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리(廣山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으로 약 2km가량 진행하여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광천리와 발산리에서 이름을 따서 부른 광산리에는 현재 발산, 광천, 대척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광산1리에 속하는 발산마을은 밤나무골, 성넘어, 발산, 설장터로 이루어졌다.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서당골, 비석거리 등으로 불려온 밀양박씨 동족마을이었다.
지명유래
발산마을의 지명인 발산의 ‘발(鉢)’자가 바리때 발 자로써 중이 가지고 다니는 발우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전통적인 촌락 구조인 조리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발산이란 지명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성(城)터가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의 서쪽인 ‘고짓등’과 마을 입구인 현재 버스정류장을 ‘성넘이’라 하는데 이곳에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은 대천 마을에 속하지만 금산간척지를 바라보는 곳에 성이 있는 포구를 의미하는 성포(城浦)가 있다.
성(城)의 옛말은 ‘잣’이다. 성(城)자는 ‘土+成’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다. 이를 보면 城은 애초에는 흙으로 쌓았음을 알 수 있고 후에 돌로 쌓으니 석성(石城)이 되었다. 또한, 토성(土城)과 석성(石城) 이외에도 목책(木柵)이 있다. 이는 나무로 울타리를 막듯이 세워서 성의 기능을 하게 한 것이다. 이는 가정집의 울타리와 흙담과 돌담을 보면 알 수 있다. 흙으로 성을 쌓거나 나무로 발(鉢)을 쳐 은폐시설을 만들어 전쟁에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공간을 이름하여 ‘잣’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발(鉢)은 ‘중의 밥그릇’이다. 발(鉢)은 그 모양이 속은 옴팍하고 주위는 둥그렇게 막혀 있어 마치 난공불락의 성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지금도 ‘발을 친다’라는 말이 있듯이 옛날 ‘목책’을 세워 주민들을 보호하고 적을 방어했던 곳을 발산(鉢山)이라고 불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하여 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니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밀양박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설씨와 장씨로 보인다. 이유는 설씨와 장씨의 터라는 ‘설장터’가 있는데 이를 ‘소라테’로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도 박씨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들이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박씨 박만기이다. 박만기(자-규일, 호-초은)는 밀양박씨 족보에 생몰연대는 나오지 않지만, 대략 17세기 중엽에 이 마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도 ‘1680년경 충남 천안에서 살았으나 잦은 흉년으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마을 앞에는 바다가 인접해있고 지세가 좋아 500년 이상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여 정착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 양성이씨가 입향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형국은 발산이라는 마을의 지명에서 유추된다. 즉, ‘鉢(바리때 발)山’이란 지명에서 나타나듯이 마을의 지형이 중이 가지고 다니는 바리때 곧 발우 모습과 같다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마을의 풍수지리에 의한 마을형국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촌락구조에서 나타나는 조리형이라고 말하는 와우형(臥牛形)이다. 산을 의지하여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편안하고 안전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명칭은 원래 발산리로 나오며 이후 함평현에서 무안군으로 행정구역을 달리하면서도 계속 같은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온 기록을 보면 이 마을의 행정구역은 원래 함평현 해제면에 속했으나,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광천리, 발산리로 변경되었다. 1917년에는 해제면 광산리, 광천리, 발산리, 대천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대로 해제면 광산리에 속한 발산마을로 표기되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출발한 동족마을이었으나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교통과 물류의 요지인 마을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래 발산마을에 속했던 성포 등의 포구 근처에서 금을 채굴하기도 하면서 화통한 마을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속된 말로 그때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흥청거렸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이 화목하여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지만 원주민들의 텃세가 전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주요시설
발산길, 발산소공원.
