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里는 건지봉 안쪽에 해당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형성시에 연징산에 분화구가 있다고 하여 火山으로 부르다가 후에 華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花山으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華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집안의 족보에도 華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花山으로 표기해야 맞다고 한다.
※ 어린시절 華山으로 사용했던 기억을 뚜렷하게 가지고 계시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마을에 화순오씨 함평노씨 나주정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향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밀양 박씨를 제외하고는 족보를 확인할 수 없어 입향연대와 입향조를 추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서당뫼에 정착한 화순오씨이며 뒤이어 밀양박씨와 나주정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화순오씨 입향조는 吳世魯(자-거첨)는 나주 거평에서 세거하였다. 喪을 당하여 나주의 인숙동 일심사 뒤편에 묘를 썼으나 스님들이 자주 불을 태우고 집까지 태우니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이 마을로 들어왔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교육에 열중하였다. 방어사를 지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함평노씨 입향조는 魯以貞(자-충항)은 나주 문평면 철곡에서 세거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났으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이다. 시절은 비록 태평하였으나 장차 다가올 미래가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 와 자리를 잡았다.
나주정씨 입향조는 鄭良信(자-부필, 호-애일헌)으로 나주 투주동에서 세거하였다. 공은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부귀와 공명을 탐하지 않고 단사표음의 자세로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며 일생을 보냈다.
밀양박씨 입향조는 朴 樑(1424-1465, 호-동계)으로 황주 목사를 지낸 사대부 출신이다. 그런데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인륜을 무시하고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높은 벼슬에 있던 종조부와 아버지가 세조의 패도정치에 반하여 자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그도 관직을 내놓고 무안에 은거하면서 아이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법천사 주변의 원탑동이고 이어 공수동 옆 불낙골의 조박동에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함평노씨는 연화촌으로 화순오씨는 마을 뒤 서당뫼로 들어왔다고 한다.
350~400년전 사이에 서씨들이 들어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엔 널리 알려진 명당터가 있다. 이른바 쥐꼬리명당으로 알려진 공수동의 이천서씨 묘역이다. 원래 保子孫之地였던 터에 서씨들이 쥐꼬리 모양의 둔덕을 만들면서 형성된 이 명당은 근래 들어 발복이 계속되고 있다. 제각 주변에 사는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아이들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여기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부터는 몰라보게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쇠약했던 자신의 몸도 모두 나아 이곳 땅의 기운 덕을 무한히 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곳에는 이천서씨 무안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의 묘가 있으며 이천서씨 제각인 원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제각이다.
※ 마을주민들은 연징산을 포함한 8폭(치마폭)의 산이 둘러싼 형국이라고 말한다.
마을성씨
화순 오씨, 이천 서씨, 조씨, 박씨, 노씨 ,정씨, 전씨 등이 함께 어우러진 마을이다. 각 성씨마다 7가구를 넘지 않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한 성씨가 8호가 넘어가면 이사를 나가고는 했다고 한다. 서로 세력을 불리지 않고 조심하며 화합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천, 봉암, 대치에서 이주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석진면 花山里로,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석진면 花山洞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석진면 내리 花山洞으로 나온다. 두 번째는 마을의 풍수적 지형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리어카도 없던 시절에 머리에 이고, 지게 지고 산을 넘어서 장에 갔다.
사람들이 화쟁이(화장포)까지 가서 보리와 생선을 바꿔왔다.
지방도 정비 사업에 마을 마다 구간이 배정되어 울력에 동원기도 하였다. 화산 사람들이 산을 넘어 이용하던 학산마을 앞 구간이 화산마을의 담당 구역이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었기에 학산 적박골에 점방이 있었다. (집터는 남아 있을 것이고 한다.) 또한 화산마을 입구 그리고 한재 입구에도 점방이 있었다.
건넨재는 과거에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한재로도 무안을 넘어 갔었다. (구, 예비군 훈련장이 나온다.)
무안으로 넘어 가는 길이 한재였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는 방앗간으로 사용했던 자리다. 지금도 당시의 흔적인 연자방아가 회관 앞에 놓여있다.
몽탄서초는 야영장이 되었다가 개인에게 판매되어 현재는 태양광 시설이 되었다. 몽탄중앙초의 학생 수가 1,000여명에 이르면서 몽탄서초가 만들어졌다.
