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山이란 지명은 기동 마을에 啼鳳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여겨진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옥천동리와 반암리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반암리로만 나온다. 이후에 박곡면과 석진면이 합쳐지면서 옥천동과 반암리의 머릿글자를 따서 옥반동이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옥반 저수지위에 있는 옥반골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10호가 넘는 세대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정석동은 옥녀봉 기슭에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의 입향조는 화순 오씨였다. 그러나 지금 오씨 문중의 잡안은 오래 전에 남아있던 한가구가 떠남으로써 처음 들어온 입향 성씨는 없어지고 대신 한양 조씨가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다. 한양조씨는 무안읍 성암리 용연동에서 건너온 조영순(자-백효. 1811-1878) 공이 이 마을의 입향조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鳳山里는 1939년에 무안군 몽탄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낚시명당의 어옹수조 형국의 기동, 옥녀봉과 청룡이 감싸고 있는 금반옥호의 터인 옥반동, 그리고 말 안장의 지형으로 용처럼 승천하는 형국인 용마승천의 기룡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봉산리는 마을마다 명당 터를 갖고 있는 무안에서 몇 안 되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마을이 오동기(사동, 청룡동, 기룡동, 용호동, 옥반동) 가운데 하나로 금소반에 옥병기가 있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라는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 앞에는 우명산의 한 줄기인 옥녀봉이 있으며 그 줄기를 타고 청룡이 허리를 감으며 꿈틀거리는 형국으로 자리 잡은 금반옥호의 터가 바로 옥반동’이라고 들려준다. 사실 그 혈처에 자리 잡은 한 집안은 현재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나왔으며 명문대학 졸업과 박사 학위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마을성씨
한양조씨 집성촌이다.
현재는 박씨들도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봉산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창, 기룡동, 기동, 반암리, 사동, 상주촌 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광주-목포간 도로가 나기 이전에 옥반동 앞의 길은 함평 나주로 가는 큰길이었다. 조선시대에 몽탄이나 일로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정장을 하거나 바른 몸차림으로 다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정도로 옥반동 마을의 위세는 인근 마을에서 혀를 찰 정도로 텃새가 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 마을을 녹두밭 웃머리라 불렀다. 그만큼 가난했다는 것이다. 물도 나오지 않고 경작할 농지가 없었다. 척박한 주변 환경이었지만 주변의 산세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한국전쟁 때에는 이 마을의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함평 쪽의 공산군과 무안 쪽의 국방군이 마을 뒤 철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싸움질을 해 애꿎은 주민들이 피해를 봤다.
2~3km 거리 안에 엄다장, 학교장, 몽탄장이 있었다.
마을 학생들은 몽탄초, 몽탄중, 학다리고를 주로 다녔다.
기차 덕분에 광주, 목포로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사창역 이용)
엄다면 영흥리 분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며 지낸다.
주요시설
예전에 사창에 2년제 간이학교가 있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의 지반은 거대한 바위층을 이루고 있어 물이 귀하다. 한때 장깍쟁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메워졌다.
전통식품/특산품
대나무를 가공하는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당시는 모든 물건을 대나무로 만들던 시절이어서 대나무가 값이 나갔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명당이 많아서 그런지 마을 곳곳에 무덤이 놓여있다. 특히 화순오씨와 나주김씨들의 묘 터가 많이 있는데 주민들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우명산의 자락을 이어받은 옥녀봉과 나비 모양의 나비산 그리고 돼지봉이 마을을 바라보고 있고 마을의 왼쪽으로는 무재봉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제2수원지로 무안읍 물이 모자랄 때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전 영산강이 막히기 전 덕암까지 물이 들었다.
성암 앞까지도 물이 들었는데 물이 낮아지면 그 안에 물고기가 많았다.
동/식물
우산각 옆 당산나무는 정자를 지으면서 없앴다. 나무를 베어낼 때 안에서 구렁이가 나왔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옥녀봉과 옥녀골 옥반골제, 마을 서쪽에 있는 모퉁이인 청룡부리 등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현재 이장님 부부가 마을에서 모은 돈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매일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의 중앙에 우뚝 솟아있던 ‘솔대’를 기억하고 있다. ‘솔대’는 ‘솟대’와 같은 의미로 긴 나무 장대에 여러 가지 모양을 해서 숭배하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에 세워져서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풍습은 지역에 따라 각기 솔대, 짐대, 솟대, 수살대, 진또배기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뜻하는 바도 숭배, 과시, 상징, 액막이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지역의 솔대는 일로읍의 인동 해제면의 신등 마을 등 9군데가 있다. 솔대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 과시와 가문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집 앞이나 마을의 중앙 또는 조상의 묘에 세웠는데 그 모습은 정확히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대개 긴 장대의 꼭대기에 용을 새겨서 붉은 칠을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솔대는 한양 조씨 가문의 것이 아니라 ‘오감찰’이 있었다는 마을 노인의 지적대로 화순오씨 집안의 과시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지로 마을 앞에 ‘솔대배미’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설화
마을의 주변에는 이 마을이 명당이라 소문난 탓인지 예부터 고총들이 많이 있어 왔다. 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화재만을 전문으로 발굴하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옛날 무덤 등을 뒤져서 도자기, 동전 등을 꺼내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안 주민들은 스스로 경계를 서기 시작해 타지 사람들이 함부로 도굴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마을 입구에는 한양조씨 문중의 납골당이 있다. 아직까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골당은 기피시설로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마을에서는 그러한 관념을 뛰어넘고 있어 이채롭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각종 기계가 발달한 현재의 옥반동은 물의 수량도 많으며 맑고 시원하기가 다른 마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을 어디를 뚫어도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나오며 특히 옥녀봉 자락의 물은 한여름에 먹거나 목욕을 하면 몸이 떨릴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많아 장수마을로도 불려지고 있다.
마을 주도로 체험마을이 운영되어서 당시에는 잘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다.
집성촌이지만 인심이 좋아 이사와서 살기 좋다.
마을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많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에는 양파즙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옥반식품이 자리하고 있다. 2006년에 설립된 이 공장은 하루에 약 400망의 무안을 비롯한 주변의 양파를 주원료로 하는 건강가공식품의 공장이다.
마을분들에게 일거리도 제공하고 마을잔치등에 지원도 하는 등 마을과 어우러지는 기업이다.
예전 기찻길이 마을 바로 앞으로 지나갔다.
김대중대통령시절 마을 앞 철길이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