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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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산1리 몽탄면 명산촌마을 작성
  • 명산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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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70호에 이르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40호 정도가 산다.
자연마을 구성
나룻깐, 취락구조마을, 까치머리, 명호, 명산촌
지명유래
明山里는 삼불산을 주산으로 하고 영산강을 사이로 나주 동강면과 마주하고 있다. 몽탄대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이곳의 몽탄 나루를 통하여 나주를 왕래할 수 있었다.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명호동과 도산의 이름자를 따서 명산리라 했으나 동쪽에서 해가 뜨면 아주 밝은 곳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 아침 해가 뜨면 아주 밝은 마을이 된다 하여 명산촌이라 이름하였다. 실지로 주민들 중 한사람은 해뜰녘에 느끼는 마을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라고 자랑한다. 마을 뒷산 중턱의 바람재골(또는 바랑재골)에 ‘바람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 다니는 신도들이 부처님의 가호를 많이 받았기에 밝은 절이 있는 곳이라 하여 ‘明寺村’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5개 마을 중에 명호 마을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맑고 깨끗하다 하여 맑은 물이 흐르는 호수라는 뜻으로 ‘明湖’라 부른다. 지금은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농지가 되었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왔다. 또 마을 뒷산의 풍수적인 특징으로 明湖가 아닌 明虎 또는 猛虎라 쓰기도 한다. 나룻깐은 나주로 건너다닐 수 있는 나루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취락구조마을은 1980년대 주거개선사업으로 들어선 마을이며 까치머리는 마을의 지형이 까치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인 박자둔(朴自遯. 호-南隱)은 영의정의 후손이다. 즉 광해군 때 영의정이었던 박승종(朴承宗, 1562 - 1623. 자 - 孝伯, 호 - 退憂堂, 시호 - 肅愍.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신. 광해군 때 우의정·좌의정,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인경 일당이 인목대비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했으며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인조반정 때 큰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이 서울 팔판동에서 살다가 인조반정으로 자결하자 자손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박승종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던 박자둔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길을 찾다가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정착하여 농업과 어업을 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박자둔은 명문의 후예로서 시대의 어려움을 만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이곳에 묻혀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주민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려 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나룻깐 위의 밀양박씨 무덤에서 입향조인 ‘남은거사 박공지묘’의 무덤과 묘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명호마을의 입향조는 탐진 최씨 최상업(생몰년 미상. 하지만 그의 아들 최경직은 생년월일이 1641-1699이다)로 언제 어디서 어떤 연유로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화로 인해 유배되어 온 것이라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뒷산인 삼불산(仙佛山. 농바우산이라고도 부른다)은 젊은 중이 바랑을 짊어지고 예불을 하고 있는 호승예불의 자세를 하고 있고 영산강 건너편 나주 동강에는 외로운 옥녀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 형국의 옥녀봉이 있다. 삼불산 주변에는 목탁봉이 있고 바랑재골이 있다. 또한 예로부터 삼불산 주변에 정승이 나온다는 터가 있다는 말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혈처를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시대 때 승달산의 맥을 타고 영웅이 나올까봐 삼불산 정상에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을성씨
예전에는 최씨가 많았지만 지금은 다양한 성씨가 모여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산리 명호동, 명암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명산촌 마을은 농지가 적어 일본인들에 의해서 영산강의 수산물이 각광을 받기 전까지는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시대 때 일본인들이 영산강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에 대한 가치를 알고부터는 마을 주변에 각종 기관이 들어섰다. 기차역을 비롯한 주재소와 무안뿐 아니라 목포와 신안을 아우르는 어업조합을 비롯하여 일본인 아이들만을 위한 소학교 그리고 장어통조림공장 두 군데와 해파리공장이 있었다. 또한 신사가 들어섰으며 기생이 있는 술집도 많았다. 당시에는 신사 주변을 포함하여 마을 전체가 벚꽃에 묻힐 정도로 봄이 되면 장관이었다. 해서 목포에서 찾아오는 관광인파가 길을 메울 정도였다고 한다. 영산강은 이 마을에 많은 소득을 안겨주었다. 참복이 산란철이 되면 떼로 몰려들어 영산포까지 올라간다. 뒤이어 서대가 떼로 몰려다니고 사시사철 잡을 수 있는 숭어는 고기반 물반이란 말을 실감나게 하였다. 뒤이어 민어와 농어 등이 어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이어 해파리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보름간 해파리 작업을 해서 1년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해파리를 저장하는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특히 숭어와 장어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영산강 주변에서 잡힌 고기와 비교할 때 그 맛이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뻘의 깊이는 6미터가 넘을 정도로 깊어 다른 곳의 고기와는 육질이나 향기에서 그 맛의 차이가 확연히 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맛이 명산장어를 무안의 5대 맛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시대 때 나룻깐에서 장어를 구우면 그 냄새가 온 마을을 덮쳐 주민들의 식욕을 돋웠다고 한다. 이렇게 주민들에게 부와 맛을 제공했던 영산강이 쇠퇴한 것은 나주에 호남비료공장이 들어서면서였다. 공장의 폐수가 영산강에 흘러내리면서 기름지고 생명력이 넘치던 강은 곧바로 죽음의 강이 되었다. 이어 영산강 둑이 막히면서 그나마 헐떡이던 강은 완전히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영산강을 터야 한다고 말한다. 해서 영산강이 살면 무안이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통조림 공장은 나룻깐에 있었다. 명산역을 이용하기 위해 주변마을 사람들은 물론 강건너 나주 사람들과 달산리 사람들 까지도 왔었다. 몽탄 소재지를 가는 지름길이 기찻굴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지나가다 기차를 만나면 도망가기도 했고 피신하는 작은 공간이 있기도 했다. 기차들도 의례 사람이 지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다녔다. 그럼에도 많은 사고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일로장을 다녔고 목포로 중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몽탄중이 생긴 이후 그리 다녔다. 명산역이 사라진 후 쯤 파군교에서 목포가는 버스가 있었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나루가 있다. 하나는 나주 동강과의 교통수단인 배가 다녔던 곳으로 나룻깐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가마에서 나오는 옹기를 날랐던 나루로 땟나루라고 부르고 있다. 나룻깐 위의 공원산이라 부르는 곳에 일본인 신사터가 있었다. 지금은 호반도로 공사 때문에 없어지고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나룻깐에 있던 샘물이 좋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물을 뜨러 다니기도 했다.
전통식품/특산품
명산은 일제강점기 때 가장 번성했던 마을이기도 하며 무안의 五味 중 하나인 명산장어로 유명하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현재 코스모스 길이 조성되어있는 도로 인근까지가 원래 뻘이었다.
동/식물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명산에서 도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당너맷재가 있고, 명호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세목산이 있다. 또한 까치머리 앞에 있는 들로 지사갯들이 있으며 일본제국주의시대 때 놓여진 철도가 통과하는 굴로 백락(벽력)처럼 소리를 지르고 도망한다고 해서 백낙굴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 가마터가 있었다. 현재 사창김씨 묘 아래에 경사진 곳이 그것인데 지금도 그곳을 파면 옹기 파편과 옛날 가마에서 볼 수 있는 흔적 들이 나온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시대에는 이곳에서 기와를 굽기도 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의 전 농가가 친환경 농사를 지어 2007년 친환경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1억원 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단합심이 좋은 마을이다. 젊은 사람부터 어르신까지 함께 반찬을 챙겨와 나누어 먹고는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영산강 도로가 개발되면서 마을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마을과 붙어서 길이 나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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