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湖라는 지명의 유래는 마을을 이룬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 와서 붙여진 지명이란 것과 주변에 호수가 있어서 唐湖라 했다는 설이 있다.
신흥동은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나주임씨 입향조가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던 나주임씨 林 瑋(자-平仲, 호-東里. 1597-1668)는 柳湖 林 悏의 둘째 아들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성품이 침잠순후하고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다. 학문이 높았음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늘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마을에 취련당을 짓고 기거하면서 형인 목사공 몽촌 임타가 있는 일로읍 회산의 관해정에 오고가며 정을 나누었다. 자료에는 ‘신흥동과 회산은 牛鳴地(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위가 지었던 취련당은 6칸 팔작지붕의 저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堂號도 없어지고 사랑채가 뜯겼으며 몸채를 현대식으로 개축하는 등 형태가 많이 변하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과거 양반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사랑채는 그 구조와 배치가 독특하다.
임위 공은 취련당에 관련된 詩 [題醉蓮堂]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주임씨가 물러나고 이후에 들어온 사람이 밀양박씨 박연우(자-원택, 호-매산. 1883-1943)이다. 공은 이웃 마을 일로읍 복룡리 사교 마을에서 이주하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마을일을 보면서 농산물 경작부분에서 전라남도 1등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선산임씨 임학규씨가 들어왔는데 족보를 통해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현재 나주임씨는 한 가구도 없고 밀양박씨와 선산임씨 등이 살고 있다. 해서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박씨로 볼 수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개꿀재(일로읍 복룡리 사교마을에서는 元驪峰이라 부르고 있다)를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이 펼쳐져 있으며 좌우로 맥을 갖추고 있어 전형적인 소쿠리형의 구조다. 마을 주변의 산림이 개발이 되기 전에는 배산임수의 아늑한 풍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마을성씨
밀양 박씨, 선산 임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마을 주변에 널따란 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풍요로움과 광활함을 준다.
농민들에게는 경작할 땅이 없어 매우 힘든 지역이기도 했다. 낮에는 강에서 맛과 게를 잡고 저녁에는 가마니를 짜 어렵게 생활을 해온 것이다. 마을 풍경만 보고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도 10년을 넘어서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변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60년대 70년대 한해 때 유채를 많이 재배해 유채기름을 생산해 가정경제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당시 유채기름을 짰던 곳이 취련당 앞에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80년대 중반부터 소[牛] 등 축산을 하게 돼 부농을 일구기도 하였다. 지금은 농사 외에도 부추 농사를 하여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황복, 장어 등 먹거리가 풍부한 바다가 있었다. 풍족한 어장이 간척으로 사라져 먹고 살기에 좋지 않아 졌다.
일제강점기때 간척지를 1차로 막았고 하구언을 막아서 둑이 생길 때 전 주민에게 1500평을 주었다. 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땅을 주었다.
일로가 생활권이고 주요 교통수단은 명산역을 이용한 기차였다.
주요시설
마을 옆에 있는 당호저수지는 소화7년(1932년)에 1차 완공하고 광복 이후 증축하였다. 이 저수지는 일로읍에 조성되어있는 영화농장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마을 앞으로 수로가 지나가지만 주민들은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해서 저수지 밑에 농지가 있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밭농사를 지어야 했다.
일본인들이 처음 저수지를 축조할 때 땅을 파는데 해골이 많이 나왔다. 이 해골을 공사 감독자가 보고 안 묻어 주고 발로 차버려 그 감독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또한 취련당 주변에는 두 개의 방죽이 있었다. 큰 방죽은 취련당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있었는데 수심이 깊고 수량이 많았으며 늘 물이 넘쳐흘렀다. 67·68 한해 때는 이 물로 마을 앞의 농사를 다 지었다고 한다. 작은 방죽은 앞샘이라고 부르는 마을 공동샘 주변에 있다. 작은 방죽에는 늘 연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앞샘과 모퉁아리 샘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부추, 벼, 가마니를 짜고 수산물을 잡아 생활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는 널따란 영산강 간척지가 펼쳐져 있어 개방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을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 주변에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 편안함과 아늑함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동/식물
당산나무는 불이 나서 고사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일제강점기 때 몽탄에서 목포로 가는 기찻길에는 두 개의 재가 있었다. 이 마을 뒤의 개꿀재와 삼향읍 용포리의 무너미재다. 이들에게는 일제강점기 때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꿀재는 철도공사를 하는데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바위가 없는 흙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공사를 했는데 파고 보니 바위 투성이었다. 바위를 파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굴은 내지 못하고 주변을 파 협곡을 만들어 철로를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진짜 굴이 있는 재가 아니라 거짓굴의 재라 해서 개꿀재라 했다. 무너미재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오룡산의 맥을 이었기 때문에 바위 투성인 줄 알고 공사를 했다. 그러나 굴을 파는 과정에서 바위는 나오지 않고 흙만 나와 자주 무너지자 굴을 뚫지 않고 협곡으로 만들면서 무너미재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당호저수지 옆의 학전동 뒷길인 여시재, 마을 앞산의 끝 자락인 도롱골, 앞산 너머 현재 한우를 사육하고 있는 맥차골 산꼬지 텅텅머리 초당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강에 사람이 빠져 죽으면 혼을 건지는 예식을 하고는 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파군다리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저수지를 만들 때 해골들이 출토되어 초등학생들이 발로 차기도 했다고 한다.
예전에 쌀이 귀하던 시절 가마니를 무겁게 짜서 쌀이 조금만 들어가게 하기도 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주민들이 서로 단합하고 협동심이 강해 아직까지 큰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조그만 마을이지만 예부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나주 임씨가 있을 때는 9명의 진사가 나온 곳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이어 밀앙박씨 가문에서는 경찰서장 1명과 고시합격자 1명, 선산임씨 가문에서 3명의 고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마을 분들은 선량하고 악의가 없어 평화로운 마을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2015년 12월 초에 찾아 본 마을은 어수선 했다. 마을 앞으로 도청과 나주 혁신도시를 잇는 도로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사의 후유증으로 마을의 지하수가 말라버려 이의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