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江里는 후삼국 시대 새로운 왕조 탄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왕건과 견훤의 영산강 싸움에서 꿈 속의 선몽으로 왕건이 승리를 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상몽탄 마을은 영산강 건너 맞은편 나주 동강면에 있는 몽송 마을과 상대되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명산을 하몽탄이라 하고 영산강 건너 몽송마을은 건넷 몽탄이라 불렀다 한다.
※기존 자료들에는 명산을 하몽탄이라 부른다는 내용이 있는데 마을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고 하신다. 마을 분들의 이야기로는 상몽탄으로 몽송을 하몽탄이라 부른다고 한다.
장시리는 마을의 지리적인 형국이 장태(닭장)처럼 생겼다 해서 ‘장시리’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과 주변 산물이 넉넉하여 이곳에서 삼천석을 모을 부자가 나온다 해서 ‘장시리’라고 했다는 설 등 두개의 지명 설화가 전해져 오는 마을이다. 현재 마을에는 유래를 아는 사람이 없다.
공장마을로도 불리는 신촌마을은 점촌이라 불렸다. 점촌은 옹기 굽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석정포(돌코쟁이) 마을은 얼마 전까지 세 가구가 있었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장어통조림공장과 여러 채의 주막이 있었으며 ‘길전도’라는 일본인 천석꾼이 살았던 마을이다. 뿐만아니라 판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굴앞(굴밖) 마을은 기찻굴 앞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석정포구가 배와 사람들로 붐빌 때 파시가 형성되었던 마을이었으나 옹기가 시들해지면서 가장 먼저 없어진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형성(입향조)
상몽탄마을의 입향조는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기록하길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580년경 나주 나씨 나두광이 나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와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두광의 부인은 순흥 안씨인데 나주 나씨와 순흥 안씨의 만남에서 나두광의 벼슬은 시작되었고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나주나씨 족보에는 나두광(1704-1784)이 1700년대 사람으로 나온다. 이 마을에 사는 후손의 말에 따르면 나두광은 나숭대 반역사건으로 피해 다니다 영산강 건너 맞은 편 마을인 복룡마을에서 살았다. 그러다 이곳 상몽탄 마을이 살만한 곳이라 여겨 건너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장시리에는 처음에 鄭씨나 魯씨가 들어왔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고 이천 서씨가 나주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도 한다.
신촌마을에 대한 마을유래지의 기록은 ‘마을 형성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370여년 전에 청주 한씨가 내려 와 300년은 안주할 곳이라 하여 터를 잡게 된 것이 지금의 신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마을 주민들은 정확히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또한 1789년에 제작되었던 호구총수에도 이 마을의 이름인 ‘점촌’이 나타나지 않고 1912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조선시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박곡면 지역으로 於溫洞리 海山리 淸水洞과 夢灘리로 이루어졌었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海山村 東岩리 彦동 上夢灘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몽강리 해산촌 상몽탄 언동으로 표기된다. 정확히 어느 지역을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1912년의 자료에 新店리와 店村이 나온다. 1987년에는 몽탄면 몽강리 상몽탄 점촌 언동 청수동으로 나오며 현재는 몽탄면 몽강리 상몽탄과 언동 2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몽강1리는 장시리, 석정포, 상몽탄, 신촌 굴앞(굴밖) 등 다섯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시리 신촌 상몽탄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신촌마을은 원래는 점촌 - 신창 - 신촌 - 공장마을의 지명 변천사를 갖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석정포구는 점촌 마을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점촌에서 만들었던 옹기는 이 포구에서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었다. 또한 ‘질’이라고 부르는 옹기 재료와 섬 지역의 나무들이 이 포구를 통해서 마을로 들어왔다. 두리토방의 정철수님이 간직하고 있는 석정포구의 사진은 옹기가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가면서 흥청되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포구 인근에 주막이 많았다. 50여년 전(기존조사기준)까지도 포구에 5-6개의 주막이 성업 중이었다고 한다.
