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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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2리 몽탄면 차뫼마을 작성
  • 차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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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윗몰 아랫몰 건넷몰
지명유래
茶山里는 본래는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연징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산에 차나무가 많이 있어 다산이라 하였다. 마을 이름인 ‘차뫼’의 유래는 뒷산인 옥녀봉에 차나무가 많이 심어져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차나무가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동학 접주 김응문의 족보를 보면 김응문의 아버지 광수(光綬, 1827 - 1870)의 호가 ‘다은(茶隱)’이며 아들 응문(應文)의 호는 ‘다사(茶史)’이다. 이는 이 마을에 차를 많이 재배했거나 가까이 했던 정서를 드러낸 것이며, 주변의 불교와 관련된 문화를 봤을 때 이곳에 차나무가 많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기존 자료에 취암 김적이 입향조와 관련된 부분에 언급되는데 차뫼의 입향조 설명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차뫼 마을 앞을 지날 때 보는 ‘옥녀봉’은 어느 누가 처음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에 얽힌 ‘옥녀’의 슬픈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기상은 이 마을 출신의 인물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성씨
윗몰은 인동장씨가 아랫몰은 나주김씨가 그리고 건넷몰은 광산김씨가 살았다. 하지만 점차 나주김씨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나주 김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졌다. 아랫몰 나주김씨는 다시 국동파, 대사동파, 사창파로 나뉘어 진다. ※대외적으로 나주김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성씨가 마을 형성 이래로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어 나주 김씨 마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龍山리 茶山리 上茶山리 仁坪리 新坪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茶山동 龍山리 局동 仁坪동이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다산리 인평 다산 용뫼 등이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인평동 용산리의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32년 박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15~20여년 전 차뫼와 용뫼가 분구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비선재에는 백제고 학생들이 소풍을 오기도 했으며 학산의 쥐꼬리 명당은 몽탄북초 아이들의 소풍장소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몽탄북교를 다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이 마을에는 샘이 많이 있었다. 앞샘 비아샘 통샘을 비롯하여 너마지기샘 줄샘 뒷샘 구수샘 등이 있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담양 등지에서 대나무를 사다가 장애인분들이 죽제품을 만들어 5일장에 팔고는 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는 안산과 매봉이 있으며 한건시 들[野] 사이로 연징산에서 발원한 내[川]가 흐르고 있다. 마을 앞 동각 자리에 선돌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사창 3거리 부근 까지 강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마을에 고막다리(돌다리)가 있었으나 경지정리를 하며 없애버렸다.
동/식물
예전에는 냇가에 아름드리 팽나무들이 들어서 있어 마을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었으나 지금은 전부 베어내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당산나무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톱판거리라 부르는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이다. 예전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세 그루나 마을 앞에 있었으나 태풍에 다 쓰러져 버리고 현재는 한 그루만 살아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팽나무에 잎이 고르게 달리면 그 해엔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는 옥녀봉과 관련됐음직한 지명이 남아 있다. 주민들에 의해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는 비선재와 사타골(사타구니골) 그리고 성적골이 그것이다. 비선재에 얽힌 이야기는 옥황상제의 미움을 받은 옥녀에 관한 설화다. 어느날 옥녀봉의 옥녀는 몸을 정히 하고 옥황상제에게 치성을 드리기 위해 머리를 빗다가 실수로 비녀를 떨어뜨렸는데 그 비녀가 떨어진 곳이 나주 김씨의 조상묘가 있는 비선재(또는 비선치)라는 곳이다. 현재 옥녀봉 정상에는 인동장씨 묘가 쓰여져 있다. 전부 바위로 이루어져 묘를 쓸 수 없는 환경인데 특이하게도 묘자리가 들어설 자리에만 흙이 있어 시신을 모셨다. 그런데 그 묘 앞에 쌍둥이 바위가 있는데 장씨의 후손들 중 두 가정이나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것이다. 불당골이리는 지명이 있다. 