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의산4리 일로읍 무룡동 작성
  • 무룡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108세대 인구 178명이 살고 있다. 일로에서 3,4번째 큰 마을이다. 20여세대가 넘게 새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예전에는 100세대가 안넘었다고 한다.
자연마을 구성
무룡동은 새터 옥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로읍에서 영산강이 있는 동쪽으로 1㎞가량 가면 나오는 인의산을 주산으로 하여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1903년에 완공된 널따란 자방포 들이 펼쳐져 있다.
지명유래
무룡동이란 지명은 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앞의 샘은 67·68 큰 가뭄 때 목포시에서 시민들의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수량이 많았던 물이다. 그만큼 물이 잘 나왔으며 마을 주변에 물고랑이 많았다. 해서 ‘무룡동’이란 지명은 어쩌면 물과 관련 되어 보이나 더 이상의 추정은 할 수가 없다. 마을의 한자명은 두 가지로 쓰이고 있다. 하나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로 舞龍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자방포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물이 들어왔을 때는 마을이 있는 산의 맥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여 마치 용이 춤추는 형상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주민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즉“마을 뒤 일본인 신사가 있었던 자리에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서 선녀들이 춤을 추었다 해서 舞龍洞이라” 했다고 한다. 두번째의 표기는 武用洞이라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조선군이 이곳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싸운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명에 ‘武’자가 들어가서 연상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형성에 있어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조선조 말기에 김해김씨와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나주정씨와 나주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위치가 지형적으로 좋은 자리에 있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그냥놔두지 않았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이곳 마을 뒤 동산에 일본인 신사(일본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그네들의 민간 종교인 神道의 사원인 神社를 국내 곳곳에 짓고 강제적으로 참배하게 하여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였다.)를 지었다.당시 마을 주변에는 영화농장과 장항포(또는 자방포 라고도 함)농장이 있어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으며 특히 이 마을에는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며 현재도 일본식 가옥 한 동이 남아 있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형국으로 주변 마을보다 눈이 빨리 녹는다고 한다. 마을 회관 앞에 바위가 있다.
마을성씨
현재 새터에 나주정씨 무룡동에 나주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武用洞으로 나온다. 현재는 舞龍洞으로 표기하고 있다. 품바 발상지인 의산리 888번지를 포함하고 있는 마을로행정지역명은 일로읍 의산4리 무룡동이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전체적인 마을의 분위기가 화목하고 편안하다.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우리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마을 일을 결정할 때도 여러 가지 주장과 의견이 나오지만 다수결로 의견이 모아 지면 모두 따라준다고 한다. 벼농사를 하고 밭농사는 시금치와 갓, 양파농사를 한다.
주요시설
마을 회관자리가 샘터였는데 군용 트럭이 실어갔다고 한다. 지름이 4~5미터 이다. 현재는 마을 회관 뒤쪽에 자리르 만들어 놓았고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 어디를 파도 지하수가 나오고 지하수위가 2~3m 높다. 잠사창고가 있고 마을게 토굴이 3개가 있었다. 전시때 피난용으로 사용했고 농산물 저장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집쪽에 있는 굴은 10여명이 들어갈 정도이고 다른 굴은 4명이 들어갈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 본사람들이 파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변화
간척 전에는 몇가구가 안살았고 동네가 커진 것은 간척되고 커졌다고 한다. 풍개질로 메기, 빠가사리, 장어등이 잡혔고 미꾸라지도 많았다고 한다. 도랑새비(토화)도 많이 잡혔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 청년회가 있고 동계는 12월 27일로 정해서 한다고 한다.
공동이용시설
마을 회관 옆에는 상수원이 개발되기 전에 마을 주민이 모두 사용하였던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논이 되어 있었다. 마을에 새누리교회와 주평안교회 등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7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인의산 마을 뒤에세 개의 바위가 있으며 거북등에 하나 마을 교회에 하나 그리고 체육중학교 부근의 남일축사와 품바발상비 앞에 있는 바위로 모두 7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바위들이고 보면 무언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현재는 4개의 바위만 남아있다. 돌이 놓인 자리가 지형이 높고 청호로 이어지는 길이어서 이정표의 역할은 한 것 같다고 추측한다. 또한 마을에 교회가 들어선 자리에도 삼형제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새누리교회의 고인돌은 사택쪽으로 묻어버렸다고 한다. 오향님씨 집에 계란모양 돌과 청수(석수통)이 있다.
동/식물
또한 마을 앞에는 일로읍으로부터 읍나무로 지정받았던 팽나무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자리만 남아 있다. 매년 섣달그믐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몸을 깨끗이 하고 나와 팽나무 앞에서 豊漁와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고 풍물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관리 소홀로 죽고 없어 아쉬운 마음을 갖게 한다. 특히 그 나무는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 왔을 때 배를 묶을 수 있는 구실까지 하여 마을을 위한 중요한 나무였었다고 한다. 사거리 수로공사를 하면서 뿌리사 훼손되어 고사되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안산, 옥계 끝에 있는 코준빼기, 천사촌이 있었던 우무골, 호남정과 큰마을을 두 개로 나누는 윗모실 아랫모실 등이 있다. 안산은 소나무가 심어진 명당터였는데 현재는 밭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코쭌빼기는 코처럼 튀어나왔다. 우무골은 지형이 우묵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랑재는 물이 많이 나와서, 호남정은 움푹하니 생겼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각설이는 가정 대소사에 와서 얻어먹었고 볏짚을 얻어갔다고 한다. 동네에서 얻어먹으러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유물, 유적
신사 앞에 설치하였던 신사의 상징인 도리이(鳥居)는 해방 이후 미군정시 대법원장을 지냈던 나주김씨 김용무씨가 가져가 자신의 고향인 몽탄면 사창리 우산사의기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신사를 참배할 때 손을 씻거나 입을 헹굴 때 사용하였던 석수통은 신사 터였던 동산의 아래, 마을 주민의 집에서 발견하였는데 통의벽에 ‘淸水’와 기증자의 이름이 한자로 조각되어 있었다.
설화
마을에는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바위가 있었는데 불알바위(일명 남근바위)가 그것이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품바발상지라는 표지석의 맞은편 동산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남성의 고환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옛날에는 마을처 녀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얼굴을 들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줌마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미소를 짓고 가며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갔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그 바위가 일어서 있으면 동네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일으켜 세우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뜻있는 남자들은 바위를 몰래 치우려고까지 하였으나 어른들이 ‘그 바위를 옮기면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고 하여 없앨 수 없었다고 한다. 단지 여자들이 그곳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단속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잡초 속에 묻혀있어 과거의 화려했던(?) 바위의 명성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불알바위는 의산6리 소지 마을에 있었다는 연못과 관련이 있는데 陰陽의 이치를 소중히 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인의산은 문중산으로 유적발굴을 하면 좋겠다고 한다. 임도도 현재 1.5km개설되어 있으나 좀 더 개설되었으면 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 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신의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영화농장과 소포들 그리고 자방포 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장엄하게 보이기도 한다.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주산인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주민들은 아직도 매화낙지의 혈이 어디로 뻗어나갔는지 모르고 있다. 영광군 법성포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인의산이 있다. 예저에 신사자리에 복숭아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