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倉里는 조선 중종 때 곡물대여기관인 社倉이 있었으므로 사창이라 부른다.
덕암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유래지에선 ‘입향조가 이곳의 지형이 덕이 있는 형국으로 보아 이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 중에 대부분의 주민이 앞산인 남박산에 있는 2층 바위가 덕이 있어 보여 덕암이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위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산 너머에 있다.
지명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정해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인 송아지와 관련이 있다. 사창리의 주산이 우명산이다. 소가 울고 있는 산이란 의미인데 꼬리 부분이 사창으로 들어오는 삼거리 방향이고 머리 부분은 사동 마을 방향이다. 이 소가 고개를 돌려 덕암 마을을 보며 울고 있는 형국이란 것이다. 그런데 덕암마을 뒷산이 송아지의 형국을 갖고 있다. 해서 독암(犢巖)이라 불렀는데 음운의 변이를 일으켜서 덕암이라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덕보산과 관련이 있다. 예전에 이곳은 포구가 있었다. 이 포구는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는데 포구의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독[巖]으로 이루어진 독보산으로 이것이 변하여 지금의 덕보산이 되었다. 마을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독바위의 의미인 독암에서 덕암으로 변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함양박씨 朴光欽(자-사진, 1721-1789)이다. 광흠은 담양군 창평면 절산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는 성균관 진사시에 이등으로 합격한 재원이었다. 후일 그의 처가인 양장1리 도림산 마을에 솔대배미를 세워 기념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대로 학식과 덕망을 갖춘 후손들이 가문을 빛내 왔다. 마을유래지에는 함양 박씨보다 조금 늦게 나주김씨 김주현이 이웃 마을 사창에서 들어왔으며 제주양씨는 1880년경에 양경묵이 나주 공산면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뒤이어 안동권씨도 들어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을 멀리서 보면 들판에 숲으로 우거진 독특한 형국이다. 우명산의 맥을 이어 마을의 주산을 이루고 있는 제장대를 비롯하여 시글덕산 북지기 몰뫼등이 마을의 병풍 역할을 하고 남박산 소래산 앞동산 덕보산이 안산을 이루고 있다. 4개의 들은 토기동들 앞들 뒷들 방죽들이다. 해서 주민들은 마을이 피난지라고도 한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이다.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저두리, 덕암리, 상주교, 용산, 사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1932년에 박곡면에 편입되고 1939년에 다시 몽탄면으로 개칭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함평군이 가깝지만 대중교통이 없어 무안읍으로 다녔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별을 보고 시간을 추정했다.
또한 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그늘 위치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기도 했다.
기차를 이용해 광주나 목포로 학교도 다니고 장도 다녔다.
가마니를 짜서 무안읍장에 걸어가서 팔기도 했다. 사창에서 성암을 거쳐 무안으로 나갔다.
현재 마을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택시 티켓이 6장씩 나온다. 택시를 이용하지 못할때는 20~30분 정도 걸어 나가서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예전 영산강에는 뗏목이 있었다. 손님이 부르면 강을 건너와 태워주고는 했다.
하구언을 막기전 배다리라 불리는 물이 들어왔던 곳이 있다. 어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장어, 숭어, 조기 등을 잡아 생계를 하셨다. 하구언을 막는다 하니 일본인들이 맛있는 고기는 이제 다 먹었다고 아쉬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덕암마을의 진입로는 4군데가 있다. 진입로들이 좁은데 한 때 땅을 양보받고 울력으로 길을 넓힐 때 5m가 아닌 4m로 넓힌 것이 너무 아쉽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한 보릿고개에는 배가 꺼지니 뛰지 말라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목포역 또깨비 시장에 가면 먼저 가야 팔 수 있기 때문에 가마니를 지고 뛰어 다니기도 했다.
주요시설
소래산 아래에는 북적포라는 유명한 포구가 있다. 北赤浦는 영산강을 도강하여 나주 동강면과 통하는 도선장이다. 임진왜란 때 사창 마을의 나주 김씨인 김충수 장군이 북적포와 德甫浦, 그리고 해창 마을의 新設浦 함평군 沙浦 등지에 진을 치고 군졸을 도강시키면서 왜적과 싸웠던 지역이다.
