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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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창2리 몽탄면 저두마을 작성
  • 저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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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社倉里는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른다. ‘猪頭’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의 지형이 돼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돈머리’라 부르고 있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번 탐방에서 주민들은 저두 마을을 우리말로 부를려면 ‘돈머리’가 아니고 ‘돝머리’ 또는 ‘돗머리’로 불러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왜냐하면 ‘돈’은 대체로 새끼 돼지를 뜻하지만 ‘돝’이나 ‘돗’은 돼지를 나타내는 말로 큰 돼지를 뜻하기 때문에 ‘돈두’가 아닌 ‘저두’의 의미를 살리려면 ‘돝머리’ ‘돗머리’로 불려야 옳기 때문이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낙안 오씨 吳 井(1547-1625. 자-취오, 호-청하)이다. 오정은 선조 14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무랑 주부의 벼슬을 한 사람인데 광주에서 살다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外家인 이곳 저두 마을에 정착한 사람이다. 물론 입향조가 이 마을에 자리 잡기 이전, 장씨나 조씨가 살았다고 하나 흔적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오정은 학문의 조예가 깊고 높아 재봉 고경명 선생과 교우하였으며 재봉 선생은 오정을 장차 국가의 기둥이 될 사람으로 생각하고 존경과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씨 족보에는 오정의 아들 오윤상(1575-1636. 자-백휴, 호-효정)이 어머니를 모시고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나라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어려움에 처하자 오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여 남원과 전주 그리고 영암 전투에서 왜구들을 크게 격퇴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주변에서 오정의 전공을 치하하고 조정에 아뢰어 마땅한 포상을 받아야 한다는 권유에 ‘나는 공명에 뜻이 없소’하며 마을로 돌아와 자연을 벗삼아 세월을 보낼 정도로 명리를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낙안오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다시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닭머리산에서 영산강 쪽으로 조금 나아가면 북적포라는 포구가 있었다. 지금은 민가가 없고 잡초가 우거져 황폐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막을 포함한 상점이 두 채나 있었고 창고가 한 동이 있을 정도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나주 동강 사람들이 호남선의 기차를 타기 위해서나 무안장을 이용하기 위해서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이곳 사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을 영산강 뱃길을 이용해 실어 나르기 위해 수많은 배들이 이 포구를 드나들었던 곳이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우물터가 세 개 있었는데 현재는 두 개만 남아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현재는 마을 앞길 확장 공사로 잃어버린 차돌 들독 대신 예전의 것과 비슷한 들독을 준비해 마을 회관 앞에다 두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빠른 시일에 원래의 들독을 찾아서 마을 앞에 놓아야 마을이 예전의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주민들은 들독이 있었던 곳을 들독 골, 또는 들독 거리라 불렀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측에 조산과 동산이라 일컫는 ‘닭머리산’ 그리고 마을 뒤의 뒷물래(후산, 후록)산이 있으며 우측에는 서당이 있었다 해서 부르는 스승산[師山]과 도리뫼가 있다. 마을의 어른들이 이러한 산의 형국들을 보고 뒷물래가 낛시대라면 스승산이 낛시줄이고 도리뫼가 낛시에 해당되는 형국으로서 잉어를 낚아채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주민들은 조산을 석축 위에 흙을 덮어 만든 군사기지가 아니었는가 추정을 하고 있었다.
동/식물
마을 앞에 세 그루의 당산 나무가 있었으나 현재 두 그루는 볼 수가 없고 한그루의 나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나무마저 관리 소홀로 시들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이러한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당산제를 크게 열기도 했으나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그 놀이도 점차 없어져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웃 마을인 초당산과 조산에서 고분으로 추정되는 석곽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것을 보면 저두 마을 주변에서 3기의 고분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조산에서 고분의 석곽으로 추정할 수 있는 넓적하고 반반한 바위 두 개를 발견했으나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묻거나 깨버려 현재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설화
지금은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마을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엔 들독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 마을 출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 들독과 함께 커왔다. 들독을 가지고 시합을 한다거나 힘겨루기를 하면서 체력을 다지며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힘센 사람이 많이 나왔으며 각종 씨름판에서는 이 마을 출신들이 우승을 많이 했다. 또한 마을에는 활기가 넘쳤고 주변 마을에선 저두 마을 사람들을 어려워 했다. 오죽 했으면 ‘죽은 오씨 하나가 산 김씨 셋을 해 본다’는 말이나, ‘최씨나 김씨들이 합해도 오씨 하나를 못 이긴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마을에 활기가 있고 힘이 넘치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낙안 오씨 조상 중 한분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이 머리는 뛰어나게 좋은데 그 머리를 뒷받침 해줄 몸이 허약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겠구나’ 하고 후손들의 몸을 튼튼히 해줄 묘수를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들독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 큰물이 나면 많은 동물들이 마을 앞으로 떠 내려 왔다. 주민들은 잡은 동물들을 잡아먹지 않고 대부분 살려 보냈다. 그중에 거위 한 마리를 살려서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거위는 놓아주어도 가지 않고 마을에서 자라서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들독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동학과 관련된 사항을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우리 마을 사람들이 동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으나 실제 어떤 분들이 관여를 했고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모르고 있다’고 할 뿐이다. 동산에 있는 ‘몰묏똥’이라는 곳에 동학군들을 무더기로 매장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특히 갑오년에 이웃인 사창 마을 출신 김응문 접주의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참여하였고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로 봐서는 이 마을 사람들도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였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웃 마을인 사창과 여러 가지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특히 정월 보름에는 강 건너 나주 동강 사람들과는 배를 타고 石戰을 벌이기도 하였다.
기타사항
참고자료 - 돝의 새끼가 돼지이다 (국어대사전). 돼지는 송아지·망아지·강아지 등과 대등한 말로서, 본래는 새끼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古語의 `돝`이 어미 돼지이고, `도야지`나 `돼지`는 새끼 돼지인데, 후에 `돝`이 사어가 되면서 `돼지`가 `돝` 대신 표준어가 되고, `도야지`는 방언이 되었다. 그래서 가축 중에 `돼지`만은 새끼의 명칭이 없어지고, 송아지·망아지·강아지 등에 대등한 말로서 `새끼 돼지`가 쓰이게 되었다. 본래는 새끼 돼지를 일컫던 말이 돼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산되어 쓰이고 있다. ‘돗’은 돼지의 방언으로 쓰인다. 해서 ‘돗머리’가 아닌 ‘돝머리’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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