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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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사1리 해제면 신사 작성
  •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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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45세대, 인구수 79명(남 37, 여 42)
자연마을 구성
대사리(大士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칠산바다를 경계로 영광군 낙월면, 염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백학산(白鶴山, 126.3m)을 주산으로 하며 신사마을과 백학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대사1리에 속하는 신사마을은 대사리의 초입에 있는 마을로 함평노씨 집성촌이었던 마을이다.
지명유래
신사(新士)라는 마을 지명에 대하여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처음에 흰새가 들어오는 의미의 ‘흰새래’라 불러오다가, 숙종 때 노유성이라는 선비가 새로 이룬 마을이라 해서 새로울新 선비士 그리고 올來를 따서 ‘신사래(新士來)’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래(來)자를 빼고 신사라고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원래 남평문씨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살지 않고 문씨 소유의 문중산 등의 흔적만 남아있다. 마을 왼쪽의 몰맷등 또는 말맷등이라고 부르는 지명으로 보았을 때 함평노씨가 들어오기 전에 전염병이 돌았거나 변란이 있었지 않았는가 추정된다. 입향조는 함평노씨 노유성(魯有聖, 1621~1698, 자-희고, 호-서은) 공으로 마을이름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공은 함평군 월야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학문에 힘써서 일가를 이루었다. 효종 때 북벌을 위한 준비에 공이 병량을 납입하여 도우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중림찰방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 숙종 15년)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화를 피해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 슬산 아래 집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그의 무덤과 비석 그리고 제각인 영수재는 학암마을에 있으며, 자료에 그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백학산 줄기인 제재봉을 주산으로 하는 이 마을은 큰 마을과 작은 마을 그리고 한아지 마을로 이루어졌다. 제재봉은 주민들이 분산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노씨와 슬산마을의 함평이씨 소유의 산으로 이뤄진 이 봉우리는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형국 덕분인지 마을은 천석꾼이 날 정도로 부유하였다. 함평노씨가 대성(大姓)으로 백학산 일부와 학송리 농지 대부분을 소유하였다. 그 가세로 고시합격자 3명 등 학계, 재계 등에 유명한 인물과 목사 10여 명 등을 배출하였다.
마을성씨
함평노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은 원래 흰새가 온다는 뜻의 ‘흰새래’에서, 새로운 선비가 온다는 ‘신사래’ 또는 ‘신사내리(新士內里) 그리고 여기에서 현재의 지명인 ‘신사’마을로 개칭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지역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의하면 함평현 해제의 신사내동, 신리에 속했다. 이후 1912년에 무안군 해제면 대치동, 신사동으로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사(新士)라고 불러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삼면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반도형의 지형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벼농사는 물론 무안의 농특산물인 양파와 양배추 등의 밭농사(20가구)를 지으면서 또한, 바다를 대상으로 낙지잡이와 김양식 등의 어업(9가구)을 더하여 반농반어(半農半漁)를 주업으로 하는 부지런한 마을이다. 따라서 시기별로 부침이 없지 않으나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마을로 주민들의 생활 자체가 활발한 생기가 돌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주요시설
서해랑31번길, 닭머리항 등
마을변화
백학산을 앞으로 안고서, 안에서는 농사를 짓고 밖의 바다에서는 어업을 하는 전통적인 반농반어의 마을이었다. 학산사와 관란재 등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백학산, 닭머리항, 다드락섬 등의 자연경관과 특히 최근 개통된 서해랑길 31번길 등의 관광콘텐츠가 더하여 자연생태관광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영농조합, 서북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겸 경로당. 대사교회, 백림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옆에는 안산이 있고 안산에서 조금 불거져나온 곳에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누에머리’가 있다. 예전에 이 누에머리에다 유산각을 지었다가 생물의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서 철거했다. 누에머리 주변에는 경지 정리된 농지가 있으며 농지 너머엔 자연적으로 형성된 모래톱 둑이 있다. 이 둑을 솔바탕이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있어 해풍을 막아 주었으며 풍광이 아름다웠다. 이처럼 마을의 모래톱은 지형적인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바닷가 마을들이 간척사업을 통해서 농지를 형성한 데 반해, 이 마을은 모래톱이 둑 구실을 해 자연스럽게 농지가 형성된 것이다. 이곳에 울창하게 자라던 소나무들은 몇 해 전 솔잎혹파리의 피해로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또한 근처에 농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도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큰골, 작은골, 수랑골, 전주최씨의 문중산으로 옷과 밥이 나오는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옷밥골. 범성골, 재눈고지, 중의 바랑과 같은 형국이라서 붙여진 중열이잔등, 건너물, 작은몰들, 소루목, 장군묘, 작은 주막 뒤에 있는 유기냇골 등의 지명이 있다. 또한, 마을 동쪽에는 유기그릇을 구웠다고 알려진 유기골이 있으며, 한아지 마을 뒤에는 범바꿀재가 있고 동쪽에는 엉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서 매년 2월 1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당산나무 주변이 넓어서 줄다리기, 샘굿, 거리굿 등을 함께 하는 등 마을축제를 크게 지냈다.으나, 현재는 제물만 차려놓고 당산제를 지낸다. 학산사 밑에는 제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정절당(旌節堂)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매년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낸다.
