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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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산3리 몽탄면 기룡동마을 작성
  • 기룡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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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서당골 기룡동
지명유래
鳳山이란 지명은 기동 마을에 啼鳳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말의 형국을 갖고 있는 지세가 용처럼 비상하는 형국이라 해서 騎龍洞이라 한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나주오씨의 산이 말 안장의 지형을 갖고 있는데 용처럼 승천하는 용마승천 형국의 명당터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 옆에 서당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서당골은 서당이 있었던 곳을 말하는데 마을에서 끊이지 않고 학문이 높은 선생님이 나와 서당을 세우고 주위 사람들을 가르쳤다. 주변 사람들이 이 마을을 문헌방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부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함평 엄다 일대는 물론이고 몽탄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학문을 배웠다. 특히 초대 대법원장을 했던 김용무씨도 이곳에서 기초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배출한 인사를 보면 교육감을 비롯하여 감사원 감사관, 통일부 과장, 전매서장 등 많은 동량들이 나와 문헌방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朴瑞南(자-명국, 호-퇴우정. 1459-1539)이다. 아버지 박심문(1408(태종 8)∼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자살을 하자 대대로 세거해왔던 경기도 고양에서 전북 김제로 옮겼다가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이 분의 아들인 박 눌 공으로 알려졌다. 마을유래지에서도 ‘입향조는 밀양박씨 박눌(호-구암. 1516 - ?)로서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살다가 할아버지 박심문이 세조 찬탈에 반대하다가 화를 입은 뒤 외조부를 따라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박서남 공이 입향조라 주장하였다. 공은 문과시험에 합격하여 부여 현감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무안에서 밀양박씨들의 입향조로는 이 분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해서 예전에 이 마을 밀양박씨 재각인 화수정에서 시제를 모실 때는 무안 각지에서 밀양박씨들이 모두 참여하여 장관이었다고 한다. 공은 전북 김제에서 몽탄으로 올 때 처음엔 마을 앞에 있는 하동창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이 마을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이곳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절이 있었던 곳을 파면 기와조각 등 예전의 건물 잔해들이 나오고 있으며 그때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옹달샘이 남아 있다. 23년 조사에서 마을분들은 하동창에서 넘어오신 박눌 공을 입향조라 말씀하셨다.
풍수지리(마을형국)
鳳山里는 1939년에 무안군 몽탄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낚시명당의 어옹수조 형국의 기동, 옥녀봉과 청룡이 감싸고 있는 금반옥호의 터인 옥반동, 그리고 말 안장의 지형으로 용처럼 승천하는 형국인 용마승천의 기룡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봉산리는 마을마다 명당 터를 갖고 있는 무안에서 몇 안 되는 마을이다. 五洞之間 避難地로 알려진 이 마을은 기동 사동 옥반동과 함평 엄다 영흥리의 흥룡동 용호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서 나라의 크고 작은 변란에도 이 마을 주민들은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마을 앞 넓은 터에 군대가 주둔하였지만 주민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마을성씨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봉산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창, 기룡동, 기동, 반암리, 사동, 상주촌 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하였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부촌이다. 언뜻 보면 농지가 없는 협소한 마을이라 여겨 가난하리라 여겨지지만 안산 너머 함평 엄다면 영흥리에는 이 마을 주민 소유의 농지가 많이 있다. 봉산리의 다른 마을보다는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생활하고 있다. 마을에서 무안읍을 나가기 위해서는 옥반동을 거쳐 성암을 지나 철소재길 넘어 대림장 골목을 통해 이동했다. 양파 이삭을 주으러 무안으로 다니기도 했다. 예전에 갯벌이었던 자리가 간척을 통해 농지가 되었다. 영산강 지류인 사행천이 있었던 곳을 영천앞들이라 부른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천수답이었다. 또한 모자리를 해두면 강물(짠물)이 들어 한해 농사를 망치기도 했었다.
주요시설
현재 마을의 세장산비 뒷밭에 상여집이 있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연징산과 우명산의 맥을 이은 응달뫼라 불리는 뒷산과 나주오씨 소유인 안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앞 들에는 선돌이 서 있다. 이 선돌은 액막이용과 마을 수호신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원래는 두 개였으나 하나는 농지정리 공사 때 없어지고 현재는 한 개만 남아있다.
동/식물
예전에는 마을 앞 정자 옆에 아름드리가 넘는 팽나무가 있었다. 주민들은 이 팽나무를 보고 잎이 무성하게 자라면 그 해의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래 전에 팽나무는 고사되고 그 자리에는 현재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회관 옆에는 4기의 비석이 서 있다. ‘서우밀양박공연태효행비’ ‘부윤밀양박공서남추모비’ ‘첨지중추부사원종공신박눌유허비’ ‘추강박공춘상기적비’ 등이 있으며 담벽을 사이로 연자방아가 반쯤 묻혀있다. 마을 뒤에는 밀양박씨 제각인 화수정이 있다. 1935년에 건축하였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개의 현판이 있다. 화수정의 이름은 자손들이 나뭇가지 치듯이 퍼져 나간다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이곳은 문중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다. 서당골 주변에는 전주최씨 제각인 계지재도 있다. 이 재각은 1967년에 건축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개의 현판이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이 마을에는 순복음 교회 첫 순교자가 있다. 박헌근(1914 - 1950) 장로가 그분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던 중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귀국해서 순천 오순절교회에 부임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신앙포기의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마을 뒤 응달뫼에 그 분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 사단법인 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안내문이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전쟁 통에 쌕쌕이라 불리는 폭격기가 와서 마을 주변에 있던 배를 폭격하기도 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70세 이하의 주민은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이 마을은 노인들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많다. 무안군에서 실시하는 ‘농촌중심지 마을조성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우수한 결과를 내기도 하였다. 특히 마을 뒤 응달뫼 정상에는 저녁에는 별을 관찰하고 낮에는 나주 함평 무안의 3개 군과 영산강을 살필 수 있는 정자를 설치해 앞서가는 마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장님의 주도로 귀촌, 귀농한 사람들도 함께 잘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취업지원 등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마을에 공가 또는 폐가가 적게 남아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이 마을은 길과 관련이 깊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뒤로 해창 가는 길이 있었고 마을 앞으로는 하동창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또한 근대에서는 마을 뒤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갔었고 요즈음에는 마을 앞으로 안산을 가르며 호남선 고속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한양 가는 길인 함평 엄다로 가는 일반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예전에 만들어진 마을 조사 자료와 이번 마을 조사 자료를 마을에서 수령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은 몽탄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함평군에 가까이 있어 불편이 많았다. 특히 농지의 대부분이 함평군 엄다면에 소재하고 있어서 행정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기타사항
1894 동학운동 이후 마을에서 난으로 돌아가신 분은 없다. 밀양박씨 분들 중에 목사님이 많다. 현재 마을에 7분이 넘는 목사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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