연징산 기슭에 있는 곳인데 서해안 고속도로를 건너 이 마을에서 2㎞ 거리에 있다. 예전에 큰 절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주춧돌이나 초석 그리고 기와 조각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국동(주민들은 꿀동이라고 함)이란 곳이 있다. 나주 김씨 입향조가 처음 들어와서 살았던 곳이라 하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1가구만 있으나 예전에는 많은 세대수가 있었다. 행정구역은 무안읍 성암리이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몽탄면 다산리에 포함되었었다. 만년다리 모랫등 쇄기 쇄기샘 건넌골 구레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해모골, 외야골, 원동골, 태모골 등의 지명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면 마을 주민들이 동학과 관련된 제를 모신다. 어린시절에는 당산제가 있었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마을 오른쪽에 3기 주민집 마당에 1기 밭에 1기 등 지석묘 5기를 비롯하여 확인된 것만 해도 15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는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20여기가 넘는 지석묘가 있었지만 밭을 경작하거나 길을 넓히는 등의 관계로 많이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김용무 집의 뒤껸(예전에는 대밭이었음)에 10기의 지석묘가 온전히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이곳의 흔적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밭에 있었다는 석실묘의 흔적들은 이웃인 인평 마을과 더불어 이 지역이 선사시대에 중요한 거주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이 많이 있었으나 저수지 만들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을 중앙에 현판이 없는 나주김씨 가족 제실이 있다. 김재형씨 가족들이 세운제실인데 비명이 ‘맑은 촛불 길이 빛나리라’이다. 1976년에 세웠다. 마을 입구에 2기의 비석이 있다. 1978년에 세운 김순택유적비와 1987년에 세운 김수형공적비이다.
설화
마을에 호랑이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을 할머니가 옴박지를 이고 옥녀봉 아래의 샘에 물을 뜨러 가는데 저 멀리 옥녀봉 기슭에서 호랑이가 할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봤다는 사람은 그 할머니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실지로 옥녀봉에는 범바위와 호랑이굴이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 회관 앞에는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동학혁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김응문 일가의 동학 혁명 때의 활동 내역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의 활동과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제수를 준비하여 제를 모신다. ※현재는 마을 당산나무 근처에 김응문 일가에 대한 동학농민혁명지도자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김천근(당시 몽탄면예비군중대장)이 동학 역사 발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31사단에 남아있던 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가족들과 연결해 동학의 역사를 찾아내도록 하였다. 김응문 장군의 후손은 사창에 살고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미군정하에 대법원장을 지내고 1950년에 국회의원이 되었던 김용무 [金用茂, 1891~1950] 와 역시 국회의원인 김용현 형제의 출생지도 이곳 차뫼 마을이다. 이들은 추당 김기환의 아들이다. 옥녀봉 아래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김용무의 집은 1,400여 평이 넘는 넓은 집터와 집을 둘러 싼 흙담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지만 본채는 많이 왜소해졌다. 원래 10칸이 넘는 대가(大家)였다고 하나 현재는 5칸 접집 가옥으로 예전의 당당한 대지주의 흔적만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래채는 본채보다 훨씬 웅장하고 컸었다고 하나 오래 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래 이 집은 일본인의 집으로 알려졌지만 확인할 수 없다. 주민들이 ‘아랫사랑’을 뜻하는 ‘아리쌍집’이라며 말하던 것을 해방이 되면서 김용무씨가 구입한 것이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도 쓰여 주민들이 노래자랑도 했던 곳이다. 전쟁 후에 김용무 후손들이 살았으나 현재 직계 후손들은 충청도 아산으로 옮긴 후 다른 사람이 구입하여 살고 있다. 김용무의 터 자리는 이 집이 아닌 마을의 뒤쪽 밭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이곳에서 자랐다는 사실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조선 후기 이 마을의 선비들은 장성의 명망 높은 유학자 기정진에게서 수학하는 등 향반(鄕班) 사족(士族)으로 행세하였으며 비록 명문세가는 아니었어도 향반으로서 품격을 유지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배경이 19세기 말 동학혁명 때 불의와 외세에 타협하지 않고 의로운 항쟁을 보인 동기가 되었으며 김응문 부자를 비롯하여 4형제가 몰락한 왕조와 일본의 칼날 아래 장렬히 산화했던 요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고속도로가 마을 뒤를 관통하여 소음이 시끄럽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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