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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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산1리 몽탄면 죽전마을 작성
  • 죽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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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85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35호만이 남아있고 실제 거주인은 25호에 그치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죽전, 화정동
지명유래
지명의 유래는 뒷산인 봉정산의 봉황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은 이른바 ‘봉황새가 오동나무 가지에 깃든다’는 소위 ‘飛鳳歸巢’의 혈을 안고 있는 봉정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이 혈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山川精氣가 호남에서 으뜸이며, 富貴와 五福이 速發하여 오래오래 지속되고, 석학과 賢相이 대대로 나오는 吉地로서 사·오천년 동안 발복하는 땅”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비봉귀소의 혈은 승달산의 지맥에 있으며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큰 대혈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名地이나 아직까지 발복의 인연을 얻은 자는 없다. 마을 앞에는 중흥동의 주산인 개밧골산이 있다. 이 산에 사는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나 기타, 다른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만을 먹기 때문에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이로 인하여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죽전’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대숲이 울창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한양 조씨 位(1505 - 1594, 자-성충, 호-丹菴)와 位世(1508 - 1569, 자-사충, 호-丹谷) 형제다. 이들은 한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조근선이 기묘사화(1519년) 때 정암 조광조의 구명운동에 참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배를 당하자 위는 동생과 더불어 산수가 명려한 이곳 봉정산 아래로 들어와 거처를 마련했다. 위는 학문이 도저하여 주변에서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구름같이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화정동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밀양에서 피란 온 밀양 박씨가 정착하면서 이루게 된, 썩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동구 앞을 가로질러 배롱나무를 꽤나 많이 심었다. 여름 내내 동구 앞은 온통 새빨간 꽃 대궐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壯觀 때문에선지 마을 이름을 꽃정이라 하고 한자로는 花亭이라 적었다.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죽전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풍취와 지세를 자랑하고 있는데도 그에 걸 맞는 인물이 나지 않은 이유를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이웃마을인 노송정에서는 명당에 묘를 쓸 때 너무 깊이 파서 기운이 새버렸기 때문으로 보았고 이곳 죽전 마을에서는 봉정산의 한 쪽이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인물이 크질 않는다고 한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한양 조씨의 동족마을로 예전에는 황씨들이 살았다 하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무안읍 성암이 한양조씨 큰집 뻘이 된다. 현재는 타성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이로촌면 죽전리,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이로면 죽전리,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가서야 박곡면 달산리 죽전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건너 화정동 앞으로 나 있는 길이 예전에는 해남이나 진도 목포 등지에서 한양으로 올라 갈 때 지나던 길이다. 해서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중간중간에 주막들이 있었으며 길 가에는 백일홍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칡과 나무를 캐서 목포 장(산정동, 유달중인근)에 팔기도 했다. 달산리와 봉명리는 일로지역으로 중학교 배정이 이루어졌다. 몽탄면에 속해있기에 비료를 사거나 밀가루를 받으러 지게를 지고 우적동이나 오갈재를 넘어 몽탄 소재지에 다녔다. 소재지가 멀어 출생신고를 이장님이 한 번에 모아서 하고는 했다. 그래서 호적 신고가 늦은 사람이 많다. 한양으로 갈 때 마을을 지나 꾸릿재를 통해 태봉으로 넘어갔다. 최근 농사의 많은 부분을 소풀이 차지하고 있다. 소축사를 통해 소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농사도 축산 관련한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부유했다. 집집마다 일꾼을 두고 살았던 시절도 있다.