목포 삼학양조장에 소주독을 납품하며 전성기를 구가 하였다.
예전에는 점촌 사람들을 낮추어보아 함께 어우러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획자원이 풍부해 각 가정마다 숭어, 장어, 황석어 등을 보관하는 항아리가 있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영산강변도로 개발로 석정포 인근 가구가 이주하였다. 2010년대 까지는 가구가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상몽탄마을 앞에는 장수정이라는 공동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주변에 널리 알려졌다. 때문에 조그만 마을에서 80세 이상 되는 노인이 열 명이 훨씬 넘게 살고 있는 장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정자로 안식정(장시리)과 可人亭(신촌)이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이 마을은 옹기를 생산한 이후 1960년대에 가장 활성화되었는데 그때에는 27세대 100여명의 주민이 모두 옹기를 만들었으며 옹기 굽는 가마도 4개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목포에 있는 삼학양조장에 ‘소주독’을 납품하면서부터는 전성기를 구가 하였다. 얼마 전까지 예전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가마 두 개가 있었는데 둘 다 활용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통굴(일명 대포굴) 가마는 학술적으로 연구의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관리의 부실로 곳곳에 물이 새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 보수했음을 보여주는 표토층이 5 - 6겹 그대로 보이고 있어 보존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특히 분청자기 명장인 김옥수의 4대조 할아버지가 쓰던 가마였다고 하니 아무래도 120여년 이전에 만들어진 가마로 보인다. 또 하나는 개량가마라고 부르는 근래에 만든 가마로 팽나무 옆에 전시용으로 만들어져 있다.
옹기 가마를 운영하기 위해 포구를 통해 해남, 강진 등에서 흙을 가져오기도 했다.
영산강이 막아지기 전 숭어와 장어는 최고의 특산품이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상몽탄에 당산나무가 남아 있다.
※ 신촌에 있는 팽나무에 영산강을 막기 전까지 배를 묶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마을 주민들은 그 곳에는 물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일로 쪽에서 영산강 호반도로를 타고 오다가 만나는 신촌 마을 입구 모퉁이를 주민들은 돋코정, 돈구정, 돌곶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명은 영산강을 향해서 돌출되어 있는 부분으로 이곳에 물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돼지가 구시 통에 코를 박고 먹이를 먹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석정포라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신촌에는 당산제가 있었다.
유물, 유적
마을회관 앞에는 1945년에 세운 김기준창덕비와 1988년에 세운 정갑조경모비가 서있다.
장시리마을 입구에는 2004년에 세운 효열문이 있다. 효열부 박약임여사를 기리는 비각으로서 시멘트 구조물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250여년 전에 무안향교에서 나주나씨 나현석 옹에게 발행한 망장(석존제에서 헌관을 맡긴다는 증서)을 볼 수 있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피리의 달인, 옹기의 장인이 살았었다. 김옥수 명장의 백부인데 그 사람이 피리를 불면 꿩들이 날아왔고 그 꿩을 쫓아 뱀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새총을 잘 쐈는데 새들을 많이 잡았다고 한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철도가 마을 바로 앞을 지나가 어린아이들이 사고를 많이 당했다. 특히 명절에 시골에 내려온 도시 아이들이 많이 다쳤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물 덕분에 장수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앞에 있는 철도가 폐선이 되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훨씬 밝고 좋아졌다. 또한 영산강권 개발이 이뤄지면서 주민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마을의 분위기가 살아나 활기가 넘치고 있다.
한때 이 마을에는 전통 옹기를 재현하려는 구상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산강 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옹기 마을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이다. 이 구상 안에는 옹기 미술관, 옹기 장터, 옹기연구소 등이 계획돼 명실상부한 옹기의 특성화 단지를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들해졌다.
영산강변도로 건설은 교통의 편리함을 가져왔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몽탄장은 구산마을(남진 외갓집 근처)에서 사천(봉서동 앞)으로 옮겼다가 보건소자리에 자리 잡았다.(40여년전) 그 이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