마을변화
현재 마을 주민들은 전통적인 벼농사와 함께 양파, 양배추 등의 지역의 농특산물 농사와 함께 일부는 낙지잡이 등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노인회에 소속된 노인이 2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발산마을회관 겸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마을 아래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배를 매었다는 쥐염나무가 있다. 당산나무라고 여겨지는 큰 당목으로 나무 둘레가 대략 3m 10cm가 넘는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고짓등 아래에 마우촌(馬牛村)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 외에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뭇골, 감나무재, 감남제(시목제라고도 한다)가 있다. 마을 앞에 동발섬과 동섬(똥섬)이 있서, 뒷골안산, 바깥안산, 독새청, 잿등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독새청은 모래가 쌓여서 이뤄진 곳으로 마을에서 신등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이곳에는 도깨비가 자주 나타났던 곳이라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륵당산은 이 마을에서 전통적인 당산제가 진행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의 당산석은 입면을 형상화시킨 신앙물이란 점과 형태상 성기바위를 모사하고 있다는 특색이 있다, 이는 당산석이 선돌에서 상징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또한 일반적인 당산석의 경우 마을제사에서 주신으로서의 기능을 갖는 신체는 원래 상태의 암석과 당산나무, 당집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발산마을 당산제에서는 좀 더 발전된 단계로, 신체 그 자체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렇듯이 무안지방에서는 대개 당산나무(노거수), 선돌, 당집 등을 대상으로 마을의 당산제를 지내는데, 발산마을에서는 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당산석 2구를 제사의 주체로 삼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한국전쟁 전까지는 매년 정월 보름에 성대하게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인 미륵당산이 있는데 ‘장승’ 또는 ‘당산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당산은 농지를 사이에 두고 200m 간격으로 서 있는 ‘할매당산’과 마주하고 있다. 이 당산이 있는 자리로 보면 예전에는 바다였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지형으로 보았을 때 미륵당산이 있는 자리는 마을 뒤 고짓등에서 흘러 내려온 맥을 타고 모퉁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마을 앞길은 강산에 있는 원갑사와 지도로 가는 주요 도로였기 때문이다. 할매당산은 조그마한 당산나무 옆에 서 있다. 미륵당산은 원래 갯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세운 것이며, 농지를 정리할 때 약간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미륵당산은 면이 거칠게 부식되어 있었다. 네모난 돌기둥에 어렴풋이 전면에 묘의 석인(石人)에서 볼 수 있는 의습(依習)의 형태가 선각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미륵이라고도 부르는 당산할아버지는 턱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두툼한 긴 수염이 그려져 있다. 풍화 작용이 심하고 거친 입자의 돌 때문에 세부적인 조각 수법은 알아볼 수가 없다. 길쭉한 얼굴은 가는 선만으로 윤곽을 표현해 입체감이 떨어지고,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불상과 비슷한 면이 보인다. 신체는 더욱 간결한 선으로만 옷의 주름을 표현한 듯하다. 머리에는 벙거지를 씌워 놓았는데 몸체와는 분리되었던 것을 시멘트로 접합한 것 같다. 예전에 관리가 되지 않아 한때는 모자가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석상을 본 느낌은 조형물로서 예술성은 떨어질지라도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익살스러운 느낌이 든다. 어느 시기에, 어떤 사람들이, 왜 이곳에, 무슨 의미로 이 석상을 세웠을까? 그러나 안내판에는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 정보가 없다. 도에서 지정한 문화재이니만큼 전문가에게 해석을 의뢰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당산 할아버지로부터 200m 거리에 있는 당산할머니는 별다른 조각이 없는 자연 입석으로 그 형태상 특징을 찾을 수 없어서 초기의 입석 형태를 보인다. 반면, 당산할아버지는 조각을 새긴 상징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자연 입석을 형상화한 신앙물에서 차츰 생식기 모양을 새긴 입석 형태 상징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외에 마을 주변에서 오래전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서당골 등 마을 주변에서는 숟가락 그릇 등 예전의 생활 도구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60년대~70년대에는 도굴꾼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마을에는 강대연(1897-1973) 선생을 기리는 <풍은강선생기적비>가 1985년에 세워졌고, 비석골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1865년에 세운 <군수이공현익휼민선정비>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예전에 이 마을은 해제에서 지도록로 가는 길목이었다. 대천동 앞길을 지나 ‘솔갯재’의 비석거리를 넘으면 마을이 나온다. 이어 ‘독새청’을 지나 강산을 거쳐 지도로 가는 길이 있다. ‘비석등’에 군수 선정비와 마을 앞의 ‘당산미륵’ 그리고 독새청의 주막이 있었다는 것은 예전에 이 길이 지도로 가는 큰길이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