전통식품/특산품
화산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모시베를 짰었다. 무명은 집집마다하기 때문에 모시천의 색을 바래기 위해 벼락산 (뒷산) 묘지터에 널어 말리고는 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은 원래 연징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복개되면서 형성된 길이다.
당산나무 주변에는 독배기라 부르며 4개의 고인돌이 묻혀 있거나 방치되어 있다. 원래는 10개가 있었다고 하나 깨버리거나 쪼개 사용해버려 지금은 4개밖에 없다.
고인돌 중 큰 것은 마을 정자의 반 정도 크기 였다.
예전 개울을 건너던 돌다리 일부가 정자 옆에 있었다. 갓바위라 불리는 냇가에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보던 곳은 아주 최근에 파손되었다.
※ 일부 주민은 갓을 놓아두고 쉬어갔다는 돌을 갓바위로 알고 있었다.
예전에 마을에 배를 매어두던 돌이 있었다.
짠 바닷물이 마을까지 들었었다.
동/식물
마을 앞에는 수령 400여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둘레가 310센티미터 되는데 그 옆에는 석천이라 부르는 마을 샘이 있다.
※ 2022년에 당산나무가 쓰러져서 다시 심었다. 마을 주민들은 동각 반대편으로 넘어진 것이 당산나무의 마음이라고 감사하고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불낙골에 있는 曺朴洞은 조씨와 박씨가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팝동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에 태양열 발전소가 있으며 그 오른쪽 골짜기를 남주골이라 한다. 살포쟁잇들은 마을 앞 들이다. 살포쟁이라 이름 붙인 것은 원래 대치천이 곡선으로 흐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속작골 초막골 안산 뒷매 서당뫼 갓바위가 있으며 마을 뒷산은 별락산이라고 하는데 별이 떨어진 산이라고 한다.
건네, 큰동네, 돌다리 같은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20~30년전 까지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에 화산가라는 마을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 청년들의 기상을 나타내는 노래다.
※ 마을 노래(화산가)는 조해성 어르신의 할아버님(조부님)이 지으신 노래로 서당을 하시며 많은 제자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시기도 하였다고 한다.
화산가
호남일류 명승지 내리 화산아
조선나라 혁신은 우리 아니냐
철철 끓는 더운피 뛰어 놀 때에
철봉을 갈라쥐고 전진해보세
호남일류 연징산 내리 청년아
별천지 대기성을 발하여서
악전고투 이겨내 승전기 들고
개선가를 다같이 불러봅시다
맹호같이 나가자 호남 청년아
우리 앞에 나갈자 누가 있느냐
우렁찬 우리들의 고함소리는
육대주와 오대양에 진동하노라
유물, 유적
대치리와 내리에 있는 제각들은 총지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총지사가 폐찰되면서 기와는 마산의 연궐정으로 기둥은 한재의 월산사로 그리고 남천의 우공재나 원모재 등에도 총지사의 잔해를 이용해 건축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의 회관 앞에 있는 연자방아의 좌대는 총지사에서 가져온 돌이다.
이천서씨 제각인 원모재(학산리)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서당 등에 고서적이 많이 있었으나 관리가 안 되어 다 폐기되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해방 이후 영암 장성 등 8개군의 지역에서 좌익으로 활약했던 빨찌산 박량호가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박량호는 달리기를 잘 하고 신출귀몰해 활동력이 컸던 대원이었다.
거처/생가/묘소
이천서씨 무안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의 묘가 쥐꼬리 명당에 있다. (학산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범죄없는 마을에 2개년 연속 선정되었으나
자연 개화된 양귀비가 발견되어 종료되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시내를 복개해 마을길을 만들었다.
마을 입구에 태양열 발전소가 있으며 만남의 길 사업으로 몽탄으로 가는 차선이 넓어졌다.
76년 경 경지정리, 농로만 있으면 불편하니 땅을 양보하여 길을 내자고 했으나 도로 건너 마을 사람들은 호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요구사항
주소를 적을 때 빛날 화를 쓰지 못해서 혼났던 기억이 있다. 마을 명칭은 빛날 화로 해야 맞다는 의견이 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늘어지 마을은 길이 없어서 아이들이 산을 넘을 만한 9살 10살이 넘어야 몽탄중앙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