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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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명2리 몽탄면 중흥동마을 작성
  • 중흥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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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개밧골 비사골 중흥동 배나무골 왓등
지명유래
봉명리의 지명 유래는 里의 主山이 봉정산인데 ‘봉은 울어야 한다’ 해서 봉정산의 頂을 일제강점기 때 울 鳴으로 개칭하여 현재의 봉명리라 했다. 개밧골은 지형이 개의 형상을 하고 있고 비사골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배나무골은 이목동이라고도 불리며 독배라 불리는 재래종 배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중심인 중흥동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주민들도 모르고 있다. 이 마을이 무안의 명산인 승달산과 봉정산을 바라보고 있어 언젠가는 크게 일어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동북쪽은 봉정산 서북쪽은 승달산이 있는데 봉정산과 승달산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중흥동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몽탄 일로 청계 3개면에서 제일 부자인 100석지기 부자가 있었다. 소작료만 100석을 받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을 가운데에 있는 집터의 사랑채는 무너지고 6칸의 본채만 남았다. 주민들은 중흥동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가운데서 크게 흥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이 부자집터를 중히 여기고 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에는 장수 황씨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 황씨 묘가 있기는 하나 돌보는 이가 없어 폐총이 되었다. 이후 대치리 한재에 살던 이천서씨 덕인(자-인중. 1532-1593)의 후손인 상인(자-여안, 호-영모정. 1624-1652)이 들어오면서 서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웃마을인 노송정은 상인의 동생인 상신(자-여성, 호-만취정. 1637-1697)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된 것이다. 해서 중흥동이 큰집 노송정은 작은집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전형적인 소쿠리형으로 와우형의 지세를 띠고 있다.
마을성씨
이천서씨 집성촌으로 타성은 한 가구도 없었다. 예전에는 48가구가 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었다. 현재는 타성이 많이 산다. 10여 가구가 등록되어 있고 실제 본마을 거주는 4가구 정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까지는 무안군 이로면 지역에 속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중흥동과 노송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명리라 해서 몽탄면에 편입되었다. 노송정과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으나 주민들의 요청으로 분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마을 앞길은 나주 사람들이 삼향장을 오갈 때 사용하는 장길이었다. 장길의 흔적으로 감돈저수지 아래의 배나무골에 주막도 있었다. 마을이 깊숙한 곳에 있지만 기운이 좋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한국전쟁 때는 주변에서 몸을 피하러 들어온 피난지이기도 했다. 짚신을 신고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가 너무 멀어 3일이면 망가졌다. 초등학교는 몽탄남교나 일로북초로 다녔다. 과거에는 남의집 일을 해주는 일꾼들이 집집마다 있었다. 하지만 63년 혁명이후 모두 공장으로 떠나버렸다. 마을에 방앗간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감돈리까지 쌀을 이고 가서 방앗간을 이용했다. 당시엔 리어카도 없어 사람들이 모두 쌀을 옮겨야 했다. 리어카가 생긴 이후 마을 사람들이 직접 곡괭이를 이용한 울력으로 리어카 길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쓸려나가서 다시 만들고 했다. 감돈리에는 주막이 네 곳 있었고 이발소가 있었다. 그 주막들에서는 도박이 많이 벌어졌다. 주막에서 도박으로 땅을 빼앗기는 사람이 많았다. 중흥동에서도 가정집에서 도박을 했으나 마을에 무서운 어르신이 도박을 못하게 하여 중흥동은 도박이 없는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중흥동 사람들이 주변 땅을 많이 얻게 되었다. 주막이 중흥동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아이들은 노송정으로 감주를 사러 많이 다녔다. 도림산에도 주막이 있었다. 마을에 감돈리부터 파군다리까지 땅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100석을 생산했다. 예전에 일로장이 감돈리 인근에 있던 시절 삼향장이라 불렀고 그 곳으로 다녔다. 나주 동강 사람들이 명산을 거쳐 마을 앞길로 지나 다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네 개의 샘이 있다. 마을 가운데 있는 가운뎃샘, 냉장고라 불리는 대삽샘, 마을 위에 있다 해서 우데미샘,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들샘이 있다. 이중에서 들샘은 주민들에게 특별한 샘이다. 마을에 喪事가 나서 상여가 나갈 때 들샘 위로 지나가면 그 해는 들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해서 길이 좁지만 상여는 반드시 들샘 밑으로 돌아나가는 것을 대대로 마을의 유훈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마을은 지하수가 좋아 여전히 지하수를 먹는다. 마을 모두가 지하수로 농사를 짓지만 가물어도 물이 충분하다. 조병남씨가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던 시절 500포대의 시멘트를 받아와 67~68년경 창고 자리에 회관을 지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과 봉정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일로읍과 청계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앞산이 감남골 오른쪽으로 중굴재 뒤에는 망사골이 있으며 왼쪽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한 감돈저수지가 있다.