유물, 유적
봉대산 일주로에서 슬산마을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들어오면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산 밑에는 관란재와 학산사가 나란히 위치한다. 관란재는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노연백 선생이 1914년에 건립하여 호서과 호남의 선비들에게 강학하였던 정자이다. 두 건물 사이에는 1934년에 세운 ‘관란선생노공망곡단비’가 있다. 관란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처음 지을 때는 대단히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특한 구조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규모이다. 실제로 무안군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정자로안에는 명정 2개가 모셔져 있으며 4개의 현판이 있다. 삼문이 있으며 마당에는 아름드리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학산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나주군 문평면 원리에 세워졌는데 그때는 노신의 호를 따서 악은사(岳隱祠)라 불렸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16년 노연백에 의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배향된 분은 5분으로 악은 노신(1336~?)은 고려조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이며 홍건적 퇴치의 공으로 함풍군에 봉해졌다. 금계 노인(1566~1622)은 이율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공신이며, 관암 노홍(1561~1619)은 임란 공신이다. 또한, 구한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경당 노일상(1842~1912)과 관란재 노연백(1849~1920) 공과 함께 다섯 분을 모셨다.
설화
마을에 ‘농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마을 뒤 분산등 위에 있는 ‘한새바위 또는 학새바위’라고도 하는 곳에 얽힌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마을의 주민 한 사람이 한새바위에 목숨을 위탁하여 매년 농바위에 치성을 들이고 있다고 하는 개략적인 내용으로, 자세한 사항은 추가 조사가 요구된다.
기록물, 문헌
마을에는 100여 년 전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동계책과 계책(1915년에 작성)이 남아있다. 안타까운 것은 관란재나 망곡단비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점과 함께 나라로부터 받은 명정 두 기 역시 허름한 정자 안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마을에는 해사 노병전 선생의 교은비와 노병순효행비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에 있는 ‘관란선생노공망곡단비’는 관란 노연백 선생이 운명하자 1934년에 후손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노연백(魯淵白. 호-관란재) 선생은 해제의 기개 높은 선비로 널리 존경받았으며 선현을 모시고 후학을 가르쳤다. 또한, 불우한 자를 돕고 스승과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모범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과 기질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당에 다닐 수 없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였던 것이 한이 되어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모았다. 후에 사재를 털어 마을 앞에 서당을 건립하고 서적을 구하고 훌륭한 스승을 맞이하는 등 후세교육에 힘썼다. 또한 관란 선생은 189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 면암 선생을 찾아가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할 것을 서약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다가 왜군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한편 고종이 돌아가셨을 때는 거동을 하지 못하면서도 가마를 타고 뒷산 제재봉에 올라가 슬피 우니 모두가 감탄하였다. 후일 함평노씨 문중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1868년에 훼철된 악은사를 1916년 후손들이 많이 사는 이곳으로 옮겨 와 정성으로 선조를 봉양하였다. 이외에 현대의 인물로는 윤성민 전 국방부장관이 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일가가 양간다리 근방으로 이사하고 타지로 떠나 현재 후손은 살지 않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2010년 3월에 마을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제재봉을 둘러싸고 있는 노씨 소유의 묘에 쇠말뚝을 박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대체로 부부가 함께 사는 세대의 묘만 골라 말뚝을 박은 것이다. 지금까지 누가 무엇 때문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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