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산강 주변에서 돈이 많이 나오니까 돈이 돌고 돈다 해서 돈도리라 했다는 설과 딴봉의 원래 이름이 딴돌봉인데 거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여러 성씨가 모여 ‘서로 싸우지 말고화목하게 살자’라는 의미로 두터울 ‘敦’을 써서 돈도리라 한 것이 맞다
마을형성(입향조)
敦道里는 일로읍에서 동쪽으로 영산강을 향해 3㎞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앞으로는 넓은 평야와 뒤에는 일로의 主山인 인의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마을의 행정구역명은 일로읍 의산리 3리 돈도리 마을이다. 이 마을은 우리 지역의 다른 마을처럼 유력한 입향조가 있어서 형성된 마을이 아니다. 1920년대 일본인 人見鹿太郞(히또미)에 의해서 시작된 영화농장의 간척사업은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일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일부가 돌아가지 않고 인의산 자락에 남아 형성한 마을이 이 마을을 포함한 농장 주변의 마을이다. 처음 이 마을에 살게 된 사람은 원둑이 막히기 전 딴봉에서 살던 정남용씨이다.이어 임씨와 김씨들이 들어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다보니 한때는 34개의 성씨가 살기도 했던 복합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이름이 나오는 자료에도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는 나오지 않고 1987년의 자료에 비로소 돈도리라 나온다.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다보니 한때는 34개의 성씨가 살기도 했던 복합마을이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맨주먹으로 자산을 일군 사람들이어서 자립심이 많고 생활의 의지가 강하다. 해서 마을 발전의 의욕이 강하고 맡겨진 일을 미루지 않고 양보와 협조에 의해서 진행한다. 또한 화합과 단결이 잘 이뤄져 주변 마을이 부러워하고 있다. 이 마을의 좌향은 북향이어서 겨울은 춥고 여름엔 덥다. 겨울에는 일로읍과 기온 차이가 2도나 날 정도로 크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 흔히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 농사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바람이 많고 눈이 잘 녹지 않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보리를 심지는 않는다.
예전에 새끼줄 꼬기 사업을 24집이 했고 지급은 3집이 만들고 있다. 연근은 7000평 정도 재배하여 생산되고 있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는 영산강 개발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水門과 수문샘[泉]이 있는데 이수문에는 일본인이 영산강 둑을 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拓天惠’라는 한자를 새겨놓은 글씨가 있다. 당시 수문에는 200석의 나락을 실을 수 있는 배가 다녔다 한다. 수문샘은 1967 - 68년도에 닥친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풍부해 당시 전남도지사가 직접 찾아 와 이 샘물을 농업용수로 하여 집단 못자리를설치해 전남 각지의 농가에 홍보하기도 하였다. 또한 물이 부족한 목포 시민들이이 물로 갈증을 달래기도 하였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영산강물의 수위에 따라 이 샘물의 수위도 변했으나 물맛은 전혀 바닷물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을에 의산교회와 딴봉에 하수종말처리장이 있다
마을변화
마을의 어귀에는 갑오철(카브철도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영화농장 조성 시 사용한 간이 철로로 복룡리 용대 끝 흙과 이 마을의 바위를채굴하여 토석을 운반하는데 사용한 철로다. 당시 하루 200여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운반기구인 궤도차도 40여대나 사용되었다. 또한 영화농장 시절 일본인들이곡식을 실어가기 위해 용산 2구에서부터 수문까지 궤도(당시에는 철구루마길이라불렀음)를 놓았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남녀로 분리되어 있고 청년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수문샘은 수위에 따라 물이 위와 아래로 움직였고 짜지 않은 물이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일제강점기 이 수문 주위에는 커다란 매화나무가 있는 공원이 있었는데 당시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공원의 한 모서리엔 한 기의 비석이 있었다. 이 비석에는 수문의 유래를 적은 것이 아니라 둑을 막을 때 측량을 하던 일본인 측량 기사가 발을 헛디뎌 영산강에 빠져 죽은 것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였으나 현재는 찾을 길이 없다. 마을의 主山인 仁義山은 154.6m의 낮은 산으로 유교의 덕목인 仁, 義, 禮, 智에서비롯된 이름으로 어질고 의로운 사람만이 머무를 수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병풍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간척지로 형성된 농장인 영화농장과 소포농장 자방포농장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이 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무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넓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 산 능선에는 1.5km 길이의 등산로가 나있으며 산 동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탁 트인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다. 무재봉에서 마을로 조금 내려오면 이른바‘하늘 天’ 봉우리가 있는데 나무가 우거지기 전에 마을에서 이 봉우리를 보면 마치天자를 새겨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한자 ‘天’의 획을 따라 깊은 골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산의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 영광군 법성포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인의산이 있다. 榮和(에이와) 농장으로 이름 된 것은 농장을 조성했던 히또미(人見)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신에게 榮光을, 땅에는 平和라는 복음 내용에서 앞자와 뒷자를 따서 농장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몽탄면 당호리 갈산동 수로 터널과 용호마을 북편 어귀에 있는 수문에 榮和農場이란 음각된 글씨가 선명히 남아 있다.마을에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비만 오면 밖으로 나들이하기가 곤란했다. 얼마나 길 사정이 나빴던지 한때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만큼 마을 길 포장 사업이 숙원 사업인 때도 있었다. 바탕이간척지로 뻘밭이기 때문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예견지명이 있다. 마을 옆에 영산강 쪽으로 딴봉이라고 부르는 외딴 봉우리가 있는데 원래는 인의산의 한 줄기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인의산이라부르지 않고 딴봉이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연유를 몰랐다. 그러다 1990년대에 무안군에서 인의산과 이 봉우리의 맥을 끊어 폐수처리장을 세우면서 인의산과는 다른딴 봉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라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마을 뒤에는 여시바위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는데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나 자세한 연유는 알 수가 없다. 초분골이 있으며 멍수바위 전설이 있다. 이 바위에 일제강점기 설치한 등대가 있어 과거 이곳을 드나드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남도의 젓줄인 영산강의 신화를 창조하고 등대불을 밝히자는 여론이 많다. 영산강을 밭으로 삼아 살아갔던 이 지역주민들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전설이다.
1934년 등대가 생겼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 영광군 법성포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인의산이 있다.
기타사항
이 마을은 무등산을 바로 보고 있어서 오래 전 TV를 설치할 때 안테나가 필요없었다. 해서 초기 집집마다 시청료를 받으러 다닐 때 징수원이 애를 먹었다 한다.왜냐하면 TV안테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집마다 방문해 시청료를 받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의산의 지형은 돼지가 누워서 젖을 주는형상이라고도 하고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 앉은 상이라고도 하여 풍수지리가가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했다고 한다.
갑오철 비석이 있는 곳은 영화농장의 본거지로 철도를 놔서 수문까지 농산물을 싣고 가면 배가 들어놔서 싣고 갔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철도의 흔적을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
마을게 주막이 많았다고 한다. 수문쪽 등 4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67년, 68년도에는 하루에 건빵 600봉지를 팔았다고 하고 산에서 자갈을 이어서 도로를 만들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