주요시설
봉명리가 물이 귀해 수도를 놓을 때 같이 수도가 들어와서 몽탄에서 가장 빨리 수도를 놓은 지역이 되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노송정 마을 뿐 아니라 죽전에서도 유과와 엿을 집집마다 했었다. 덕석, 바구니, 치, 가마니를 많이 짜서 팔았다. 대나무 제품도 많이 만들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에 맑은 물을 자랑했던 화정천이 죽어가고 있다. 목포시민들의 식수를 담당했던 달산저수지가 식수 대신 목포시민들의 하수를 중화시키는 보충수 역할을 하면서 물길이 막힌 것이다. 식수였을 때는 물이 넘쳤으나 보충수 역할을 하면서는 항상 물이 부족해 화정천에 흘러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동/식물
마을에는 당산목으로 부르는 팽나무가 여러 그루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런 팽나무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나무가 고사되었다. 특히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의 형제가 심은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당산목 아래에서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정월 보름에 지냈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5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봉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한 쌍의 봉이 살았다 해서 한골재가 있는가 하면 봉정산에서 봉이 날아와서 목욕을 한다 해서 용들보[龍灘]가 있다. 용들보는 화정동 앞에 있는 보인데 봉이 이곳에 와서 몸을 깨끗이 한 후 죽림에 깃든다고 한다. 산밭골, 두레박골, 명틀, 정골, 채장골, 막당골, 백제골 등의 지명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대보름에 마을제가 있었고 백중에 샘제가 있었다. 88년 넘어까지 이어진 기억이 있다고 한다. 지하수를 끌어서 수도로 이용하면서 샘제가 사라졌다. 93년경 대형 관정을 군에서 파주었고 현재는 농사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서 달산 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면 람덕정(覽德亭)이 있다. 봉정산 기슭에 있는 람덕정 입구에는 솟을 삼문인 추원문이 있는데 이 문은 정자 뒤에 있는 추원단을 의식해 세운 문으로 보인다. 람덕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鳳을 보면서 德을 생각한다는 의미의 정자인데 입향조인 조 위가 嘯詠(시가를 읊조리며 한가로이 머무는 곳)한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35년에 기존에 있던 초가를 헐어버리고 기와로 중건한 것이다. 안에는 6개의 주련과 람덕정記를 포함한 8개의 현판이 있다. 현판 중 람덕정記에는 ‘주인이 봉정 위에 덕을 보았으니 천길 높이 날아서 고상한 풍류를 읊조리다. 이 사이에 시가를 읊으며 청초한 취미에 만족하는데 쭉쭉 뻗은 긴 대는 전원에 가득하고 오동의 풍취 또한 빼어났도다’라는 문간공 조경의 싯구가 있다. 람덕정은 비록 중건한 지가 70여년이 조금 넘었지만 조형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었다. 그중에서도 문은 단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특이한 문양으로 조각했는데 관리 소홀로 2005년 8월 문짝을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그때 정자 안의 접이식 문짝 24개 중 23개가 뜯겨져 나갔는데 끝내 찾지 못하고 현재는 예전과 비슷한 문양의 새로운 문을 달았다. 람덕정 뒤에는 입향조인 단암공의 윗대 5대조까지 모시는 追遠壇이 있다. 추원단은 한양 조씨 자손들이 1958년에 뜻을 모아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받들고 있는 단이다. 단에는 커다란 상석과 5기의 조그마한 봉분이 상석을 중심으로 놓여 있다. 매년 음력 10월 12일에 단암공의 시제와 같이 추원단제를 모신다. 마을 입구에 한양조씨 효열각이 있다. 마을 주민인 조수원이 1981년에 문중과 협의하여 세운 비각으로 고조모의 열행으로부터 아버지의 효행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효열을 기리고자 비각을 세우고 행적을 각각 비에 새겨 세운 것이다. 세워진 비를 보면 열부 무안박씨(조태형 처), 열부 김해김씨(조두황 처), 효자 조학언, 효부 유인정씨, 효자 조종창 등이다. 화정동 마을 위에 1987년에 지은 밀양박씨 재실 신덕재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한갑수 도예가의 ‘갑도예’가 마을에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함평군수를 역임한 분이 계시고 전남 경찰국장과 청와대 경비대에서 계셨던 분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술 먹고 싸우는 일도 없고 도박하는 이도 없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평하기를 평화롭고 점잖은 동네다. 화합이 잘되고 협조가 잘 이루어져 마을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 또한 결정된 마을일에 뒤끝이 없다. 젊은 부녀회원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어르신들이 존중하고 따라주어 부녀회가 잘 운영되고 있다. 새로 들어온 귀촌인들과 관계가 좋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회관과 현재의 도로 자리가 모두 예전에는 논이었다. 새마을 사업과정에서 농지를 정리하면서 길이 났고 마을 안길도 넓어졌다. 달산리 전체에 축사가 많이 생김으로써 문화가 발전하기는 어려워졌으나 생계와 관련된 문제였다. 리어카를 끌고 법천사 근처까지 가서 땔감을 해왔다. 주변에 돈사가 4곳 있다.
주민요구사항
람덕정에 대한 문화재 추진이 아쉽다. CCTV가 필요한 상황이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노송정 마을과는 불싸움을 하는 등 서로를 의식하는 관계였다.
기타사항
감돈저수지 옆 축사터에서 해골이 많이 나왔다. 그 곳은 예전에 학살이 있었던 자리로 쟁기질만해도 유골이 나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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