德甫浦는 덕보산 아래에 있는 포구이다. 덕암천과 영산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양수장이 있다. 영산강의 물을 양수하여 해제를 비롯한 무안군 일부와 신안군의 지도읍까지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것이다. 원래 독으로 쌓여진 보 즉 독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나중에 덕보로 바뀌어진 경우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앞에 쌍샘이라 부르는 두 개의 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에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은 이 샘 덕분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깊지도 않은데 물이 많이 나왔다. 땅을 파면 암반이 나왔다. 다른지역에서 물을 떠가기도 했다. 물이 많아 지금도 양수기로 물을 퍼내고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달래의 주산지로 주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올려주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8개의 봉우리와 4개의 들이 함께하는 마을로 영산강 가에 자리하고 있다.
제장대는 높지는 않은 산이나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를 지냈던 의미 있는 산이다. 남박산은 2층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으며 그곳에서 임진왜란 때 댕구(포)를 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바위이고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데 주민들에겐 의미 있는 특별한 바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월보름에는 부녀자들이 이곳 남박산에 모여 강강수월래를 불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영산강 건너 맞은편에 나주시 동강면 월송리가 있는데 그곳에도 비슷한 바위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소래산은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50여 년 전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소래산의 흙이 쓸려 나가면서 묻혀져 있던 고분이 발견돼 생활도구 등 많은 부장품들이 발견되었다.
앞동산은 바위가 없는 산이다. 마을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졌고 모든 산들도 바위산인데 이 산만 바위가 없는 것이다.
동/식물
마을 옆에 배롱정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 배롱나무가 우거져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아래 농지에서 붉은 빛을 띤 광물인 朱土가 발견되었다. 朱土는 석간주(石間硃) 그림이나 도기(陶器)를 만들 때 염료로 쓰거나 또는 주초(朱草)를 쓸 때 이용하는 원료이다. 오래 전에 이 마을을 주토계라 부른 이유가 이 흙이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배롱나무는 없고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배다리 토구통 요골 웃골 삼시랑등 배롱정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배롱정에 청헌양봉열선생송덕비(1985) 열부함양박씨기행비(1987) 효자양경승기적비(1987) 양회순충의비(1987) 등 4기의 비가 있고 마을 입구에 김재구송덕비(2002)가 있다.
마을 입구 요골이라 부르는 곳에 몰무덤 두기가 있는데 요즈음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 몇 년 전부터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에 따르면 덕암고분은 남분과 북분으로 구성돼 있고 남분에서 3기, 북분에서 8기의 옹관묘가 발견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무덤을 쌍둥이등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 주변에서는 아직도 기왓장 등 많은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는 뒷산 기슭 대나무밭에도 6기의 고분군이 있다고 한다. 또한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마을 입구에는 4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고인돌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동학의 흔적을 발견했다. 주민들에겐 동복양반이라 불렸던 제주 양씨 양회순이다. 후손인 김우례씨(80세)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나주까지 말 타고 다니면서 동학 활동을 하였으며 후일 무안읍 만창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시체는 찾지 못하였으며 고인의 비문에는 동학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의병활동으로 죽었단 사실만 적혀져 있다. 또한 아들인 양경승과 함께 父子가 일본군에 의해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호남절의록에 이들 부자의 의병활동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에서 5명이나 희생을 당하였다.
많은 박사들을 배출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변 마을과 비교해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주변 환경이 좋아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출신 시계공이었던 박병천씨가 마을 주민 모두에게 시계를 주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이 마을은 몽탄면에서는 유일하게, 그리고 무안군에서는 드물게 군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다. 주민들이 무안군을 비롯한 여서 기관에 청원을 하였으나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마을길 포장과 더불어 대중교통수단의 확보가 주민들의 숙원사업이 되었다. 다행히 대안으로 행복택시가 하루에 2회 운영된다.
시할아버님과 증조부의 동학과 관련된 자료들을 받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시할아버님(양경선)의 이름이 잘못 표기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