. 예전에 이 하천에는 은어와 장어 등이 많이 있었다. 이외에 남아 있는 지명으로는 장팻골, 진고랑, 안고랑, 비석골, 촉갓 등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입향조인 무안박씨 낙제공 박종양 등이 배향된 박씨제각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지내는 제사에 주민들이 참석한다.
유물, 유적
청천리를 비롯한 인근 지역은 승달산자락으로 바닷물이 깊이 스며들어온 리아스식 지형으로 이루어진 창포만 주변이라서 고인돌이 많다. 실제로 예전에는 대곡마을 앞 나매미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청천리를 지나 청계북초등학교를 거쳐 서호리까지 ‘고인돌 라인’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십 기가 넘는 지석묘가 늘어져 있어 주민들은 넓은 돌이 널린 들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나분돌들’ 이 되었고 지금은 ‘나분들’로 바뀌어 부른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너분돌들’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도 나매미와 청계북초등학교 뒤에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며 서호리에도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다. 물론 상천천 마을에도 수십 기의 고인돌이 정리되어 있다. 또한 마을의 진고랑에는 무안박씨의 제각인 영락재가 있다. 영락재는 1991년에 세워졌는데 이 마을 입향조인 박동양을 모시고 있다. 삼문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봉이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하청천교 다리 옆에는 ‘무안박씨세장비’와 ‘지암공효행비’가 서 있다.
설화
지초봉에 있는 굴이 무안읍 교촌리로 이어져 뚫려 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은 가정에서 만든 막걸리를 밀주라고 단속 나올 때 지초봉 굴속에 숨겨놓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마을 이장(박종덕)의 4대조인 고조부 박종수 공의 교지가 제실에 보존되고 있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주금순: 무안음식 명인(전남도지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역사적으로 유명을 떨친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이 마을의 입향조인 희암 배명(希菴 裵蓂, 생졸년 미상)을 살펴본다. 그는 1565년 이후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80년(선조 13)에 전라교수관(全羅敎授官)에 제수되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로 화를 입은 정개청(鄭介淸)‧나사침(羅士忱)‧나덕명(羅德明) 등의 무고함을 알리고 진상의 재조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으며, 이 상소는 『기축록(己丑錄)』에 실려서 전한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우 효우당(孝友堂) 배협(裵莢) 등과 의병을 일으켜 진주(晉州)에서 싸웠다. 1618년(광해 10)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깎아 서궁(西宮)이라 칭하는 대비 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일의 부당함과 폐모론을 주장하는 무리들을 제거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호남의 여러 선비들이 그의 절의(節義)에 따랐다. 사후 전라남도 청천사(淸川祠)에 배향하여 9월 9일(중량절)에 유림향사하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현재 감나무 단지가 조성된 비석골에는 이씨 문중의 묘가 있었다. 이곳에는 문인석을 포함한 여러 기의 비석과 장군묘처럼 커다란 봉분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60~70년대에 이 골짜기에 도굴꾼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씨 묘를 팔 때는 상당량의 생활도구와 자기들이 나왔다고 전한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의 지하에는 무안읍 못샘과 연결된 거대한 물줄기가 지나고 있어서 주민들에게 충분한 수량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민 중 한 사람이 이 물을 많이 이용하기 위하여 지하수로 개발하였는데, 물을 많이 빼 쓰자 어느 날 갑자기 관정 주변이 함몰되어 침하 현상이 일어나서 바로 메꾸어 버린 일이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입구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방문객을 반기며, 마을의 문중묘에도 수백 년이 넘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주민들은 어렸을 때 선산의 배롱나무에 올라타고 놀았으며 또한, 근처에서 말타기, 제기차기, 팽이치기,팔방놀이, 자치기 등을 했다고 회고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의 다리 신축공사가 5개년 계획으로 2025년에 완성할 계획으로 진행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지치봉굴옆에 류씨 제실을 후손(명수)나주정씨한테 팔았다함. 첫재를 모실때 정시채 군수님 참석
기타사항
● 박씨제각(낙제공외손주 할아버지명으로 되어있다)1년에 한번씩 제를 지내는데 참석 ● 단합이 잘되고 공기 좋고 나눔이 좋다 ● 지치봉 굴속에 가정에서 막걸리를 만들었다가 조사 나오면 숨겨놓았다 ● 여렸을 때 놀이는 선산에서 배롱나무에 올라타 놀았으며 말타기,제기차기, 팽이치기,팔방,자치기등. ● 청천리 분구는 95-96년도에 되었다(분구 후 마을 집하장을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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