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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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명1리 몽탄면 노송정마을 작성
  • 노송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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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주민등록상으로는 80여명이 되어있으나 실거주는 60여명이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봉명리의 지명 유래는 里의 主山이 봉정산인데 ‘봉은 울어야 한다’ 해서 봉정산의 頂을 일제강점기 때 울 鳴으로 개칭하여 현재의 봉명리라 했다. 노송정은 입향조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주변의 울창한 노송림을 보고 마을이름을 ‘노송정’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이천 서씨 서상신(1637-1697. 호-만취정)이다. 이웃 마을인 대치리에서 태어난 공은 밀양박씨에게 장가를 갔는데 마을 뒤 송용동에서 결혼 첫날밤을 지냈다. 그날 저녁 꿈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편으로 조금만 내려가서 청결한 우물과 울창한 송림 간에 터를 잡으면 잘 살게 될 것이다’고 일러 주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천 서씨 동족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50여 가구 중 외가댁에 이사 온 송씨를 제외하곤 전부 서씨인 자작일촌이다. 입향조에게는 5남2녀의 7남매가 있었다. 그 형제 중 마을 주변에서 사는 3형제의 자손들을 각각 사기점 孫, 사옥동 孫, 개밧동 孫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예로부터 전해오는 승달산의 僧· 鳳· 梅· 月을 승달산 四寶라 하며, 인의산 梅花落地(매화낙지)를 뺀 나머지를 승달산 三寶라고 부른다. 즉, 승달산 山頂穴(산정혈)인 ‘호승예불’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비봉귀소)’,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운중수월)’형이 그것이다. 이 마을은 이른바 ‘봉황새가 오동나무 가지에 깃든다’는 소위 ‘飛鳳歸巢’의 혈을 안고 있는 봉정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이 혈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山川精氣가 호남에서 으뜸이며, 富貴와 五福이 速發하여 오래오래 지속되고, 석학과 賢相이 대대로 나오는 吉地로서 사·오천년 동안 발복하는 땅”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산에는 어유치(魚遊峙)라는 곳이 있는데 선조들이 그곳에 묘를 쓸 때 지관의 말을 듣지 않고 너무 깊이 파 잉어 두 마리가 달아나 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그때 혈처를 손상시켜서 發福의 기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 마을 입향조의 묘가 있다. 이 산이 명당이라는 사실이 주변에 너무 알려져 투장(偸葬- 남몰래 남의 묘지나 산에 묻는 매장. 盜葬, 암매장이라고도 한다)이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오래 전에 他地에 있는 사람이 몰래 이 산에 투장을 하다 주민들에게 들켜 마을 창고에 가둬 두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성씨
이천서씨 집성촌으로 중흥동과 같은 집안이다. 남천, 한재, 광암, 감돈 등에 자리잡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중흥동과 하나의 리였다가 분구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는 마을 앞에 농지가 많아 대단히 부유하게 살았다. 오죽하면 노송정의 논 1마지기가 목포 내화촌의 논 5마지기를 산다고 했을까.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감돈저수지를 막으면서 농지가 많이 잠식되어 대부분의 농토가 없어졌다고 한다. 해서 과거의 부유함이나 여유는 없다고 한다. 과거 파군다리 근처까지 모두 이천서씨 땅이었다. 말을 타고 세를 거두러 다니기도 했다.또한 볏집이 너무 많아 온가족이 동원되어 양장에서 싣고 오기도 했다. 마을의 모든 집들에서 조청, 산자 등을 만들었다. 그 문화가 이어져 내려와 특산품으로 만들어냈다. 과거로부터 엿이 유명했다. 과거 마을은 조금 더 높은 산기슭에 있었으나 농지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지어 살면서 현재 마을은 예전 농지터에 조성되어 있다. 그 결과 예전에 상여집은 마을과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 상여집 터는 마을 한가운데 있다. 양반촌이었던 노송정 마을에 평민들은 감히 장가올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과거 원님들도 마을 앞에서는 하마하여 걸어서 지나갔다. 몽탄남교로 다녔는데 오전반은 모두 이천 서씨들만 다녔다. 나머지 성씨들은 오후반에 다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무안군 최초의 마을자치회를 2023년 창립하였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조청, 엿 - 과거로부터 계속 전수받아서 만들고 있다. 풋마늘 - 처음으로 품질 좋은 풋마늘들을 생산해 가락시장 제품의 80%는 이 근방 제품들이다. 중간 상인들이 풋마늘의 가치를 알고 일로지역에 들어와 재배하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현재 마을 뒤에는 오동나무들이, 마을 앞 안산에는 대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곳에는 소나무들이 아주 많았다. 전에 보건소 지소가 있는 자리 옆에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소나무가 있었으나 보건소를 지으면서 소나무가 시들기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아 고사되었다. 또한 서씨제각인 조양재 주위에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으나 관리 소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고 없다.
