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리(廣山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으로 약 2km가량 진행하여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광천리와 발산리에서 이름을 따서 부른 광산리에는 현재 발산, 광천, 대척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대천은 광산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대천, 신촌, 성포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원래 마을이름은 ‘큰샘께’ 또는 ‘더너물’이라고 했다. ‘더너물’이란 지도에서 해제로 갈 때 솔갯재를 넘어 조금만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란 뜻이다. ‘큰샘께’로도 불렸는데, 이는 ‘물이 잘 나오는 샘 주변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러다가 현재의 대천(大泉) 마을로 바뀐 것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처음에는 물이 좋은 큰 샘이 있어 ‘큰샘께’라고 하였으나, 이후 더 많은 물이 넘쳐흐르라는 뜻에서 ‘더너물’이라고 부르다가 광복 이후 ‘대천(大泉)’으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김해김씨가 먼저 들어 왔으며 이어 옆 마을 발산에서 밀양박씨가 들어온 이후 점차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곳곳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와 돌촉, 토기 등이 발굴되어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살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봉대산의 맥을 이은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안산은 솔갯재가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는 성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목포로 나가는 포구였으나 간척으로 현재는 농지가 되어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해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와 1912년의 자료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 처음으로 광산리 대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참조해보면 마을 형성은 1900년대를 전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온 기록을 보면 이 마을의 행정구역은 원래 함평현 해제면에 속했으나,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광천리, 발산리로 변경되었다.고, 1917년에는 해제면 광산리, 광천리, 발산리, 대천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대로 해제면 광산리에 속한 대천마을로 표기되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해제에는 원래 금 채취와 관련된 지역이 많다. 봉대산 아래에 있는 용홍마을에는 12개의 굴을 팔 정도로 금이 많이 나왔으며, 이성산에는 약 5개의 금굴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양간다리에서 개니로 올라가는 길의 구간에서는 사는 집의 방독 밑까지 팔 정도로 한때 금 채취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수량이 풍부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흐르는 개천에서 사금이 나오는 광천마을에서는 금채취 열풍 곧 ‘노다지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당시 금 1푼이 소주 1병 값과 같고 건장한 성인의 하루 일당과 같았다. 논밭이 없는 이 마을주민들은 금 채취로 가정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현재 성포에 사는 주민 중 상당수는 그때 금을 채취하러 들어왔다가 주저앉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금을 채취했던 곳은 현재 농경지가 되어있다. 성포에 간척이 되기 전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목포로 가는 여객선이 운항하였던 곳이다.
주요시설
용덕사.
마을변화
마을은 해제면에서 최초로 ‘범죄 없는 마을’에 선정될 정도로 주민들 간에 화합이 잘 되었고 분란이 없었다. 후손이 없는 집이 있을 때는 주민들이 전부 나서서 낮에는 자기 일하고 저녁에 시간을 내어 돕기도 했다. 6.25한국전쟁 때에도 지도에서 해제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의 위치상 큰 피해가 예상되었지만 한 사람의 주민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단합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1955년 마을 청년들에 의해서 기획 공연된 연극 <심청전>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세 차례나 연장 공연될 정도로 주변에서 호평받았다. 당시에 국가에서는 전쟁 이후 국민의 의기를 신장하고 재건과 계몽을 나타내는 정책을 펼쳤다. 이 마을에서는 국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연극 등 단합된 힘으로 마을 발전을 꾀했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이러한 전통과 문화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대천마을회관, 대천마을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성포(城浦)는 성이 있는 포구라는 의미인데, 토성지(土城地)가 있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주민들은 석포(石浦)라고도 하는데 뒷산이 전부 돌로 이뤄진 산으로 해방을 전후해서 커다란 금점(金店)이 운영되었다. 대천저수지에서 성포 앞까지 금맥(金脈)이 형성되어 있어, 주민들은 사금(砂金)이나 노다지를 채취하여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당시 주민 중 산지기를 하던 사람은 사금을 채취하여 이사하였는데, 이사할 때 가마니로 돈을 싸 갔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다. 속된 말로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흥청거릴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거주하는 주민 중 한 사람은 1량짜리 금덩어리를 채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큰샘께’ 곧 ‘물이 잘 나오는 샘 주변의 마을’이란 뜻의 지명을 지닌 대천마을에서는 샘 주변에서 벌어지는 ‘마을 샘굿’을 크게 했었다고 한다. 그 큰샘은 지금도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의 길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비록 집집마다 지하수 개발로 샘물을 사용하지 않아 잡초가 우거져 있지만, 예전부터 지내오던 마을의 샘굿을 주민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물, 유적
1986년에 작성된 목포대학교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천 마을 좌측 남서 방향으로 유물산포지가 있다. 이곳에서 1986년 트랙터작업 중 석촉 1점과 석부 5점이 출토되어 광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질무문토기편과 대패날 1점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솔갯재 능선에서도 개간 작업을 하는 도중에 많은 양의 석기(石器)가 발견되었다도 한다.
또한, 마을에서 발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솔갯재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사망다불’이라고 불리는 서낭당이 있었다. 그리고 성포에는 함평노씨 제각인 세모재가 있는데, 출입문이 세 개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191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주변에서 보기 힘든 구조인 독특한 양식의 제각이다. 관음골에는 1965년에 세워진 용덕사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자유당 정권 시절에 마을에 금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라북도에 사는 채광업자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다 정부에서 직접 개입하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장관이었던 임영신이 당시에는 보기 힘든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 미국 내 금 채광회사인 운크라와 손잡고 금을 채굴하기도 했다. 당시에 임영신 장관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내려온다고 해서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양간리에서 난장이 트였고 성포까지 가는 길가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하게 보초를 서기도 했다고 전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현재 성포 앞에는 넓은 농지가 형성되어 있다. 두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첫번째는 해제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 한국전쟁 이후 이뤄졌는데, 성포에서 용학리 이방마을까지 이어지는 간척공사였다. 두번째는 금산간척지 공사로 1950년대 일로의 나판수씨가 용학리와 죽도 천장리를 연결하는 매립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매듭짓지 못하다가 1965년 제주 출신 재일동포인 김문평(금산전자 사장)씨가 5억원을 투자하여 1982년에 완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