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峙라는 지명은 몽탄에서 무안읍으로 가려면 내리를 거쳐 마을 옆으로 해서 넘어 가는 큰 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지금과 같이 무안으로 가는 큰 길이 나기 전 일로나 몽탄 그리고 나주 동강에서 무안읍을 가려면 마을 뒤의 큰 재를 넘어야 했는데 큰 재에 해당되는 마을이라 해서 한재[大峙]라 했다. 아래쪽 지역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이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이천 서씨 입향조는 공수동 마을 徐崇老의 아들인 義臣(자-충여, 호-진일재. 1471-1544)이다. 이천 서씨가 들어오기 전에는 나주나씨, 함평노씨, 탐진최씨 등 여러 성씨가 살았으나 입향조로서 정의하기는 무리가 있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나주 나씨들이었다. 현재 대치저수지 아래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도 나씨들의 사당 터가 남아 있다. 이어서 탐진최씨가 월산사 옆 항동골이라는 곳에 정착하였으며 함평노씨도 마을 입구의 교회주변인 벚나골에 정착하였는데 세 성씨 모두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앞으로는 대치천이 흐르고 있으며 뒤로는 승달산이 동북쪽으로 힘차게 뻗은 연징산의 맥을 이어받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반월산이 마치 마을을 감싸 듯 벌려있으며 풍수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를 취하고 있다. 앞에는 솔대봉(봉암마을에서는 봉암이라 한다)이 지켜보고 있어 이러한 지세 때문에 ‘안고랑 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성씨
한재는 대치1리에 속하는 마을로 이천서씨 집성촌이다.
현재도 서씨 집성촌이라 할 수 있으나 김씨, 박씨 등 타성도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대치리, 탑동리 화표정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로,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에도 대치리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대치리 한재 봉암 장동으로 표기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대치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리를 합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한재를 넘어 초당대 인근을 거쳐 무안장에 다녔다. 양마 사람들도 이 마을을 통해 한재를 넘는 길을 무안가는 길로 이용했다.
80년대 까지 큰한재, 작은한재골을 많이 이용했다.
마을에서 연징산에 오르는 길도 많이 이용했다. 또한 백제고를 넘어가는 산길과 태봉으로 가는 길도 있었다.
주요시설
상여집(서당골)이 있었으나 장례식장들이 생기면서 사라졌다.
마을변화
마을에 작은 가게가 2000년대까지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월산사 아래에 통샘이 있다. 용천수로서 68년의 대 한해에도 마르지 않았던 샘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샘이다. 샘 옆에는 1989년에 지은 통천팔각정이 있는데 그 안에는 석판으로 된 ‘통천팔각정기’와 ‘조국산하’ 라는 4언시 등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팔각정 옆에는 “통천용수만세유원‘이라는 간판이 있다.
마을 뒤 연징산 정상에는 옹달샘이 있어 새해맞이 행사도 진행하고 음용수로 사용했었다. 현재는 오염으로 사용하기 어려워 졌다. 정자와 헬기장도 있다.
마을 주민들은 통샘이 5개 있었다고 기억한다.(서로 기억을 모아서 숫자를 세어보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마을 입구에 500년이 되었다는 규목(槻木)나무가 있다. 괴목나무로 더 알려진 이 나무는 느티나무과로 알려졌으며 대체로 당산목으로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나무다. 이 마을의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여겨지는데 수형이 잘 잡혀져 있으며 둘레가 5미터 10이 넘는다. 나무 아래에는 세 개의 입석이 서 있다. 4년 전까지 이 나무 아래서 농악놀이를 하며 주민들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잔치를 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4년(백창석 원장님 조사시점 기준) 전까지 이 나무 아래서 농악놀이를 하며 주민들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잔치를 하기도 했다.
최근까지도 당산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통샘물과 한재를 이야기하는 노래가 있다.
- 정남순 85세, 39년생추정
유물, 유적
이 마을에서는 세 곳의 분청자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대치저수지 주변의 도요지와 월산사 옆의 도요지, 그리고 마을에서 대치저수지로 가는 중간 쯤에 또 하나의 도요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가마터와 조화 덤벙 귀얄기법 등의 많은 분청자기 파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한 마을에 많은 도요지가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으나 이 마을의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울창한 산림을 포함한 주변 여건 등을 감안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천서씨의 재각인 月山祠가 있다. 마을 뒷산인 반월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祠宇는 1752년(영조2) 이천서씨 후손들에 의해 구거지인 반월산 서쪽 기슭에 창건하여 절효공 서릉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오랜 풍우로 건물이 퇴화하자 1829년에 반월산 남쪽 기슭,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였는데 이때 사암 서식 그리고 이 마을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를 추배했다. 그 후 훼철되었다가 194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월산사는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지만 아래에 있는 모사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매년 음력 9월 5일에 지역의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모사재 재각의 기둥 중 하나는 총지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앞 마을인 양마 마을의 재각인 연궐정에도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데 기둥 중 하나가 총지사가 폐사되면서 나온 칡나무 기둥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반월산 뒤에 오래된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찰이 폐찰 되면서 그곳의 기둥을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서도 5개가 있었다고 했는데 경지정리 등을 하면서 묻어버리거나 깨 버려 지금은 3개가 남아있다. 대치저수지 주변의 골짜기를 한작골로 부른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김해김씨절효비가 있다. 김해김씨의 절효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18년에 건립한 것이다. 몇 년 까지 있었던 비각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비석만 세운 것이다. 비의 전면에는 ‘고학생서학권처김해김씨절효비’라 명문되어 있다. 특히 이 비의 주인인 김씨는 저녁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남편을 뒤쫓아가며 “내 남편 내 놔라. 내 남편 내 놔라”하면서 끝까지 호랑이를 쫓아가 남편의 시신을 찾았다는 설화를 안고 있다.
※ 주변을 동백나무로 꾸며 두었는데 그것이 마을사람들의 통행에 방해되고 시야를 가려 위험하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고 서만종씨(625참전용사, 농악놀이)
- 당산제와 농악놀이를 이끄시다 편찮아지면서부터 그 명맥이 사라졌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면장, 산림조합장을 역임하신 서삼종씨가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도자기 파편들을 연구하기 위해 도자기를 조사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다녀갔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만남의 길 조성으로 오토바이, 자전거 동호인들이 많아 마을 앞길 위험하고 시끄러워졌다.
마을 주민들이 그 길을 이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손해가 더 큰 사업이다.
주민요구사항
연징산에 오르는 산책로가 몽탄 쪽에만 없다.
몽탄 방향(한재)에서 오르는 산책로를 조성했으면 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몽탄은 낙후되어 약국, 병원, 마트, 야간식당, 택시 등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 몽탄은 교통이 불편하여 차량이 없으면 살기 힘든 곳이 되었다.
옆 마을인 봉암마을은 서삼석 국회의원의 조부님이 사시던 곳이다.
기타사항
타지에서 들어오고자 하는 분들도 많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최근 이주해 오는 분들은 마을일에 관심 없이 개인적인 생활을 많이 해서 마을 입장에서도 관심이 없고 소개시켜주지도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