동/식물
만취정 앞에는 의미 있는 당산나무 한그루가 있다. 입향조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 마을에 사는 3형제를 기념해 세 그루의 팽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30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한 나무인 것처럼 붙어 있어서 마치 후손들에게 화합과 단결을 가르쳐주는 선조들의 계시처럼 보인다. 나무의 둘레는 4미터 10이 조금 넘는다. 또한 만취정 안에 걸어놓은 ‘만취정기’에서도 ‘소나무가 울창하게 있어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으며, 당호인 만취의 뜻은 소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고 祖孫이 서로 도와 한결 같이 변하지 않음에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이곳 주민들은 하나같이 ‘마을이 화합이 잘 되고 서로 도운다’고 말한다. 예전에 마을에서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만취정 처마 끝에 달린 종이 울리자마자 한사람도 빠짐없이 진화 작업에 참여해 큰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마을에 불상사나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너나없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 힘을 모은다고 자랑한다. ※ 팽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 귀목나무라는 말씀이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는 남아있는 지명이 많이 있다. 마을입구의 조족지혈, 마을 뒤의 품더덕골과 양장리에서 넘어오는 고개인 진조치(참샛골) 등이 있다. 마을 왼쪽에 眞鳥峙라 부르는 참샛재에는 이름에 걸맞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 묘를 쓰면 노래도 잘 하고 말도 잘한다고 하는 유래가 있는 터로 실지 이 재의 후손들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 묘를 쓰면서 땅의 형국을 모르고 상석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집안이 이유 없이 우환을 당하자 새[鳥] 형국에 돌을 얹어서 그런다고 해서 상석을 치우자, 그때부터 우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가맷보가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보로 현재는 감돈 저수지의 수질을 개선시키기 위해 실시한 사업으로 없어졌다. 승달산 상곡수가 흘러내리면서 집수면적이 상당히 많아 다동, 봉곡, 통독, 청우 등의 물이 합수해서 삼각지가 되어 가매가 돌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밧골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안산 서쪽 아래의 골짜기로 산의 형세가 개[犬]의 암수로 되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민등매가 있다. 봉굴 아래에 있는 들로 들이 따뜻하고 북풍을 막을 수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복가샘은 민등매 옆에 있는 샘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사람이 항상 마실 수 있어 복을 가져오는 샘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 외에 통샘, 간댓샘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마을 뒤에 있는 등성이로 마을에 부유한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데 난리 때 도적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고 이 등성이를 따라 피난했다는 데서 유래된 사장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봉정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어르신 들이 10대였을 때 기억이 있으시다. 샘굿, 농악놀이, 당산제가 있었으나 25년쯤 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백중이면 마을에서 모두 함께 울력하고 식사하는 행사가 펼쳐진다. 그 행사의 유래는 과거 집집마다 일하던 일꾼들에게 이날은 먹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물, 유적
사옥동의 문동산 손이 지은 제각이 朝陽齋이다. 마을의 왼쪽 기슭에 있으며 1901년에 건축한 제각으로 팔작지붕에 4칸 구조이다. 이 제각은 마을 서당 역할을 했다. 마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제각은 만취정인데 입향조의 호를 따서 지었으며 1938년에 세웠다. 이 제각의 구조도 4칸에 팔작지붕이다. 이 제각은 마을사람들이 모금을 해서 지었다. 마을 동각의 역할을 했는데 자작일촌이어서 가능했다. 마을회관에는 이천서씨절효공파 파조이신 절효공 서릉의 가르침인 ‘居家十訓’이 걸려있다. 마을 중앙에는 1991년에 세운 ‘서기화선생시혜불망비’가 있다. 마을 뒤 봉정산 기슭에 나주임씨 소유의 산이 있다. 이곳에 봉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입구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이 불상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을 들이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 나주 목포 영암 등 많은 부녀자들이 찾아와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찰이 폐사되면서 석불에 대한 관심도 없어져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잊혀오다가 최근에야 주민의 제보로 발견하였다.
설화
서씨 집안이면서 술 못 먹는 사람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과거 마을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후손들이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다. 해서 시골 마을로는 드물게 서석종 서기화 등의 큰 학자를 비롯하여 정치인 서채종, 환경운동가 서한태박사 등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특히 의사출신 박사가 20여명이 넘을 정도로 전문 지식인들이 많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서한태 박사님과 함께 참여했던 2002~2003년 친환경대회에서 입상하였다. 부녀회는 면에서 주최한 강강술래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 주변 정화 활동과 더불어 폐비닐 수거를 맡아 판매하여 연간 300~400만원의 부녀회 예산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친환경마을, 장수마을로 선정되었고 마을자치회도 최초로 창립하였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에서 운영하는 엿공장이 있다. 농한기 마을주민들에게 소득을 안겨주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2024 수련마을 사업을 통해 마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안전, 도난, 쓰레기투기 등의 문제로 마을에 CCTV가 필요하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학교를 다니던 시절 부유했던 이천서씨 마을은 제 나이에 학교를 갔으나 인근 지역 마을들은 2살~8살 늦게 학교에 왔다. 그래서 동급생들이 나이가 같지 않았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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