동/식물
마을 옆 백호등(잔등)에는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여겨지는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이 감나무는 비가 오면 비가림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잔치자리로 마을에 문제가 있으면 토론장으로 쓰여지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1970년에 녹경각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주민들의 쉼터였다. 특히 감나무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신목이기도 했다. 봄에 감나무의 잎이 활짝 피면 그해는 물이 많아 풍년이 들고, 잎이 아래서부터 서서히 피어나면 그 해는 물이 없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뒤에는 여시밧골이 있다. 여우가 커다란 바위 아래에 굴을 파고 살았던 골짜기이다. 주민들은 닭 등 집짐승을 해치는 여우를 잡기 위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매운 고춧대를 태워 굴을 태우곤 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보는 동북쪽의 개밧골 정상은 무재봉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기우재를 지냈던 봉우리이다. 중흥동에서 개밧골로 가는 길에 반구등이 있다.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반구등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당골의 지명도 있다. 태를 묻었던 탯자골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회관 앞에 綠鏡閣이라는 정자가 있다. 1970년에 세워진 정자인데 목재로 이루어진 구조에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녹경은 승달산은 늘 푸르고 몽탄강은 영원토록 흐른다는 싯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마을 입구에 나주정씨열녀각이 있다. 이 각은 1812년에 지어진 것으로 서익천의 아내 나주정씨(1768-1798)의 정려이다. 정씨는 17살에 가난한 선비인 익천에게 시집 와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공부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편이 29세의 나이로 한양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였다. 이에 정씨 부인은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남편의 시신을 모시고 내려왔다. 시신을 모시고 오면서 식사 때가 되면 마을에서 밥을 얻어와 영정에 모시고 그 밥을 먹으면서 집에까지 모셔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녀행이 임금에게 알려져 임금이 직접 정려를 내리고 청기와 세 개를 하사한 것이다. 1812년에 정려가 내려지면서 그해 서씨 문중에서 열부각을 세웠다. 현재 열부각 내에는 정려기 편액 1개가 있다. 주민들은 이 제각의 지붕에 세 개의 청기와가 있었으며 그중 1개가 광복 전후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혼란의 와중에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청기와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청기와는 조선 왕조에서 특별한 가문이나 사찰에 내리는 증표로 무안에는 달성배씨 사당인 청천사와 폐사찰인 총지사에 두 개씩 있었다. 말을 타고 가던 사람들도 열녀각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그냥 지나갈 경우 마을 주민들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중골재에서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목포대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 회청색경질편 토기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녹경각의 시 僧達山領千峰綠 夢灘江水萬歲鏡 鳳鳴竹田老松庭 白鶴群遊斯仙閣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금강양화점의 처가가 중흥동이어서 마을 정자를 지어 주었다. 2022년에 정자를 보수하였다. 이천서씨 자가일촌이었기에 협동심이 좋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집집마다 시멘트를 나누어주어 집앞 길을 메우게 해서 마을 길을 만들었다.
주민요구사항
녹경각의 현판이 낡아서 정비가 필요하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영춘동 – 쌀 한말도 못먹고 시집간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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