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금성은 지장3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명이 특이하다. 지명에 城이 붙은 것도 그렇고 靑衿이란 단어가 쉽게 쓰여지는 지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형상이 여인의 옷깃 같다 해서 靑衿城이라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오래 전 이 마을에 살았던 장흥고씨가 제당봉아래 초막동에서 서당을 열었는데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길에 올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참고로 靑衿은 두 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연상케 한다.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백제인들로 구성된 군사조직의 하나인 청금서당이며 또 하나는 靑衿錄인데 조선시대유생들의 명단을 적은 명부이다. 또한 옆 마을인 대절 마을에 성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주변의 흔적이 청금성 마을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후일의 연구를 위해 기록해 둔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누가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주변에 관련 성씨들의 門山과 주민들의 구전으로 보아 광산김씨와 장흥고씨 등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밀양박씨 朴廷壽(자-의상, 호-한헌)가 남원군 주생면 구천리에서 세거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이곳으로 남하하여 은둔하여 살았다’고 하나 주민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또한 현재는 밀양박씨가 살고 있지도 않다. 현재 이 마을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것은 무안박씨 박 형(자-사미, 1687-1744)이다. 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무안박씨의 족보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추적한 결과다. 참고로 몽탄면 약실 마을의 입향조를 보면 무안박씨로 이 마을의 입향조와 관계가 있다. 약실마을의 입향조는 무안 박씨 박무원(자-인여1585-1672)의 손자인 박진형(자-승백, 호-낙선당, 1660-1741)이다. 공은 조선 개국의 元勳인 풍정 박의룡의 후예로 선대에 해남에서 일로 청금성으로 이거했다가, 공의 代에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족보를 보면 하늘의 도움으로 노루피를 구해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새터 큰동네 작은재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풍수적 형국이 주산 뿐 아니라 조산을 비롯한 좌청룡 우백호가 잘 잡혀있다. 첫 눈에 보아도 배산임수에 와우형의 전형적인 촌락 구조이다. 단지 마을 입구에 길을 가로질러 수로가 지나고 있어 아쉬울 뿐이다. 이런 좋은 터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다는 질문에 한 주민은 미소만 짓는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제당봉에서 힘차게 뻗어 내리던 맥이 장봉산으로 뻗어가던중 담재에서 일본인에 의해서 맥이 잘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큰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성씨
박씨를 포함한 전주이씨 이천서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화목하게 살고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여러 성씨 중 온양 방씨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목포에서 비단장수를 해 많은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로촌면 靑衿里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이로면 청금성리와 인곡리가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지장리 청금성리와 인곡리가 나온다. 이어 1987년엔무안군 일로읍 지장리 대절 삼호 송태 청금성이 나온다. 어진 사람들이 살았다는 仁谷리는 담터골로도 불리는데 담터재에서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에는 삼향장이라 부르는 장터가 있었다. 세명장이라고도 부르는 이 장은해로를 이용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몽탄, 삼향, 청계뿐만 아니라 나주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큰 장을 이뤘다. 지금은 일로읍내로 옮겼지만 장날이 되면 일로나몽탄 사람들이 담터 재를 넘어 마을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예전에는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고목나무가 있었고 주막이 있었는데 미선씨 주막이라고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양철집과 독집, 돌로지은 집도 있었다고 한다.
벼농사가 주업이고 밭농사는 조금 짓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입구에는 마을을 가로 지르는 시멘트 구조물인 농수로가 나 있다. 이 수로는 감돈리 저수지의 물을 일로 전역에 농업용수로 공급하는 수로이다. 예전에는 농사에 필요한 수로였을지 모르지만 영산강 물을 이용하는 요즈음은 마을의 미관을 해치는 장애물로 주민들도 처리에 고심하고 있었다. 현재는 주민들의 강력한 건의로 수로를 지하화 하는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큰동네 샘과 작은재 샘이있었다. 한해때는 샘물이 말랐는데 큰동네 샘은 두레박질을 통해 길러먹었는데 신작로 공사를 하며 메워졌고 작은재샘은 지금도 사용한다고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인곡촌 또는 담터골로도 불리는 작은 재 앞에는 회화나무 당산이 마을을 지키고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구수나무도 함께 있었는데 구수나무는 죽고 현재는 이 나무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회화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吉祥木으로 손꼽아 온나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날 뿐 아니라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둘레가 2미터 70인 이 나무는 약간 기울어져 있어 보수가 시급하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의 꽃 피는 모습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즉, 꽃이 수관의 위쪽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아래로 내려오며 피게 되면 풍년이 오고, 아래쪽 꽃이 먼저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두 그루 중 한그루만 살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제당봉이 있으며 노루샘이 있는 장천샘도 있다. 또한 초막동 감적골(속칭 감자골) 장파골(장파동) 산골 뒷동산 서당골아랫잔등 새터잔등 이문안 똑다리[石橋] 빗갈이 서망골[鼠望谷] 함정골 구수나무골 평상골 수랑골 등이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회화나무 옆에는 4기의 고인돌이 있다. 원래는 5기였는데 1기는 농지 정리 때 묻혀버린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 동학 접주가 살았다. 호적명은 박기삼인데 족보명은 朴淇本(자-도명,1860 - ?)으로 나왔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기삼은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인데갑오년 동학 때 주변 마을의 대표인 접주로 활약 했다고 한다. 동학이 진정되면서관군들에게 쫒겼는데 토포군들이 까마귀떼처럼 마을에 몰려 와 기삼의 집을 쓰려뜨렸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서는 기삼의 증손부인 홍정순 할머니(남행댁)가 살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이 풍수적으로 짜임새가 있어 귀농인이나 외지인이 자주 마을을 찾는다고한다. 지금까지 6가구가 들어 왔는데 앞으로도 7-8가구가 들어올 예정이라 한다. 대체로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면 원주민들과의 화합이 문제인데 이 마을에서는 마을 입주를 허락하기 이전에 주민들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고 외지인에게 준수 사항을 말한 뒤 지키겠다고 하면 받아들인다고 한다.